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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후회'가 아니라 가족의 이해에 대한 얘기 디어 평양
ldk209 2006-11-27 오후 1:33:59 1299   [11]

[디어 평양] '이념' '후회'가 아니라 가족의 이해에 대한 얘기

이 독특한 다큐멘터리 영화는 검은색 스크린에 하얀 글자로(일본어) 재일교포 사회에 대한 대강의 역사를 알려주면서 시작한다. 글자 사이로 빛 바랜 자료 사진들이 지나가고(남쪽에 사는 우리들은 보기 힘들었던 많은 사진들) 배경음악은 지극히 단순한 건반 소리의 반복에 불과하다. 마치 다른데 신경쓰지 말고 오직 이 화면의 글자에만 집중하라는 듯.

초반부의 교육만(!) 충실히 받았다면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장애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지구의 많은 국가들 중에서 가장 자본주의가 발달한 국가 중 하나인 일본에서 거의 평생을 살은-자본주의의 세례를 가장 많은 받은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북한 체제에 대한 맹목적 충성이라는 이해되지 않는 모습들. 우리는 그 동안 재일교포 사회는 민단(우리 편-좋은 편) 대 조총련(적-나쁜 편)이라는 대립으로만 교육 받아 왔고, 재일교포 사회에서의 조총련의 위치는 몰라도 그만이 아니라 알아서는 안 되는, 접촉해서도 안 되는, 알려고하면 다치는 그런 도그마였다.

양영희 감독은 평생을 조총련 간부 부모님 밑에서 살며, 민족 학교에서 북한을 조국으로 위대한 수령동지와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에 대한 충성 교육을 받으며 살았지만, 커가면서 가치관의 혼란을 일으킨다. 제주 출신이면서도 북한을 조국으로 삼아 맹목적인 충성만을 다짐하는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한 때는 부녀간에 아무런 대화 없이 살기도 했다.

그러다 10년 전부터 처음엔 아무런 목적 없이 캠코더로 촬영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아버지에 대한 이해에 한 걸음 다가선 어쩌면 철저한 개인의 기록이 바로 이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해방을 맞아 어려웠던 시절. 남한은 철저하게 재일교포들을 무시했다. 귀국한 재일교포들은 일본에 혼을 팔은 친일 분자라며 손가락질 받기 일쑤였고, 일본에 남아 있는 교포들은 민족 차별이라는 어려움을 감내해야 했다. 이 때 재일교포에게 한줄기 희망의 빛이 되어준 존재가 바로 김일성이었다. 김일성은 재일교포들의 교육에 많은 자금을 지원했고, 북한이 바로 당신들의 조국이 되어 줄 것이라며 그들을 보듬어 안았다. 김일성의 의도가 순수하지 못하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국가의 모든 정책은 순수하지 못한 전략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렇지 않은 예가 있을 수 있을까?

양영희 감독 부모님의 맹목적인 충성의 기저엔 이런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다. 가끔, 이런 역사적 배경을 인정하고 이해한다는 것과 그것이 옳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양영희 감독이 아버지에겐 가장 민감한 문제일 수 있는 국적 변경을 얘기했을 때, 아버지는 너무도 순순히 너만은 특별하다며, 한국으로의 국적 변경을 인정한다. 양영희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 순간 너무 놀라 카메라를 떨어트릴 뻔 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부분을 보고 일부 일본 언론에서 '후회'라는 단어를 동원해 기사화를 했고, 이에 양영희 감독이 항의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런 보도는 한국의 소위 보수 일간지를 통해서도 재생산되고 있다. '조총련 간부 아버지의 후회'라는 타이틀을 달고. 도대체 이 영화를 어떻게 보면, 그런 영화로 보일 수 있을까? 아마도 보수 일간지들은 아버지가 국적 변경에 반대했다면 '여전히 교조적인 아버지'라 했을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이념에 대한 영화도 아니고, 더군다나 한 인간의 후회에 대한 얘기도 아니다. 양영희 감독 말대로 이 모습도 아버지의 모습이고, 저 모습도 아버지의 모습인 거다.

그렇기 때문에 뇌경색으로 쓰러진 아버지의 손을 잡고 '아버지의 딸이어서 행복했다'는 양영희 감독과 아내에게 사랑한다, 고맙다는 말을 전하는 아버지의 힘든 고백에 자연스럽게 눈물이 흐르는 것 아니겠는가.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이다.

