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걸쳐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 나오는 소품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외줄'이다.
이승과 저승 사이를, 차안과 피안 사이를 경계 지어 주는 메신저 같은 역할이다. 귀신들이나 다닐 법한 길(반 허공)은 말 그대로 이 편도 저 편도 아닌 '경계'이고, 그 경계(외줄)에 귀신하고 통할 법한, 사람도 아니고 신도 아닌 존재 하나가 '걸쳐 있다'
광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신을 대신해 사람들에게 메세지를 전하기도 하고 사람들을 대신해 천지신명에게 하소연을 대언하기를 자청하는 존재이다.
다락방에서 [광장]을 내려다 보며 곱씹어야 하는 '실존'의 문제는 이들에게 별 의미가 없는 듯, 오히려 이들은 기꺼이 [장터]에 나와 그야말로 '신명'나게 한판 굿을 벌인다. 그 굿판을 바라 보며 관객들은 맺힌 응어리를 한바탕 웃음으로 털어 버린다.
'고달프고 서글픈 현실'과 '죽어서라도 누려보고 싶은 사람다운 삶' 사이에 걸쳐 있는 관객들은 광대들의 놀이판에서 일종의 '초월'을 경험한다. 놀이가 끝나면 다시 고달픈 현실이지만, 놀이가 진행되는 동안 거기에 몰입하면서 잠시 자신이 속한 세계로부터 마치 공중부양을 하듯 떠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초월하여 맛보게 되는 세상에서, 양반이나 기득권 세력은 더 이상 수탈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며, 그런 과정을 통하여 현실의 두터운 경계(벽)는 허물어진다.
그런데...
놀이감이던 대상이 갑자기 현실에 들이닥친다. 그것도 모든 가진 것들의 최정점에 자리하고 있는 존재, '왕' 앞에서 놀아야 한단다.
날아다니는 귀신도 떨어뜨릴 것 같은 '왕' 앞에서 광대가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왕'은 결코 무엇과 무엇 사이에 걸쳐 있는 존재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그것은 그가 바로 '초월'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광대가 긴장하게 되는 이유이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영화에 빠져드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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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월'의 또 다른 얼굴 - 사랑
남자와 여자 사이의 경계에 '공길'이 서 있다. 그는 광대이지만, 걸쳐져 있는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는 모습이다. (원작에서 주인공은 장생이 아닌 공길이며, 원작에서는 신분적으로 초월하려는 인물로 묘사된다)
감독은 원작의 메세지를 차용하면서, 과감한 도전을 하게 된다. 초월은 단지 신분(자신이 속한 외형적 상황)에서의 이탈만은 아니라고 하는...
장생과 공길, 연산과 공길, 연산과 녹수, 연산과 죽은 어머니, 연산과 처선. 얽히고 설킨 애증의 관계는 씨줄과 날줄처럼 직조되며 하나의 메세지를 향해 영화에 스며든다.
전하려고 하는 메세지는 선명하고 간결하다.
자신이 속한 외부의 환경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차고 올라오는 어떤 욕구,혹은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이다.
그 한복판에 왕의 모습이 아닌, 그저 연약한 한 인간으로서의 연산이 서있다.
절대로 웃을 것 같지 않은 왕이 웃는다. 광대의 놀이는 신분적 초월에서 비롯되는 카타르시스에서 오는 웃음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신분적 초월의 상징인 왕이 웃고, 우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왕이 웃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불편해 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왕을 치마폭에 두고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햇던 한 여자(녹수)와, 왕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며 자신들의 치부(致富)에만 정신이 없던 탐관오리들이다.
왕이 '사랑'의 허기짐에서 오는 광인의 모습을 보였다면, 이들은 '사랑'의 뒤틀어짐에서 오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배가 고파 남의 밥에 손을 대는 것은 동정의 여지가 있을지언정,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남의 손모가지를 자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다.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두 눈)까지 희생해 가며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장생에게서 진정한 광대-신과 인간의 메신저-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신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었고, 우리는 그 사랑을 통하여 진정한 초월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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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진정한 광대 - 감우성,장진영,장항선,유해진,정석용,이승훈
오늘날의 광대는 어찌보면 배우라고 할 수 있다. 노래 잘하는 가수(?), 연기 잘하는 배우(?)...아이러니컬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배우들의 연기는 빈들에 마른 풀을 적시는 단비만큼이나 눈물겹도록 감격스럽다.
영화는 이제 기본적으로 젊은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어가고 있다. 이준기라는 신인이 주는 매트로섹슈얼이나 크로스섹슈얼이 이 시대의 트랜드이고 트랜드에 민감한 젊은 사람들이 극장을 찾아 오는 것은 낯선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트랜드에 편승한 관객몰이만으로는 결코 1,000만 관객입장이라는 위업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결코 녹녹하지 않는 주제를 바쁜 현대인들에게, 그것도 나이든 중장년층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외줄을 타는 연기만큼이나 어렵고 또한 아찔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진정 이 시대의 광대였고, 스크린 안에서 벌이는 그들의 놀이판을 보면서 사람들은 왕도 아니면서 웃고 또한 울었다.
본격적인 자본주의 시대로 돌입하면서 '빈익빈 부익부'라는 시대의 조류에 휩쓸리며 어디 한 곳 변변히 마음의 안식을 누릴 수 없었던 누추한 영혼의 대중들은, 배우들이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다'고 하는 데도 스스럼없이 스크린 안으로 들어갔고, 마지막 외줄에서 광대들이 다시 태어나도 양반도 아니고, 왕도 아닌 광대로 태어난다고 했을 때 아무리 힘들어도 지킬 건 지키고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하는 잡놈,잡년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배우들의 연기를 칭찬하고, 감독과 배우들이 이구동성으로 관객의 위대한 힘을 이야기 하는 시대.
세상이 뒤숭숭하여 흥행에 성공한 영화라고만 하기엔, 배우들과 관객들이 만들어 낸 '신명'과 '공명'이 너무 크게 느껴지는 그런 영화.
지상의 '왕'도 없었고, '남자'도 없었지만, 반 허공에서 벌어진 그네들의 이야기가 귀신도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보게 만들었거나, 아니면 나야말로 귀신에 홀린 듯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넋이 나간 듯 아닌 듯 바라보게 했던 그런 경험이었다. 내게. 왕의 남자는.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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