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좋은 놈,나쁜 놈,이상한 놈]이 주연캐스팅을 발표했다. 몇 년전 "이 죽일놈의 사랑"으로 사랑에 온몸 바쳤던 그 놈, 그 전해에도 [그놈은멋있었다]로 멋드러진 그 놈이었다. 그런데 왜 [그놈목소리]의 이 놈은 목소리만 남긴채 세상에 묻혀 우리들을 비웃으며 살아가고 있을까? 이 영화를 보고 그 놈은 과연 죄의식을 느끼고나 있을지 모르겠다. 놈자들이 판치는 이 세상 속, 그놈 목소리를 한번 귀기울여 들어보자.
DBC 9시 뉴스 앵커를 맡고 있는 한경배(설경구扮)가 있다. 좀처럼 보기힘든 설경구의 깔끔하고 단정된 모습이 너무 생소했지만 크게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늘 그의 마지막 멘트는 웃찾사의 '형님뉴스'처럼 서민들의 입장에서 시원시원하게 한방을 날린다. 집에서는 아내 지선(김남주扮)이 그를 반갑게 맞아주고, 어린 상우는 아빠를 기다리다 지쳐 곤히 자고 있다. 남부러울 것 없이 살고 남욕먹을 것 없이 살던 한 가정이 소개된다. 평범하다기보다 지극히 모범적으로 사는 경배의 가정이다. 어느 날 삐걱대는 그네 앞에서 상우는 사라진다. 그리고 자정에 걸려온 전화, 바로 그놈이다! 경배는 상우의 안전을 위해 침착하게 돈만 준비해서 접선을 시도한다. 하지만 상우를 데리고 귀가하겠다던 경배는 어이없게도 김형사(김영철扮)만을 달고 들어온다. 비공개로 수사가 진행되지만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밭다리를 걸어야 할 판국에 헛다리를 짚고 있는 그들만의 소란스러운 수사는 번번히 경배와 지선의 신뢰만 떨어뜨리고 갈등을 불어일으키게 되는데,,,
실화가 소재인만큼 뒷배경이 궁금하다. 이 영화의 제작소식이 전해지고, 촬영종료 후 홍보가 시작되면서 이미 그놈에 대한 수배는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1991년 故이형호 유괴살인사건에 근거하여 제작된 [그놈목소리]는 박진표 감독의 3번째 팩션(fact+fiction)영화다. 그놈은 누구나 아는 강동원이지만 진정한 그놈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이미 공소시효도 지나버렸고, 유족들에게는 공소시효 날짜가 형호군을 두 번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리라. 그 와중에 제작된 박진표 감독의 이 영화는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영화다. 일전에 이 사건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담당한 이력이 있는 그로서는 더욱 이 영화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많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는 더욱 구구절절하다. 진솔한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영화내용을 부정할 수도 없고, 미워할래야 미워할수도 없는 영화가 바로 [그놈목소리]다. 하지만 조금만 더 영화적으로 꼬집어 바라보자. 분명히 지적할 부분이 무궁무진한 영화다. 지금부터 불쑥불쑥 튀어나올지 모르는 싫은 소리에 故이형호군과 유족들, 그리고 그놈을 잡기위해 노력하신 수많은 분들이 크게 마음 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단 그놈부터 짚고 넘어가자. 영화 속 그놈은 강동원이다. 얼굴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원거리 모습이나 실루엣만을 등장시키고, 거의 대부분은 목소리 연기로 승화시켰다. 강동원만의 특유한 음색과 어눌한 말투가 오히려 영화 속 그놈에게 적격으로 맞아떨어진 것 같다. 통화 때마다 빈정대는 '다나까'말투나, 말끝마다 채팅용어(ㅋㅋㅋ)를 남발하는 그의 목소리 연기는 [폰부스]의 키퍼 서덜랜드도 무시 못 할 정도다. 그리고 오랜만에 세련되게 변신해주신 설경구다. 지금까지의 캐릭터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이번 한경배역은 어쩌면 평범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사랑을놓치다]에서 지극히 평범한 역을 소화했던 그로서는 이번연기에서도 우리를 실망시키지는 않는다. 특히 마지막 접선시 주기도문을 외우며 '제발 한번만...'을 연신 외치는 모습은 가히 최고라 할 만하다. 그리고 영화계에서는 [아이러브유]로 바닥평점을 기고 계신 김남주도 한 몫을 단단히 해낸다. 침착과 흥분을 넘나드는 설경구의 연기와 애절과 처연을 넘나드는 김남주의 연기는 무시할 수 없는 이 영화의 강점이다. 