※ 양영희 감독 아버님의 쾌유를 빕니다. 아래는 '티켓 링크'에 실린 양영희 감독 인터뷰입니다.

(뒤늦게 첨가하는 사족 - 명동 CQN에서 처음 영화를 보았다. 이런 흥행성 거의 제로인 영화에 한 개라도 스크린을 내줄 수 있다는 건 매우 고맙긴 한데, 극장의 문제인지, 영화 자체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화면의 윗쪽이 잘려 나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진의 목이 뎅그러니 잘려 나오는 영상이라니... 그리고 음향의 문제인데, 양영희 감독이 캠코더로 촬영했으니 당연히 음향이 안 좋으리란 건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것때문에 좀 더 세심한 배려가 필요했을 것 같다. 강한 북한 억양의 말투가 쉽게 알아듣기 힘들었는데, 그 상태에서 소리를 좀 더 키운다면 당연히 지직거리는 소음 때문에 더 거슬렸을 것 같고. 일본 관객들은 자막을 통해 수월하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겠네라는 생각까지 들었다.(일본자막의 한자를 보면서 대강의 의미를 파악한 경우가 꽤 있었다.)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남북한 언어의 이질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자막이 나왔다 안나왔다 하는 것(출연진이 일본말로 하다 한국말로 하다보니) 보다는 차라리 관객 배려차원에서 계속 자막을 깔아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피와 뼈> <박치기!> <고 GO> 등 한국에 소개된 재일 한국인 소재 영화들은 모두 재일 한국인과 일본인의 관계에 초점을 둔 작품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디어 평양>은 조총련, 북한을 직접 다루고 있어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조총련을 다루자, 한 가족과 북한과의 관계를 그리자,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하자, 하는 생각이었죠. 우리 가족을 그리자면 오빠들이 있는 평양을 그려야 되고 아버지의 직업인 조총련에 대해서도 조금 만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된 겁니다. 혹 아버지가 조총련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았더라도, 오빠들이 평양이 아닌 일본에 살았더라도 가족에 관한 작품을 만들었을 테니 북한을 ‘이슈’로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 내 바로 앞에 있는 아버지를 그리기 위해선 평양, 북한을 빼놓을 순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가족’ 이야기가 하고 싶었나요.
서른 살 넘어 비디오를 찍기 시작했는데 20대 말까지는 우리 가족의 ‘백 그라운드’가 너무 부담스러웠습니다. 아주 사랑하는데 부담스럽더군요. 아버지는 북한에 왜 그토록 끌렸던 걸까, 왜 오빠들은 평양에 가버렸을까 하는 고민들을 했어요. 좀 더 평범한 재일 한국인이었다면 지금쯤 온 가족이 한국에 여행을 다니며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 정도면 참 쉬웠을 텐데 우리 가족은 왜 이렇게 북한에 극단으로 끌렸을까. 약간 비참한 기분이었고 아버지와 갈등도 심했어요. 하지만 서른이 되니 좀 달라지더군요. 나이가 들면서 좀 뻔뻔해진 건지 이상하게 부담스러웠던 것들이 오히려 재미있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을 편하게 하기 위해 시점을 바꾼 건지도 모르겠지만 오빠들이 평양에 있다, 아버지가 조총련 일을 한다, 제주도 출신인데 북쪽을 선택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가족을 얼마나 ‘유니크’하게 만들고 있을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가족을 비디오에 담았습니다. 평소 다큐멘터리에 관심이 많으셨던 건가요.
가족에 대한 이런 생각을 할 때쯤 다큐멘터리들을 많이 보게 됐습니다. 일본 야마가타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특히 많이 봤죠. 세계의 수많은 작가들이 자신에 대해, 또 자기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들을 많이 보게 됐어요. 그런 작품들에서 자극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아, 나도 이렇게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거죠. 우리 가족도 ‘소재’로는 못지않게 재미 있으니까요.(웃음)

하지만 의지를 갖는 것과 실제 작업에 돌입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인데요.
자신도 확신도 없었죠. 하지만 만들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으니까요. 일단 홈비디오로 찍은 거예요. 혹시 다큐멘터리로 못 만들면 그걸 메모로 책을 쓸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이야기 할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가족의 ‘기록’으로 남기면 되니까 일단 찍어놓자 하는 맘이었죠. 

