우리는 동화 속 숱한 주인공들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하는 결말을 드러낼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공주는 위험에 처해있고 왕자는 백마를 타고 와
멋지게 구출해 줄 것이란 환상을
진실한 사랑을 알기 전까진 차마 깨뜨리지 못한다.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이데올로기인가를 깨닫기엔
지나치게 순수한 상태로 세상에 태어난다는 이야기다.
슈렉은 이 시대의 애니메이션이다.
애니메이션이 가져다주는 진가는
잃어버린 동심을 되찾아 웃을 수 있고,
누구 말처럼 일주일을 행복하게 하는 마법과도 같은
천진한 아름다움에 있다.
내 어릴적에는 그런 동심과 아름다움을
'잠자는 숲속의 공주'나 '백설공주', '신데렐라'와 같은
동화책 속에서나 찾았다면,
지금에 와선 그때의 공주들이
드레스 소매를 찢어버리고 박치기까지 서슴치않으며
스스로 위기를 탈출하는 자립심 강한 여성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숭 떨며 오매불망 왕자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무서운 적 앞에 겁에 잔뜩 질려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는 지금 여자는 언제나 남자를 기다리는 바보가 아님을
솔직하게 표현해도 괜찮은 시절에 와있다.
슈렉 3의 감독이 바뀌었다고 내용이 달라질거란 예측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사전정보를 뒤늦게 주워담더라도 슈렉 3는
지난날의 슈렉과의 연결고리에서 어색하게 떨어져있지 않다.
피오나는 진작 무시무시한(적어도 동키와 사랑에 빠지기 전에는)
용이 살고있는 성안에 갇혀있다가
자신을 구해 준 슈렉에게 키스를 받지 못했다.
물론 키스를 해주지 않았다고 불만을 표출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로맨스에 대한 환상이다.
그 정도 환상이야 애교로 봐줄 수 있지 않은가?
그뿐이 아니다. 피오나는 슈렉과 함께 숲 속에서 만난
로빈후드 일당을 멋지게 물리쳤으며,
슈렉이 개구리를 불어 만들어 준 풍선에 응수해
자신도 뱀으로 풍선인형을 만들어 선물해주던 여자다.
거미줄로 벌레들을 잡아 슈렉을 위한 솜사탕도 만들어주었으며,
방귀를 뿡뿡 뀌는 슈렉 괴물 앞에서
함께 맞장구 칠 줄 아는 꾸밈없고 당당하며
그저 '보호의 대상'으로 전락하려는 공주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슈렉 3에 나타난 피오나 역시 어느 동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던
위기에 처한 슈렉을 구출하는 공주였다.
우리의 피오나는
예쁜 척, 우아한 척, 고상한 척, 갖은 내숭과 기교로
자신을 치장하며 살아 온 동화 속 여주인공들을 이끌고
성 안으로 쳐들어가 정면대결을 할 줄 아는 대단한 여성이다.
잠자코 우리를 구해 줄 누군가
(공주들이 꿈꾸는 왕자일 수도, 슈렉일 수도 있다.)를
기다릴 수만은 없다, 는 피오나의 말을 듣자마자
그녀의 어머니는 벽으로 돌진, 성벽을 부순다.
두번의 박치기로 그녀들을 탈출시킨 어머니가
잠시동안 안정을 취해야하는 그 장면이 어찌나 뿌듯하던지 -
이런건 정말 억지 웃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요즘 작렬한다는 몸개그? 그런건 더더욱 아니다.
(신데렐라가 유리구두를 갈아 무기로 사용하고,
백설공주의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맞춰
숲속의 새들이 일제히 공격 병사(?)로 나선다는 설정이
다소 억지스럽더라도 멋있었다.
총과 칼을 이용해 전쟁신을 집어넣지 않은 것이 어디인가?)
슈렉 3가 이 시대의 진짜 환상적인 동화가 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남성성에 갇힌 여성의 이데올로기를 깨뜨리는 것 말고도
더 있다. 2편에 이어 연속 악역을 맡고 있는 챠밍 왕자의 복수.
그는 단순히 겁나먼 왕국을 손에 넣기 위해
슈렉 일당을 무찌르려는 것이 아니다.
차밍은 소외받고 무시당하며 천대받는 숱한 동화 속의 악역들이
겁나먼 왕국을 올려다보게 하는 저 아래의 곳에서
비참하게 웅크려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자신 또한 그 곳에서 삼류공연을 펼치는 신세가 된 것에
겁나먼 왕국에 쳐들어갈 날만을 기다린 것이다.
백설공주에게 사과를 판 마귀할멈,
신데렐라의 계모와 언니들, 피터팬의 후크선장...
