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영화 또는 중국영화가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80년대, 90년대 초반을 지나 이제는 쇠락한 장르가 되어버린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약발이 통하는 경우가 있다면 성룡 주연의 액션영화(이건 요즘도 사실 좀 약발이 떨어지긴 했다)와 무협 블럭버스터이다. 특히 <와호장룡> 때부터 시작된 무협 블럭버스터는 예전부터 꾸준히 인기가 있었고, 중국이 가장 잘 만드는 장르이기도 한 무협영화의 틀에 헐리웃 못지 않은 거대자본을 투입하면서 예전과는 비교도 안되는 환상적인 비주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제작년에 나온 장이모우 감독의 <연인>에 이르러서는 비주얼은 좋으나 말도 안되는 스토리때문에 "볼거리로만 가득하다"는 뭇매를 또 다시 맞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안 감독은 잠시 헐리웃에 가 있고, 장이모우 감독이 본연의 리얼리즘 영화로 돌아간 사이에 이들과 같은 듯 다른 분위기의 무협영화가 등장했다. 아니, 이 영화는 무협영화라고 하기보다는 스케일이 큰 서사극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펑 샤오강이라는, 중국에선 "중국의 스필버그"라고 불린다지만 우리에겐 한없이 낯선 감독이 만든 영화 <야연>은 이전에 봐왔던 중국식 무협 블럭버스터와 같은 궤와 다른 궤를 동시에 달리고 있다. 여전히 스타일리쉬하면서도 한결 더 정적이고 한결 더 관능적이며, 한결 더 하드코어하다.
당나라 무렵 수많은 국가들로의 분열이 계속되며 황위를 둘러싼 암투가 더욱 치열해지던 시점. 황태자 우 루안(다니엘 우)은 자신의 연인이었던 완아(장쯔이)가 "완"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아버지인 황제의 아내가 되자 상심한 나머지 숲 속에서 춤과 노래를 벗하며 지낸다. 그러나 이도 잠시, 황제의 동생 리(유게)가 황위를 노려 황제를 암살하고, 자신이 황위에 오르며 완을 아내로 삼는다.(그러나 본인은 끝까지 관계가 없다고 부인한다.) 그의 황제 즉위와 완의 황후 즉위를 앞둔 시점, 리가 끊임없이 우 루안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벌이는 가운데 완은 은둔해 있던 우 루안을 다시 황실로 불러들인다. 잠적해 있던 우 루안의 등장으로 다시금 살벌해진 황실. 지난 사랑을 되찾기 위해 권력을 이용하기 시작하는 완과 아버지의 죽음 앞에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우 루안, 권력욕 앞에 한없이 냉혹해진 리. 이들 사이에 던져진 얼음장같은 갈등은 과연 어떤 결말을 맞게 될 것인가?
이전에 나왔던 무협 블럭버스터들이 우리에게도 유명한 배우들이 잔뜩 출연했던 데 반해, 이 영화 <야연>에는 장쯔이 이외에는 우리가 알만한 배우들이 많지 않다.(그러나 다니엘 우, 유게, 주신 등 주요 배우들 대부분은 본국에서는 톱 배우라고 할 만한 이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풍기는 연기의 포스는 이전 무협 영화들 못지 않은 포스를 자랑한다. 장쯔이는 공교롭게도 <와호장룡> 이후 우리나라에 개봉된 무협 블럭버스터들에 빠짐없이 출연해온 배우인데, 그만큼 신비롭고도 힘있는무협영화의 분위기에 더없이 어울리는 배우가 아닐까 싶다. 여성스런 아름다움과 절도있는 힘, 극을 파국으로 몰고가는 위험한 분위기를 모두 가지고 있는 배우라고나 할까. 이번 영화에서도 그런 매력은 여전히 빛을 발하는데, 전작들에 비해서는 무술동작을 많이 절제한 것 같아보이지만, 그만큼 "황후"라는 역할에서 풍기는 고급스럽고 정적인 무게감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성적 매력이 풍기면서도, 남자에게 휘둘리지 않는 똑 부러지는 힘과 강단을 지닌 이미지. 무협영화에서 반드시 필요한 매력을 지닌 배우가 아닐까 싶다.
장이모우 감독의 영화 <인생>에서 인상적으로 본 적이 있는 배우 유게는 악역이라 할 수 있는 황제 역할을 통해 음흉한 듯하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지닌 독특한 포스를 자랑한다. 대놓고 눈부라리며 악행을 저지르는 탐욕스런 악역이 아니라, 절제된 분위기 속에서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고 평정이 담긴 표정에서 욕망을 터뜨리는, 여백의 미가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 덕분에 냉혹한 카리스마가 상대적으로 더 잘 강조된 것 같았다. 황태자 우 루안 역의 다니엘 우 역시 햄릿을 연상시키는 고독하고 우울한 황태자의 모습을 섬세한 표정 연기로 잘 보여주었다. 단순히 무술로 단련된 황태자라 해서 용감하고 절도 있는 모습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잔혹한 운명 앞에 대책없이 슬퍼하면서, 욕망을 절제하지 못한 채 풀어헤치기도 하는 연약한 모습도 부각시킨 것이 인상적이었다.
