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덮여버린 설경을 바탕으로 검은 손으로 둘러싼 추도객들의 사이로 무표정한 그녀는 관위에 장미꽃을 내려놓고 그들을 등진채 홀로 걸어나간다. 눈도차 보이지 않는 그녀는 방금 막 아버지와 헤어지는 마지막 절차의 순간에 드넓은 설원속으로 발길을 돌린채 홀로 헤매듯 서 있는다. 어마어마한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그녀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많은 사람들속에서나 따로 떨어져있으나 혼자이기는 매한가지다.
일본의 드라마 '사랑따윈 필요없어, 여름(愛なんていらねえよ、夏)'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일단 제작시부터 화제를 뿌렸고 그 이유는 원작 드라마의 화제성과 더불어 문근영의 캐스팅이었다. 물론 그녀의 출연여부에 대한 관심이상의 화제성은 그녀가 연기하는 극중 인물의 이미지가 풋풋한 웃음으로 국민 여동생이란 타이틀과는 상반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원작 드라마와는 비교하지 말아달라는 제작진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이 영화는 원작 드라마와 비교선상에 설 수 밖에 없다. -물론 드라마를 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무관한 일이겠지만- 기본적인 시놉시스부터 캐릭터까지 원작의 틀을 그대로 가져다세운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원작드라마의 국적과 형식을 바꾼 배다른 동생에 가깝다. 다만 원작과 차별을 둔 것은 결말의 변주뿐이다.
마치 이국땅에서 찍은 영화인 양 영화속 배경은 낯설다. 녹차밭에 세워진 저택과 벚꽃이 날리는 유원지의 형광빛 거리, 그리고 넓게 펼쳐진 설원, 환락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아도니스 클럽 등-물론 오프닝과 엔딩의 설경은 일본의 삿뽀로에서 촬영된 것이다.-의 모습은 마치 세련된 화법의 서양화에 동양적 여백의 미를 살린 것만 같다. 세련되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영상은 이영화의 탁월한 미장센이자 내세울만한 자랑인 듯 하다. 뮤직비디오와 CF 연출 경력이 풍부한 이철하 감독의 영상은 인물의 배경에 아름다운 풍경을 덧씌운다.
사실 이 영화는 원작의 모티브를 그대로 대입했다. 다만 톤다운된 질감의 색채에서 느껴지듯 영화의 분위기는 마치 잿뱇과도 같은 무채색의 감성을 이어나간다. 감정적인 과잉적 폭발의 수위까지 내지르지도 않으면서 우울함을 한껏 빨아들인채 그 수면의 수위를 유지한다. 마치 일본멜로의 감성 그 자체처럼 최루성 멜로로써의 분기점에서 감정을 절제한다.
원작 드라마에서 남녀주인공은 상황적인 비장감으로부터 사랑의 감정을 끌어냈다면 영화는 개인적인 감성의 균열로부터 새어나오는 사랑의 감정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차이는 희극과 비극이라는 결과적 차별성으로 도착하는 근원지점이기도 하다. 타인의 사랑에 기생하는 직업적 능력을 이용하는 호스트 줄리앙(김주혁 역)이 민(문근영 역)의 반지에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 아무것도 필요없다며 다짐하던 민이 줄리앙-물론 민은 줄리앙이 아닌 친오빠 류진으로 알고 있지만-의 팔을 잡고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그 감정의 균열은 모색되기 시작되었다.
균열이후로 진전되는 상황은 갈피를 잃는다. 과연 남매로써의 허물은 어떻게 벗겨질 것인지 또한 남매를 넘어선 진실된 로맨스로의 폭발은 이어질 것인지. 사실 영화는 로맨스적 감정보다는 남매의 우애적 감정에 치중하는 것만 같다. -물론 거짓된 남매관계지만- 그리고 그 관계의 밀폐성안에서 느껴지는 연인으로써의 감정에 대한 애틋함을 환기시킨다. 하지만 그 기대감은 좀처럼 실현되지 않고 그런 일련의 안타까움에 대한 정서가 관객에게 기대되는 감정적 맥락으로 작용한다.
실제적으로는 무리가 없는 거짓이지만 그들이 믿고 있는 관계내에서 민이 느끼는 감정은 근친상간의 비약까지도 가능하다. 류진으로써가 아닌 줄리앙으로써 민에게 느끼는 감정 또한 다를바가 없다. 다만 그것이 어느 쪽의 감정인지에 대한 애매모호함은 관객을 혼란스럽게 한다. 사랑과 우애의 갈피를 잡지 못하며 우왕좌왕되는 감정선은 감정의 혼란과 동시에 감정적 도취에 대한 방해로도 여겨진다.
물론 영화 자체에서 감정적 제약을 의도적으로 표방한 것도 있다. 마치 일본 멜로 자체의 감성처럼 감정의 클라이막스에 다다르기 직전 꼬리를 내리는 식의 강약조절이 이 영화로부터 확인된다.
캐릭터들의 설정 역시 원작으로부터 뽑아져나온 산물이지만 배우들의 연기가 적절히 영화적인 캐릭터선을 살린다. 주연과 조연들까지 영화의 중요한 배역을 맡은 배우들의 연기는 나무랄 것이 없어 보인다. 특히 비열한 호스트 역을 맡은 김주혁의 연기나 이미지 변신을 꾀하듯 우울한 감성의 연기를 선보인 문근영을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는 적절했다. 다만 배우들에게 책정된 문어체의 대사는 종종 어색해보인다. 이는 분명 연기력이 아닌 영화자체의 문제다.
이 영화에서 비롯되는 어색함은 말그대로 받아들여진 것만으로 만들어진 산물에 대한 거북함이다. 마치 외국의 좋은 기자재를 통채로 끌어들여 만들어낸 인형극처럼 이 영화는 우리 배우들을 꼭두각시 인형처럼 활용하며 모든 것은 원작의 틀안에 가둔다. 모든 상황 그 자체로부터 기인하는 우연성의 기반 역시 순수한 동의를 표하지 않는 관객에게는 넘어서기 쉽지 않은 비현실적 판타지다. 녹차밭에 세워진 대저택처럼 우리에게 낯선 풍경의 이야기일 뿐이다.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법한 이야기선에 비해 시각은 과도한 멋을 냈다.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결말까지 영화는 애매모호한 감정선만큼이나 관객을 혼동시킨다. 나레이션으로 읽혀지는 줄리앙의 편지 끝말미와 전개되는 상황으로부터 쥐어지는 단서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황당한 상황으로 오해될법하고 그렇지 않다면 아름다운 판타지적 결말로써 쥐어질 법도 하다.
의미는 부여하기 나름이다. 다만 그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의 입맛은 모두 같지가 않다. 마치 구제와도 같은 신파에 세련된 영상으로 멋을 낸 영화는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은 것마냥 새나가는 어색함을 완전히 떨쳐버리기 힘들다. 이는 영화적 감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치장탓이고 그로 인해 영화 자체로부터 빚어지는 내부적 충돌의 이유다. 소박한 심성의 감정에 지나치게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한 모양새는 맞물리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거북스러운 파열음을 내는것만 같다. 차라리 사랑따윈 필요없다고 말하는 타이틀의 역설적 속내처럼 간절한 감정적 내면을 노골적으로 내보이는 편이 멋들어진 화면의 구성보다도 어울리는 옷이 아니었을까. 밋밋할 정도로 제약을 꾀한 감정의 과잉위에 껴입은 화려한 영상은 부담스러운 코디같다.
-written by kharisman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