우리가 잘 알고있는 그들이 동화 속에서처럼
못되고 나쁜 악당, 일 뿐 아니라
그들도 어디까지나 우리의 동화를 아름답고 예쁘게 그려낼 수
있었던 인물임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마녀가 뜨개질을 하고 싶다는 것을, 후크선장이
피아노를 치고싶어 한다는 것을 상상한 어린이들이 얼마나 될까?
악역을 맡았다고 해서 그들이
꿈도 없고 희망도 없다고 여기는 것은 너무 잔인했던 것이다.
동화 속에는 항상 선과 악이 공존해서
지금까지 우리는 주인공과 함께
나쁜 놈을 함께 무찌르는 통쾌함을 느껴야만
'아! 이래서 역시 착하게 살아야돼!' 깨달을 수 있다고 배워왔다.
슈렉 3 동화 속에는 착한 놈이든 나쁜 놈이든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데에 있어 없어서는 안되는 인물들을
빼놓지 않고 그려내기 위해 애쓴 흔적이 있다.
차밍이 슈렉 3에서 지나치게 큰 비중을 차지해서
주연과 조연이 구분되지 않는다,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져서 이야기 구조가 엉성하다,
고 평하는 사람들의 리뷰를 읽고나니
두시간동안 정신없는 화면만 따라가는 판타지물도,
그렇다고 디지털 그래픽이 난무하는 영화도 아닌데
그들은 왜 그 중요한 주제에 집중하지 못했을까 궁금하다.
단지 하고자 하는 큰 이야기가 세 네개 정도 되다보니
(앞에서 이야기 한
1. 남성성, 혹은 여성성에 부여된 성(性)적 이데올로기,
2. 악역도 '배우'이며 주인공이다,는
소외되고 구박받는 인물들의 외침, 그리고
3. 부모가 되는 것은 다소 어깨가 무거워지고 힘겹긴 하지만
자녀를 통해 가정을 이루는 것 만큼 뿌듯한 성과는 없을 거다, 란
출산장려 캠페인 정도? 또한
4. 아더가 슈렉에게서 배웠다는 진리...
'남들이 자신을 향해 이야기 한 것을 믿어버리는 순간
자신감은 없어진다.' 누구보다도 내가 나를 믿어주고
최고라고 여기는 자기애(愛)만이
자신감과 용기를 가져다준다! 는 교훈.
이렇게 세 네개 정도가 주요사건 되시겠다.)
두시간동안 전부 다 완벽하게,
어느 한가지를 제대로 이야기하기조차 사실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렉 3에는
충분한 볼거리와 귀와 마음을 즐겁게 하는 유쾌함이 있고,
각각의 이야기 속에서 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모조리 흐지부지 않고 설득력을 가진다는 것은
꼼꼼하게 세심하게 만들었다, 는 반증이 되겠다.
(음...엔딩 크레셧을 요즘 사람들은 잘 보지 않는다, 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실제 슈렉에서의 마지막 자막신은
안 보면 큰 손해다. 귀여운 선율의 노래에 맞춰 춤추는 출연진,
그보다 더 깜찍한 '각각의 목소리 출연진과 스텝의 이름들'이
하나하나 앙증맞게 표현된다. 영화 끝나고 자막 올라가는 것에
그 정도 신경을 썼는데 이 영화가 대충 만들었다,
전편의 우려먹기다, 는 소리를 듣는 건 조금 억울하지 싶다.)
여하간 우리의 녹색 괴물이
1, 2편에서 미워할 수 없는 다정다감한 캐릭터로 친숙해졌다면
3편에선 좀 더 의젓한, 아니 의젓해지려고 노력하는
녹색 괴물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슈렉이 겁나먼 왕국의 왕이 되길 포기한 것이
편하고 아늑한 숲속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삶의 욕구라고 본다면,
슈렉은 누구들의 왕이나 누구의 남편이나 누구의 아버지로서
최선을 다하는 삶보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들을 아끼고
그것들에게 자신을 조금씩 맞춰나갈 줄 아는
현실적이면서도 욕심 부리지 않고 꾸며내지 않은
이상적인 인간형을 제시하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일주일을 행복하게 하는 슈렉 3가
혹평에 시달려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된다면
이 시대의 진정한 동화를 읽는 즐거움 마저 져버리는 일일 것이다.
그가 남긴 명대사 역시
슈렉 4를 기대하게 하는 힘이 된다.
Tip. 슈렉 3 의 교훈이 담긴 명대사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생기고 멋진 괴물(oak)이라고 믿고 있었어.
하지만 사람들이 나를 보고 못생겼다고 하고,
괴물이라고 무섭다고 말을 했지.
내가 그 말을 믿어버리는 순간, 나는 자신감을 잃었버렸어.
사실이 아닌데도 말이야.
자, 이제 너 자신을 믿어.
세상이 뭐라고 해도 너 자신을 믿어.
하다못해 녹색 괴물도 그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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