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행복한 시절에 대한 추억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지녔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의 추억을 끌어내려하면 유년시절의 기억까지 더듬거리며 회귀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아무래도 그것은 어른이라는 성장적 진화론을 체험하며 그 성장이라는 것이 단순히 신체적 발육의 문제가 아닌 자립적 생존의 문제가 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유년의 추억들이 더이상 자라날 수 없음을 의미할지도 모르겠다. 어른이 되어가며 유년의 정서는 찬바람과 같은 사회의 냉정함앞에서 얼어붙는다. 비열하게 돈버는 방법일지라도 회사에서 짤리지 않는데 유용하다면 상관없다. 물질만능주의의 쾌감에 빠져 그 현실안에서 돈을 좇듯 살아가는 어른들의 세상은 아이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이면적 세계가 될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어느 멋진 순간에 대한 이야기다. 다만 그것이 추억으로써의 과거담인가 혹은 진행형의 현실담이 되는가가 이 영화가 택한 선택의 기로이자 감성적 화두이다.
뭐 일단 리들리 스콧이라는 네임밸류에 러셀 크로우라는 이름을 얹히니 '글래디에이터'의 데자뷰가 떠오른다. 이는 곧 이 영화가 형성하는 기대감의 가장 큰 원인이 될 것만 같다. 하지만 그 우직하던 검투사가 고함치던 콜로세움의 기억은 반듯하게 차려입은 정장 차림의 비즈니스맨 앞에서 자취를 감춘다.
체스판을 앞에 두고 고민하던 어린 아이는 잠시 자리를 비운 삼촌 몰래 삼촌의 룩(rook)-체스의 말 중의 하나로 장기의 차(車)와 비슷한 말-을 한칸 옆으로 밀어넣는다. 잠시 뒤 와인 한병을 들고온 삼촌은 아이에게 와인을 재배하는 법을 설명하며 와인의 맛은 재배하는 이의 노력과 성향 그 모든 것을 솔직하게 표현한다고 말하며 아이에게 무언가 할말을 요구한다. 그리고 아이는 당돌하게 '체크메이트'를 외친다.
그로부터 긴 세월 후 런던의 증권가의 한 사무실에 폰마이크를 귀에 꽂고 거래를 지휘하며 부하직원들을 떨거지라고 당당히 업신여기면서도 비열하게 돈을 긁어모으는 탁월한 능력으로 보스임을 인정받는 사내는 유년시절의 비정당한 체크메이트를 당당하게 외치던 꼬마, 맥스 스키너(러셀 크로우 역)다. 유년 시절의 교훈을 성년이 되어 탁월하게 부려먹는 증권가의 배짱있는 전략가는 갑작스런 헨리 삼촌(알버트 피니 역)의 부음소식을 전해듣게 된다.
유년 시절의 추억과 대면하는 순간 냉철한 판단력으로 이익여부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을 채우던 주식투자가의 마음은 은연중에 유레루를 느낀다. 소프트볼공을 던져넣었던 벽의 자욱들, 삼촌의 시가와 와인잔이 남아있는 테라스, 삼촌과의 추억이 박제처럼 남아있는 액자들, 그리고 유년 시절 가장 큰 추억이 서려있는 포도농장. 짓이겨져 썩어버린 것만 같았던 유년의 추억은 숙성된 와인처럼 고요히 침전되어 저도 모르게 기억속으로부터 추억의 향취를 내음하게 한다. 그리고 그 향의 대류현상을 촉매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꿈틀거림이다. 로맨스의 개입은 정서의 반전을 도모한다. 물론 그곳에 유년시절의 인연이 개입되지만 거부감없는 클리셰일 따름이다. 과거의 추억들로 인해 남자의 얼어붙은 호수같던 마음은 녹아내리기 시작하고 그 호수 한가운데 던져진 사랑앞에 출렁이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로맨스 코메디의 탈을 쓰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홍보용 문구가 기인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인생에 대한 고찰담에 가깝다. 벽에 걸린 고흐의 'starry night'은 모조품이고 진본은 금고안에 두었다는 상사에게 맥스는 묻는다. 그럼 그 진품은 언제 보느냐고. 우리는 행복을 위해 열심히 살아간다지만 모조품같은 행복을 추구할뿐 진품같은 행복은 누리지 못한다. 마치 금고안에 쳐박힌 고흐의 그림처럼 바쁜 삶에 좇기듯 살아가는 현대인은 행복을 위해 일한다지만 정작 바쁜 일상에 좇겨 여가조차 누리지 못한다. 그 탁월한 능력덕분에 휴가도 없는 삶을 보장받는 맥스처럼.
어쩄든 우리는 무엇인가를 선택해야하는 순간이 온다. 자신이 믿고 있는 가치 혹은 믿고 싶은 가치. 자신이 꿈처럼 숭상하는 미래의 행복 혹은 자신이 아무렇지 않게 누릴수 있는 일상의 행복. 물론 가진 자나 누릴법한 행복이 아니냐고 푸념한다면 그것 역시 간과할 수 없겠지만 가진자의 가능성이 꼭 실현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행복은 주변에 산재되어 있지 않은가. 소박하고 작은 것을 간과하고 허황되고 큰 것만을 찾는다면 그만큼 행복은 영원히 꿈처럼 아득할 뿐이다.
추억처럼 행복했던 시간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보다는 현실에서 은은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더욱 멋진 삶이라며 영화는 눈웃음을 띤다. 물론 가진 자들의 능력으로 인한 행복이 아니더냐고 반문한다면 뭐 그것 역시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가진자의 삶이 모두 행복하더냐고 묻는다면 그 역시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포도밭을 일구는 러셀(디디에 부르돈 역)처럼 지니지 않아도 누릴 수 있는 자의 행복.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그리고 그 맥스가 포도밭을 팔아치울 수 없었던 포도 알맹이처럼 추억으로 자라나 기억속에 매달린 유년시절의 멋진 순간에 대한 향수와 자신이 누리는 각박한 현실보다도 아름다운 사랑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 모든건 되돌아볼 수 있던 어느 멋진 순간에 대한 회고보다도 어느 멋진 순간을 살아갈 수 있는 그순간이 중요한 것이니까. 어쩌면 그것은 행복에 대한 작은 오해덕분에 미뤄지는 것 아닐까.
-written by kharisman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