‘일단 찍자’하는 마음이었는데 10년이나 찍으신 거군요.(웃음)
구성도, 주인공도, 스토리도 없이 무작정 찍었는데 이상하게 만들고 싶다는 소망은 없어지지 않더라고요. 그러다가 찍기 시작한 지 5년쯤 됐을 때 주인공을 정했죠. 바로 우리 아버지로 말이에요. 아버지가 주인공이 되니까 구성이 잡히고 그렇게 되니 이젠 완전 하나의 ‘숙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걸 해치우지 않으면 다음으로 못 갈 것 같았거든요. TV 방송 다큐멘터리가 아닌 다음에야 데드라인이 없으니까 스스로 결정한 거죠. 그렇게 10년이 걸렸습니다. 사실 10년이란 시간은 순수한 제작 기간이었다기보다 이 영화를 세상에 내보여도 될까 고민한 데 들인 시간이었다고 보는 게 더 맞을 듯 합니다.

스스로 정한 데드라인은 왜 10년이었습니까.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하겠다고 마음 먹고 나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사실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2년 전 쓰러지지 않았다면 지금도 찍고 있을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아버지가 쓰러지시자 빨리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의 ‘월드 프리미어’는 제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영화에서 비쳐지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들어도 아버지께 꼭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편집에 들어갔습니다. 물론 건강 때문에 아직 제 영화를 보지는 못하셨습니다.

10년, 촬영 분량이 상당했을 것 같습니다.
10년 세월을 생각하면 그리 길지 않은 120시간이었습니다. 10년 꼬박 촬영만 한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편집은 8개월이나 걸렸어요. 아버지 병세 때문에 편집을 하던 도쿄와 아버지가 계시는 오사카를 오가야 했거든요. 지금은 병원에 계신 모습도 익숙하지만 그땐 제 자신이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마음에 파도가 친다고나 할까요? 병원에 가면 위독한 모습이신데 내가 편집하고 있는 필름 안에는 너무 건강한 모습이니까요. 필름 안에 아버지는 노래를 부르고 어머님께 프러포즈한 얘기를 털어놓으며 웃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까요. 거기다 또 오빠들에게 편지가 왔죠. ‘우리 몫까지 아버지를 잘 모셔달라’는 내용이었는데 책임감을 너무 크게 느꼈어요. 그래서 여러모로 힘들었습니다. 거기다 편집을 함께 한 스탭들은 일본 사람이라 조총련이나 교포 문제에 관심이 없었어요. 내용을 알아야 편집을 하니까 재일 한국인의 역사나 조총련에 관한 강의를 해야 했죠. 그것만 3개월 걸렸네요.(웃음)

재일 한국인에 대해 모르는 건 일본사람이나 현재 한국인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재일 한국인 사회에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과 한국을 지지하는 민단이 있다는 정도의 기본 지식 정도가 전부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국적법을 얘기하자면 정말 복잡합니다. 우선 해방돼서 좋긴 했지만 말입니다. 일본 정부는 일본에 있는 조선인을 처리할 방법에 골머리를 썩었습니다. 거기다 한반도는 남으로, 북으로 갈라진다는 소문이 돌고 여러 가지로 복잡했어요. 그때 일본 정부가 생각해낸 게 ‘외국인 등록법’이었어요. 거기 따른 여권에는 국적란에는 모두 ‘조선’이었죠. 조선 반도 출신이란 얘기예요. 그런데 이후 일본이 한국과만 국교를 맺었어요. 그래서 민단도 그렇고 일본 정부도 그렇고 모두 한국 국적을 얻을 것을 권했죠. 그때 실제 많은 사람들이 한국 국적을 얻었습니다.

제주도 출신인 아버님은 북한 국적을 선택하셨죠.
당시 북한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은 두 가지 부류입니다. 제 아버지처럼 북한을 지지하니까 한국 국적을 얻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한 부류는 자기 나라는 남북 모두인데 왜 반만 취하라는 거냐, 하며 반발한 사람들이죠. 이후 한국 국적 취득자가 빠져나가니 당연히 남아 있던 나머지 ‘조선’ 국적인들은 모두 북한 국적자처럼 이해되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북한을 선택하신 건 당시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4.3 사태의 영향인가요.
물론 4.3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주도에 그런 사람이 많은지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친하게 지냈던 것 같아요.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전설적으로 전해 듣기도 했다고 하더군요. 제 외할아버지도 사상적인 책을 읽었다고 하시니 자연히 어머님도 그 영향을 받았고요. 하지만 재일 한국인 사회에서 북한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두 배운 사람들인 것은 아닙니다. 김일성 주체사상을 배워서 지지한다는, 이론적 합의보다는 감정적인 동조가 더 컸던 것 같아요.

