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태평성대 겐로쿠 시대. 천하가 통일되고 세상은 평온하니 사무라이들의 존재는 희미해졌다. 하지만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길을 찾아 나선 소자는 여전히 사무라이의 사명감을 갖고 복수의 칼을 간다. 그러나 어렵사리 복수의 대상이 사는 에도에 당도한 소자는 마을 사람들과 지내는 3년 동안 복수심을 잊어간다. 주변 사람들에게 동화되며 자신의 정체성과 맹목적인 복수에 회의를 느끼게 되는 소자. 점점 혼란스러워하는 소자에게 미모의 여인 오사에는 “미움과 증오만 남긴 복수는 무의미하다”며 그를 만류한다.
<하나>는 여러 가지로 전복적인 영화다.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답게 <원더풀 라이프> <아무도 모른다> 등을 통해 리얼리즘 화법을 구사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자신의 작품세계에 확실한 변화를 가했다. 먼저 무겁고 시니컬한 주제의식을 벗고 카메라에 깃든 진지함도 덜어냈다. 또 ‘피’를 연상시키는 사무라이, 복수 등의 소재를 사용했지만 기존의 사무라이영화를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유형의 사무라이영화를 고안해 냈다. 이야기 전개도 마찬가지다. 이야기의 무거운 흐름을 일거에 바꾸는 엇박자 슬랩스틱과 예상을 빗나가는 대사는 <하나>가 지닌 또 하나의 매력이다. 코믹 시대극 <하나>는 익숙하지만 신선한 무늬를 띤 영화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가문의 위상을 위해 소자는 아버지를 살해한 카나자와를 찾아 나선다. 그는 마을에서 생활하며 복수할 날만을 기다린다. 하지만 정작 소자는 사무라이 기질에 못 미치는 실력과 태도를 지녔다. 우람한 체격의 남자가 탕에 들어오자 움찔하며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주고, 마을 소년들에게 글과 산수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는 그는 복수에 대한 초심을 잊어간다. 게다가 카나자와를 눈앞에 두고도 그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보고 복수심을 선뜻 꺼내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한다. 복수에 대한 소자의 혼란스러움은 명분과 전통을 무조건 쫓아야 하는 사무라이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뜻한다. 이는 맹목적인 가치 추구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의 고민과도 궤를 같이하는 대목이다.
경쾌한 음악과 간헐적인 웃음을 유발하는 코믹한 대사는 영화의 분위기를 한껏 지탱해 준다. 특히 과잉에 가까운 몸동작과 엉뚱한 말로 소자 주변을 맴도는 마을 주민들은 이 영화의 숨은 공로자다. 하지만 이들의 진정한 공(功)은 “검 말고도 배운 게 많다”거나 “싸움에 맞서기보다는 도망치는 편이 낫다”며 소자의 복수를 만류하는 대사에 있다. 이는 히로카즈 감독이 던진 메시지이기도 하다. <하나>는 맹목적인 복수가 가진 무의미함을 묻는다. 일본 ‘사무라이영화’ 장르를 가볍게 비틀며 적소에 물음에 대한 해법을 배치한 히로카즈 감독의 의도는 엉뚱한 캐릭터 중 한 명인 마고의 대사에도 묻어 있다. “벚꽃이 미련 없이 지는 이유는 내년에 더 아름답게 피기 때문이다”는 대사는 기묘한 울림을 남긴 채 봄꽃 향기처럼 스크린에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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