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세기는 지구상에 인간이 출현한 이래 가장 빠른 진보를 이룬 세기였으면서 동시에 가장 잔인하게 동족을 학살한 세기였다. 동족학살의 역사에서 누가 뭐래도 빼놓을 수 없는 역사가 바로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일 것이다. 영화 "피아니스트"는 나치의 전쟁범죄를 그리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놓쳐서는 안될 희망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피아니스트 "스필만"은 바르샤바에 독일군이 진주한 후 유대인 게토에 갇히고 가족 모두가 가스실로 향할 때 운좋게도 독일군에 붙은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그러나 이때부터가 그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 된다.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는 바르샤바에서 숨어 지내며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체포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통받는다. 하지만 삶에 대한 애착은 그를 견디게 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나는 주인공이 며칠씩 굶으면서도 독일군의 총격과 포격을 피해 달아나면서도 끈질기게 삶의 끈을 놓치 않은 이유를 생각해 봤다. 그는 어느 피신처에서 피아노를 발견하고 절대 소리를 내서는 안되는 상황 속에서도 피아노 연주를 한다. 물론 피아노 건반 위 허공 속에서 말이다. 눈을 감고 허공 속의 피아노 연주를 하는 그의 표정은 매우 진지하다.
소련군이 바르샤바를 거의 다 점령해 갈 때쯤 그는 폐허가 된 주택가에서 독일군 장교와 마주친다. 독일군 장교는 그가 피아니스트라는 말에 그에게 피아노 연주를 시키고, 감상한다. 그리고 그의 도피생활을 돕는다. 독일군 장교는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이나 증오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스필만"을 예술가로 대우한 것이다.
독일군 장교가 마지막으로 떠나며 남긴 말이 매우 인상적이다. 어떻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스필만"의 말에 독일군 장교는 "고맙다는 말은 신에게 하시오, 신이 당신을 도운 것이오"라는 취지의 말을 한다. 신을 믿는 이들에게는 너무나 감동적인 말이 될 것 같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의 와중에서도 신을 믿는 독일군 장교는 같은 신의 자식인 유대인 피아니스트를 살린 것이다.
전쟁만큼 예술의 소재로 적당한 것은 없다. 전쟁은 생과 사를 넘나들며 인간의 가장 인간적인 면모와 비인간적인 면모를 모두 보여주는 생생한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그런 전쟁의 모습을, 학살의 와중에서 피어난 인간애를 잘 그려내고 있다. 독일군 장교 "호첸펠트"는 전쟁 후 러시아로 끌려가 수용소에서 죽었다. 그는 아마도 하늘나라에 가서 그가 믿는 신의 오른편에 앉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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