감정적인 것이라면 어떤 것일까요.
당시 전세계가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당시 한국정부는 재일 교포를 완전히 무시했었습니다. 남한에 돌아간 친구들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 일본으로 갔다는 이유로 차별 받고 돌아오기도 했고요. 그런데 그 때 김일성이 연설을 해요. “우리는 일본에 있는 교포들도 국민으로 인정하고 환영한다”는 내용이었죠. 북한에 오면 집도 주고, 일도 준다고 선전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조선학교를 세우라고 막대한 돈을 일본에 보내왔습니다. 어느 쪽에 마음에 쏠리겠어요? 오랜 세월 일본인에게 차별 받던 이들에게 김일성은 구원의 손길과 다름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아버지 역시 김일성에게 충성을 다한다고 결심하신 것 같고요. 야쿠자가 그렇잖아요. 의리와 정의랄까. 아버지에게 그런 걸 자주 느끼는데 힘들 때 도와주신 분인데 이북을 이제 와서 어떻게 배반하냐, 하는 생각을 하세요.

적법도 그렇지만 ‘북조선 귀국 사업’도 낯섭니다. 개인적으로 최양일 감독의 <피와 뼈>를 통해 많은 조총련이 귀국 사업을 통해 북한으로 건너갔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물론 김일성 찬양가가 나온다는 이유로 일반 상영에선 검열로 잘려나갔지만요.
불쉣(bull-shit)! 내가 이렇게 욕했다고 꼭 알려주세요.(웃음) 59년 시작돼서 60년대에 많은 사람들이 북한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간 사람들이 “이곳은 파라다이스가 아니다”라는 편지를 보내오기 시작했죠.

오빠 셋이 71년에 평양으로 가 30년 동안 평양에서 살고 있습니다. 십대 소년들이었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선택이었나요.
스스로 간다고 했었죠. 물론 큰 오빠는 조총련 조직이 명령해서 보낸 것이지만. 부모님도 그렇고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이 5년 안에 통일이 될 거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일본에서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너무 심하니 북한에서 좋은 교육 받으라고 하신 거죠. 부모님들은 통일 이후에 제주도로 돌아갈 생각이셨고요. 물론 상상대로 되지 않았죠. 아이러니하게도 기대했던 것과 반대 방향으로만 현실이 된 것 같네요. 아버지는 일본에서 조총련으로 활동하며 북한을 서포트하는 것이 자신의 과업이라고 생각하신 듯 합니다. 그런데 후에 빼빼 마른 아이들의 사진을 보게 되었죠. 다 같이 빼빼 마른 것보다는 일본에서 많이 보내자, 이후 그렇게 결심을 다지신 것 같아요. 부모님의 영향을 받고 북한에 간 친척들도 꽤 있습니다. 그런 책임감에 더욱 열심히 생활 물자를 보내십니다.

할머님이 보낸 연필, 손난로를 보고 좋아하는 조카의 미소가 참 예뻤습니다. <디어 평양>에서는 평양에 있는 오빠 가족들이 상당 부분 등장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저기도 사람 사는 데와 같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리 사회 체제가 달라도 거기도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 사람이 밥 먹고 화장실 가고 목욕도 하고, 이런 건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사상이 같든 다르든 다 마찬가지예요. 먹는 내용과 목욕하는 횟수는 다를지언정 사람이 산다는 건 그런 거잖아요. 아프리카 사람이든 미국 사람이든 먹고 내고 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모두 “장군님 장군님”만 외치고 매일 기계같이 퍼레이드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그런 생각 자체가 이해가 잘 안 갑니다. 우리하고 똑같습니다. 시집 간 사람은 시어머니와의 관계를 고민하고 대학생들은 취직 문제, 연애 문제를 고민하고 또 아저씨들은 예쁜 여자만 찾아요.(웃음)

