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만화가 남녀노소 모두에게 호소력 있는 매체가 되긴 했지만, 아직 만화가 애들용이라는 인식을 가진 이들은 많다. 하지만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들을 살펴보면, 만화란 굉장히 뛰어난 예술작품이 될 수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물론 현실적이기보다는 과장되거나 비현실적일 만큼 세련된 경우가 많은 만화의 경우 어설프게 현실로 옮겼다가는 유치하기 짝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지만, 작정하고 만화 속 이미지를 그대로 현실로 옮길 경우에는 시각적 신세계를 만나기도 한다. 우리는 이미 <씬 시티>에서 그런 느낌을 경험한 적이 있다.
<씬 시티>와 마찬가지로 <300> 역시 프랭크 밀러의 동명 만화가 원작이다. 아니, 단순히 만화라기보다는 "그래픽 노블"이라는 엄연한 명칭을 써야 할 것이다. <씬 시티>에서 비현실적인 잔혹성과 기괴한 캐릭터들을 너무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재주를 펼쳐 보였던 프랭크 밀러가 이번 <300>에서는 고대를 배경으로 한 기존의 서사 액션 영화들에서 상상도 하기 힘들었던 비주얼을 펼쳐보인다. 이 영화는 만화를 그대로 현실로 옮겨온 환상적인 영상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만화가 애들용이라고? 이걸 보면 만화가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 될 수 있는지 알게 될 거야"라고.
고대 그리스 시대. 아시아를 넘어 전세계를 정복하려는 페르시아가 그리스에까지 세력을 뻗치고, 그리스 내 여러 도시들을 하나씩 정복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리스 안에서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가장 강인하기로 소무난 스파르타는 그런 페르시아의 위협에도 쉽게 굴복하지 않으니, 그 중심에는 어렸을 때부터 처절한 생존싸움을 이겨내고 강력한 왕이 된 레오니다스(제라드 버틀러)가 있다. 스파르타에 페르시아의 왕명을 전달한 사신들이 와서 흙과 물을 바칠 것을 강요하지만, 레오니다스는 단번에 거절하고 사신들을 처단한다. 이에 분노한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하고, 레오니다스는 이에 스파르타의 강력한 군대로 맞서려 하지만 페르시아와 결탁한 제사장들은 전쟁을 하면 안된다고 한다. 하지만 스파르타의 모든 시민들이 희생당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만은 없었던 레오니다스는 병사 전원을 동원하지 않고, 오로지 300명의 정예군사만으로 페르시아의 수백만 대군과 맞서기로 한다. 누가 봐도 승산이 없는 이 불가능한 전투 속에서 스파르타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이 영화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인공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자연스러운 인간미는 잘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그 조형미를 스크린을 통해 접하는 순간의 임팩트는 근래 어느 영화들보다도 강력하다. 배우들의 모습부터가 그렇다. 레오니다스를 비롯해 300명의 군사들 중에서 부드러운 몸매를 소유한 사람은 한명도 없다. 하나같이 빨래판같은 복부와 격하게 다져진 굴곡있는 몸매를 과시하면서, 하나같이 고대 조각상 속 전사들의 모습을 그대로 실현시킨다.
영화의 주인공인 레오니다스 역의 제라드 버틀러의 모습은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다. 빨래해도 될 것 같은 복부와 울끈불끈 솟아오른 근육은 물론이요, 얼굴만 봐도 마치 만화에서 그대로 걸어나온 듯 눈을 의심케 한다. 언젠가 이 영화의 원작 만화 중 한장면을 얼핏 본 적이 있는데, 제라드 버틀러의 크고 깊은 눈매와 숯검댕같이 시커먼 눈썹과 수염은 짙은 필체로 그려진 만화 속 캐릭터 그대로였다. 들여다보면 들여다 볼 수록 "저게 사람이야 조각상이야" 하며 새삼스럽게 눈을 비비게 할 만큼 배우들의 외양에서부터 형식미가 제대로 살아났다.
이들의 연기 또한 마찬가지다. 현실적이고 세심한 대사로 감성을 건드리거나 하지 않고, 다소 진부하면서도 선굵은 대사들을 통해 감정 표현을 극대화하는 패턴을 유지한다. 분노와 행진도 폭발적으로 하고, 가족을 잃은 슬픔 또한 폭발적으로 표현한다. 지축을 뒤흔드는 함성처럼 자신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스파르타의 군사들의 모습에 적잖이 압도될 수 있겠지만, 극적으로 조형된 볼거리와 짝을 이루는 이들의 극적인 연기는 영화의 카리스마에 더욱 빠져들게 만든다. 이처럼 우리가 흔히 상상 속에서만 떠올렸던 강력한 체력과 정신력을 겸비한 스파르타인들은, 외양과 연기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다듬어진 배우들의 면모에 의해 그대로 현실화된다.
