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국주의의 폐해는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다.
태평양 전쟁이 한참이던 1945년 2월 19일, 사흘 동안 폭격을 퍼부은 미국 해병대는 2만 2천 명의 일본 수배대가 지키고 있는 검은 모래, 유황 냄새가 나는 황량한 섬 이오지마에 상륙한다. [아버지의 깃발]을 보면 당초 폭격은 10일 동안 지속될 예정이었지만 빨리 전과를 보여주고 싶은 상부의 조급함 때문에 사흘로 축소된 것이다. 사흘간의 폭격이 진행되는 가운데 일본군의 움직임은 전혀 포착되지 않는다. 그러나 섬에 상륙한 해병대를 향해 일본군의 총과 대포 공격이 시작되고... 결국 5일이면 함락할 수 있다고 예상했던 이오지마 함락 작전은 3월 26일에 가서야 이뤄진다. 2만 2천 명의 일본군 중 1,083명만 살아남았고, 미군도 전사 6,821명, 부상 21,865명의 엄청난 희생을 치러낸 뒤에 얻어진 결과였다.
[아버지의 깃발]에서 미국 해병대는 일본군이 숨어서 총탄을 퍼붓는 스리바치산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쳐다본다. 그러나 카메라를 돌려 동굴 속으로 들어간 화면에서는 처음부터 지원은 없으며, 최후의 일인까지 섬을 지키라고 옥쇄를 강요당한 일본군의 공포가 배어 나온다.
쿠리바야시는 미국 유학파 출신의 합리적이고 사려 깊은 신임 사령관이다. 그는 친미적이라는 이유로 사실상 죽음이 뻔히 보이는 이오지마 섬으로 발령 받는다. 발령 받아 도착한 첫날부터 섬 이곳저곳을 돌아본 쿠리바야시는 해변가에 만들고 있는 참호파기를 중단시키고 새로운 작전을 하달한다.
새로운 작전이란, 끝까지 살아남는 것.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그는 부하들에게 쓸데없는 자결을 막고 참호 속에서 적을 공격하라고 지시한다. 일본군의 끝까지 살아남는 전술은 미국에게는 무엇보다 잔인한 방어술이었다. 일본군은 처음부터 버티다가 결국 죽는 길 밖에는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초반 공격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자 희망을 가져보기도 한다.
사회에서 부인과 함께 빵집을 운영했지만 국가에서 빵굽는 기계마저 무기를 만들기위해 가져가고 , 결국 임신한 부인을 놔두고 입대 영장을 받게 된 사이고, 그리고 헌병으로 밤에 마을 순찰을 돌다가 고참으로부터 시끄럽게 짖는 개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지만 차마 죽이지 못해 헌병대에서 쫓겨나 이오지마로 좌천된 시미즈는 사령관의 명령을 어기고 수류탄으로 자결을 강요하는 하사관을 피해 다니다 미군에게 항복하기로 한다. 같이 움직이면 의심받을까봐 먼저 항복한 시미즈는 미군에게 사살 당한다.
이 영화에서는 일본의 군국주의, 국가주의에 대해 직접적으로 비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국가는 사이고에게는 가족을 버리도록 강요하고, 시미즈에게는 비정하게 개를 죽이라고 명령한다. 끝까지 살아남으라는 쿠리바야시 사령관에게도 죽음으로 돌진하도록 강요하는 힘이 바로 일본의 군국주의, 국가주의다. 일본의 군국주의, 국가주의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인근 국가, 그리고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많은 국가들에게 공포와 죽음을 안겨주었지만 바로 그들 자신의 국민과 일본군에게도 그것은 공포와 죽음을 안겨주는 힘이었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더 이상 발사할 포탄도 떨어지고 식량도 이미 오래전에 바닥난 상황에서 일본군은 마지막 죽음을 향한 돌진만을 남겨두고 있다. 이 때 본부에서 무전이 들려온다. 이오지마를 지키는 일본군을 위한 어린아이들의 노래 선물. "이오지마는 우리의 소중한 땅... 죽을 때까지 지켜주세요.." 천사같이 순수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동굴 속에 울려퍼진다. 쿠리바야시 사령관을 포함한 일본군은 넋이 나간 듯 그 노래를 듣고, 마지막 돌진을 위해 동굴 밖으로 나간다. 이 장면에서 정말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국가란 국민을 보호하고 지켜주려고 노력할 때 존립 의미가 있는 것이지, 국민에게 죽음을 강요하고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 국가란 존립해야 할 가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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