하지만 경찰 캐릭터는 참 거슬린다. [달콤한인생]에서 보스역을 맡았고, 관심법의 달인이었던 김영철이 여기서는 나체쇼를 벌이고, 트렁크에서 자장면을 먹으며, 영화 내내 굴욕적 모습이 역력하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특히 엉뚱한 상황연출은 감독의 심오한 의도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의 맥을 계속 끊어놓는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싸인씬(!)이 아닐까 싶다. 또 조연캐릭터들이 굉장히 다채롭다. [친절한금자씨]의 마녀, '환상의커플'의 공실장 등 어딘가에서 많이 봤을 성싶은 조연과 단역배우들이 어울림없이 즐비하게 늘어선다. 하지만 그것 역시 영화의 큰 흐름을 수많은 물줄기로 갈라버린다. 경찰들끼리 티격태격하는 것이나, 경배와 지선까지 합세하여 갈등을 불어일으키는 것들이 오히려 나중에 상우의 싸늘한 주검 앞에서 허탈감만 늘려놓은 꼴이 된다. 아쉽게도 감독은 진솔한 실화를 통한 동정표를 빌미로 너무 보여주기에만 급급했던 것 같다. 자식을 잃은 부모처럼 영화마저도 이성을 잃어버린 꼴이다. 또한 여러모로 [그놈목소리]는 [살인의추억]과 많이 닮아있다. 마치 그를 답습을 하려는 듯한 영화 속 미쟝센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는 후자의 영화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다시 한번 증명하는 꼴이 되고만다.
영화는 '유괴○○일째"가 거듭될 수록 하품이 나오고 기지개가 켜질만큼 영화적인 연출로서는 굉장히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작품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 영화를 어찌 미워할 수 있으랴,,,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노린 것이 아닐까? ^^ 감독이라면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을법한 자신만의 하고싶은 특유의 작품이 박진표 감독에게는 바로 이 영화가 아니었을까 사료된다. 아님말고!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서울을 순회시키는 그놈은 정말 짜증날 정도로 답답하게 만들고, 그 짜증은 고스란히 영화에게 돌아가는 것 같다. 답답함과 짜증, 그 감정선을 타고 흐르는 울분이 복잡미묘하게도 영화에게 반사적으로 안겨지고만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의 단점이 아닐까? [그놈목소리]는 초반의 호기심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허리가 없이 처음과 끝에만 힘을 싫어준다. 이 영화의 진가는 마지막에 돌아온 한경배의 뉴스진행씬에서 발휘되는데,,, 결국 하고싶었던 말은 마지막에 있었던 것이다. 그 마지막 공개수배를 통해 감독은 우리에게 진짜 그놈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지금도 우리 곁에서 거친 숨을 쉬고 있을지 모를 그놈말이다. 어쩌면 운좋은 관객이라면 그놈과 함께 영화를 관람했을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한 그놈은 분명히 이 영화를 봤을 것이다.
모든 걸 잃고 자포자기하며 회의감에 빠진 경배와 가슴이 미어져 피멍이 들도록 주먹으로 내리쳐야 했던 지선, 그네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소시민적 삶과 닮아있다. 착하게 살려고 모범적으로 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에는 나쁜놈의 표적이 되고마는, 어쩌면 허영심과 허세에 둘러쌓여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우리의 삶! 하느님을 불신하며 십자가를 내리쳤던 경배처럼 정작 세상은 공평치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상우가 타던 놀이터의 그네처럼 지금도 삐걱삐걱대고 있을 세상의 틀에다가 구니스를 듬뿍 쳐발라주고 싶다.
(1991년 당시 내가 9살이었다) 이보게 형호친구~ 이제 20대 젊은청춘에 세상을 짊어져도 시원찮을 판에 이 세상은 자네를 그 때와 작년, 두 번이나 죽게 하였네.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 자네는 전국민들의 가슴 속에 숨쉬며 살아있을걸세. 자네는 그놈이 누군지 알겠지? 이미 용서를 했나? 모를 일이지만 힘을내게. 나와 전국민이 명복을 빌고 있다네. 그리고 자네 또한 세상 속 나약하고 희생을 치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명복을 빌어주게.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