이 영화의 볼거리에 대해 간단하게 얘기한다면, "투자대비 효과"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6천 5백만 달러가 결코 적은 돈은 아니지만, 이런 스펙터클 서사 전쟁극에서는 "저예산"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 영화가 보여주는 볼거리는 3배 가까운 제작비가 든 <트로이>마저 뻘쭘하게 만들 정도로 압도적이다. 해안을 빼곡하게 장악한 수백만 명의 페르시아 군, 영화 속 대사처럼 태양을 가릴 만큼 하늘을 뒤덮어 버리는 화살들, 페르시아 군사를 실은 배들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폭풍, 코뿔소같은 미지의 동물에서부터 코끼리에 이르기까지 온갖 큰 동물과 수많은 군사들이 한꺼번에 돌격하는 순간까지, 그야말로 비현실적일 만큼의 스케일로 관객을 압도한다. 물론 이런 스케일이 실제 엑스트라를 몇만명 씩 동원하고 실제 세트를 지었다기보다는 대부분이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합성 기술에 기반한 것이겠지만(<씬 시티>도 그랬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합성이네"와 같은 댓글로 우습게 여기는 합성도 이 정도면 예술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단지 규모뿐이 아니다. 이 영화의 비주얼에 있어서 더 강조해야 할 것은 테르모필레에서 펼쳐지는 전투 장면의 디테일함이다. 스피디한 진행과 슬로우 모션을 교차하면서 리듬을 완벽하게 조절하며 관객이 느끼는 긴장감까지 능숙하게 다루는 근접 전투신, 마치 한 편의 격렬한 무용을 펼치는 듯 능숙한 칼놀림으로 무지막지한 칼에 신체 부위가 잘려나가려는 순간을 슬로우 모션으로 강조하는 장면들, 칼과 창으로 적군의 몸을 관통했다가 빼내는 순간의 그 찝찝한 듯 통쾌한 질감과 그 순간 마치 봄날의 꽃잎처럼 흩날리며 퍼져나가는 핏방울들까지... 사람 몸이 잘리고 유혈이 낭자하는 정육점스런 전투신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다만 이런 정육점 시퀀스들이 잠깐씩 지나가는 게 아니라 슬로우 모션으로 꽤 지속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잔혹한 장면에 약한 분들은 피하시는 게 좋을 듯 싶다) 폭력을 오락적 볼거리로만 여기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일인가 하는 것에는 의심이 들긴 하지만, 이 영화 속 폭력의 아름다움은 이러한 질문마저 잠시나마 무력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흩어지는 피들도, 날아가는 머리마저도 아름답다.(이 전투신의 미학은 엔딩 크레딧에서 또 한번 재현된다.)
이렇게 볼거리 측면에서는 한치의 흠도 용납하지 않은 듯 완벽을 기한 반면에, 이야기 면에서 크게 두드러지는 점은 없다. 페르시아의 횡포에 맞서 전투에 나서고, 그 과정에서 배신과 위기를 겪으며 애국심과 가족애, 전우애를 확인한다는, 전쟁영화로 치면 지극히 뻔한 내용. <글래디에이터>처럼 마지막 순간에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강력하면서도 세심한 감성도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다. 결말에 가서 "300명의 스파르타 군사를 기억하라"는 이야기도 여느 애국주의 영화들처럼 지극히 뻣뻣하고 진부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페르시아쪽 군사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기괴한 모습을 한 괴물과 미지의 동물들은 물론 마법사들까지 나오는 다소 비현실적인 모습을 보면서 당시 동양의 문화에 대한 다소 왜곡된 시각도 배여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이렇게 주제의식에 있어서는 새로울 것이 전혀 없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가 극장에서 볼 가치가 있는 것은 앞서 얘기한 마치 신세계를 경험하는 듯 놀라운 경험을 제공하는 시각적 요소 때문이다. 속된 말로 "뽀샵 효과"를 최대로 한 듯 미적 감각을 극대화시킨 화면빨과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은 듯한 배우들의 모습, 이리 튀고 저리 튀는 핏방울마저 한 떨기 꽃잎처럼 느껴지게 하는 아름다운 유혈낭자 전투신에 이르기까지... <300>이 보여준 시각적 쾌감은 그야말로 이전에 느꼈던 것의 300% 수준이었다. 극장에서 봐야 그 압도적인 시각적 카리스마에 매혹당할 것이며, 화질이 완벽한 디지털 버전으로 본다면 더욱 그 때깔에 반하게 될 것이다.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형식미의 최대치에 도전하는 듯한 비주얼, 그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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