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의 막바지, 네덜란드의 유대인 여성 레이첼(캐리스 반 허슨)은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가족과 함께 국경을 탈출하려 하지만 독일군에 발각된다. 무차별적인 총탄 공세 속에서 가족을 모두 잃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레이첼은 레지스탕스에 가입하면서 복수를 다짐한다. 의사 출신의 레지스탕스 리더 한스(톰 호프먼) 등과 다양한 저항활동을 펼치던 레이첼은 나치 장교 문츠(세바스티안 코흐)를 유혹해 네덜란드 안에 차려진 독일군 사령부로 잠입하게 된다. 문츠의 비서가 된 레이첼은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고 다양한 정보를 빼내는 등 혁혁한 수훈을 세우지만, 문츠는 그녀가 스파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하지만 레이첼과 문츠는 이미 고칠 수 없는 중병에 걸렸으니, 그건 사랑에 빠진 것이다. 평화주의자 성향이 강했던 문츠는 레이첼의 행동을 눈감아주고 레이첼 또한 문츠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독일군 감옥에 갇힌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탈출시키는 계획이 정보 누설로 실패하게 되자 레이첼은 의심을 받게 되고, 문츠 또한 나치에 의해 배신자로 붙들리는 신세가 된다.
폴 버호벤이 <할로우맨> 이후 6년 만에 만든 영화 <블랙북>은 얼핏 보기에 전쟁 중에 피어난 사랑과 인간애를 다루는 휴먼드라마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인간의 삐뚤어진 욕망을 극단적인 방법론으로 보여줘온 버호벤이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 같은 순진한 노선을 택할 리는 없는 일. <블랙북>이 버호벤의 본색을 드러내는 것은 영화의 후반부 스릴러의 색채가 뚜렷해지면서부터다. 이중의 위협을 피해 문츠와 레이첼은 탈출에 성공하고, 독일은 패망해 네덜란드는 자유를 되찾는다. 그러나 여전히 피해다니는 신세가 된 두 사람은 그동안 일어났던 사건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나서게 되고, 레이첼은 비밀의 열쇠를 품고 있는 ‘블랙북’을 손에 넣게 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버호벤이 바라보는 전쟁의 본질은 ‘조국’이나 ‘자유’, ‘해방’ 등 거대한 명분이 아니라 개인들의 욕망이다. 영화는 결국 이 전쟁의 이면에는 인간의 추악하고 역겨운 탐욕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그 폭로의 방식 또한 버호벤의 스타일을 따른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거침없는 노출과 폭력 장면들은 우리 나이로 일흔이 된 이 감독이 여전히 ‘난폭한 리얼리스트’의 길을 걷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블랙북>은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영시네마상과 네덜란드 필름페스티벌에서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등을 받기도 했다. (출처 : 씨네21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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