사실 제목이 ‘디어 평양’이라 정치적인 영화라 선입견을 가질 분들도 많을 겁니다. 그보다는 가족 이야기, 사람 이야기인데 말이죠.
오빠와 조카들이 자주 나를 자기 집에 초대해요. 그런데 내가 가면 꼭 목욕 한 번 시켜준다고 준비를 합니다. 아침부터 물을 열심히 절약해서 고모 목욕시킨다 이거죠. 제가 평양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런 소박하고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평양 시민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게 이 영화의 임무는 아니지만 더불어 평양에도 피아노 치는 아이가 있고, 퍼레이드하기 싫어서 눈치 보는 아이가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되면 좋겠습니다. 세상 누가 집단 체조, 퍼레이드를 좋아하겠어요.(웃음)

다니엘 고든이나 울리 가울케 등 많은 이들이 북한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지만 여전히 북한에서 영화 촬영이 얼마나 자유로운지 궁금합니다.
테잎을 몇 개 들고 들어가는지 기록하지만 비디오 카메라를 가져 가는 건 금지가 아닙니다. 물론 찍은 건 1초도 빼지 않고 다 검열해요. 저도 검열 받은 걸로 만들었지만 어떻게 편집하고 어떻게 만들지는 그들도 모르는 거죠.

영화에도 나오지만 아버지의 오랜 반대를 이기고 2년 전, 북한 국적에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습니다. 그러면 이후 북한 출입은 가능한가요.
아무 문제 없습니다. 요즘은 남한으로 국적을 바꾸는 사람들이 워낙 많기도 하고요. 북한에 가족이 있으면 한국 국적도 일본 국적 사람도 만경봉호를 통해 왔다 갔다 할 수 있습니다. 작년에도 한국 국적으로 다녀온걸요. 물론 지금은 북핵 문제로 만경봉호가 입출항을 접은 상태입니다.

차기작으로 준비하고 계신 <선아, 또 하나의 나>가 그래서 제작이 가능한 거군요. 북한에 있는 조카의 이야기를 그릴 예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국적 문제는 없는데 <디어 평양>이 상영된 후라 나를 그냥 넣어줄지 어떨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다시 평양에 갈 때 ‘내기’ 해봐야죠. 관대하게 해주길 바라고 있어요. 일단 못 가도 만들 생각이에요. 그런데 <디어 평양>으로 1년 내내 인터뷰하고 있으니 시간이 도통 나질 않네요.(웃음) 소품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1년 동안 정말 많은 나라를 다니셨죠. 일본에선 8월에 개봉했는데 반응들은 어땠나요.
가족 이야기로 반응이 좋았습니다. 조총련이 아주 싫었는데 저런 아저씨라면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반응이더군요.(웃음) 만경봉호도 미운 나라의 배라고 생각했는데 멈추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고 하더라고요. 독일은 분단의 역사가 있어서 그런지 좀 더 자기 일처럼 느끼는 것 같아요. 한 가족 안에서 이념적으로 달라서 고민하는 부분이 자신들의 경험과 같으니까요. 자기 경험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고 말씀을 많이 하시더군요.

<디어 평양>의 미워할 수 없는 아저씨, 아버님께선 건강이 어떠신가요.
거동이 힘들고 여러가지로 힘드시지만 잘 지내고 계십니다. 한국은 물론 일본, 독일, 미국 등등 <디어 평양>이 상영된 나라 관객들이 모두 걱정해주시니 오래 사시겠죠?(웃음) 아버님께 갈 때마다 “전세계 사람들이 모두 아빠 걱정이니 오래 사실 거예요”라고 말씀드립니다.

다음엔 어떤 작품으로 만나 뵐 수 있을까요. 또 다큐멘터리인가요?
다큐멘터리로 하고 싶은 것도 한두 가지 있고, 에세이도 쓰고 싶고, 소설이든 뭐든 픽션을 쓰고 싶기도 해요. 하지만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 거지. 지금은 잘 모르겠네요. 미리 얘기하고 못 지키면 창피하니까 지금은 비밀로 해둘께요. 사실 술집도 하나 차리고 싶어요.(웃음)


(총 0명 참여)
ldk209
흥행 문제 때문에 중간으로 평가했지만. 영화로만 보면 최고의 다큐 중 하나...   
2007-04-19 15:44
hyeen
감독이 꽤 미인이시네요   
2006-11-2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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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평양(2006, Dear Pyong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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