으레 우리가 중국 무협 블럭버스터에게 기대하는 환상적인 비주얼은 이 영화 역시나 그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뚜렷한 원색으로 가득한 의상들이 황실 내 바닥을 훑고 다니는 모습은 서양에선 절대 볼 수 없는 동양식의 유려한 미를 돋보이게 하고, 하얀 빛과 검은 어둠을 함께 담고 있는 황실 내의 풍경, 붉은 꽃들로 치장된 황금 욕조, 깊은 숲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우 루안의 은신처 등 공을 들여 만든 세트장의 모습도 그 규모에 입이 절로 벌어지게 한다. 무협 블럭버스터에서 흔히 등장하는 결투신의 화려함 또한 전혀 실망스럽지 않다. 초반부에 우 루안을 암살하려는 자객들과 우 루안의 호위무사들의 대결은 과감한 움직임과 화려한 손발의 움직임에 압도되고, 실로 오랜만에 만난 완과 우 루안이 펼치는 애증이 담긴 결투신 또한 그들의 지난 감정의 앙금을 반영이라도 하듯 격하면서도 고전무용처럼 부드러운 선의 미학이 잘 살아있다. 마치 각기춤을 보는 듯 어딘가 그로테스크해 보이는 우 루안의 독특한 퍼포먼스나 후반부 대연회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공연들 또한 보는 맛을 더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이전까지 봐왔던 무협 블럭버스터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첫째로, 표현의 수위가 상당히 높다. 난 이 영화가 <와호장룡>, <영웅>, <연인> 등과는 달리 15세 관람가를 받았길래 "러브신의 수위가 높은가" 싶더니 그게 아니더라. 이 영화 속 결투신은 보다 잔인하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하늘 춤추며 벌이는 결투신이 아니라 중량감 있는 칼날이 상대방의 몸을 거침없이 가른다. 첫 결투신에서부터 피가 사방팔방으로 튀고 심지어는 머리가 잘려나가기까지 한다. 뿐만 아니라 중반에 등장하는 형벌 장면도 슬로우모션까지 등장하며 스타일리쉬함을 추구하긴 하나 그 상상을 초월하는 타격감(?)때문에 꽤 잔혹하게 느껴진다. 그만큼, 영화는 생각보다 꽤 하드코어한 표현의 수위를 보여준다.
하지만 비단 표현의 수위만이 하드코어한 것이 아니다. 인물들 간 갈등의 수위도 하드코어하다. 단순히 어떤 장애물도 뛰어넘는 사랑의 힘, 황제와 그를 암살하려는 이의 대립처럼 한 마디로 정의내리기가 힘든 뭔가 복잡하면서도 극단적인 갈등을 내포하고 있다. 황태자 우 루안은 자신보다 네 살이나 어린 연인 완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에게 빼앗겼고, 연인은 순식간에 어머니의 위치인 황후가 되어버린다. 이도 모자라 삼촌은 황제인 아버지를 암살하고 또 다시 완을 차지한다. 애타게 사랑했던 연인을 어머니라고 불러야 하고, 같은 핏줄인 삼촌이 아버지를 죽인 철천지 원수가 되어버리는 다소 파격적인 상황은 당사자들로 하여금 이성을 주체하기 힘들 만큼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렇게 딜레마로 가득한 상황 속에서 겪는 황태자의 갈등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보여주는 햄릿의 고뇌처럼 어둡고 무겁다. 이런 황태자의 모습을 보며 권력을 등에 업고 복수의 칼날을 가는 완, 권력과 여인에 대한 욕망으로 한없이 냉혹해진 황제 리의 모습도 영화의 무게감과 비극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사실 2000년대 들어 나온 무협 블럭버스터들이 대부분 비극적인 결말을 취하긴 했지만, 이 영화는 하드코어한 볼거리, 하드코어한 갈등에서부터 결말에서 펼쳐질 피할 수 없는 비극성을 숨김없이 드러내보인다는 점에서 보다 적나라한 서사극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야연(밤의 연회)"이라는, 화려하지만 은밀하게 느껴지는 제목의 어감에서도 알 수 있듯, 영화는 화려한 황실의 역사 속에서 추악하게 꿈틀거리는 은밀한 욕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거대한 국가를 이끄는 왕 조차도 한 여인에게 사로잡혀 물불을 못가리고, 황후와 황태자 등 화려한 권위와 명성이 으레 떠오르는 이런 인물들도 역사에 비하면 하잘 것 없이 느껴지는 개인적 욕망의 포로가 되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영화 속에서 황제가 여러번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얻으니 나라가 무슨 소용인가 싶소"하고 얘기하지만, 적어도 "경국지색" 수준으로 나라까지 몰락하지는 않아도, 이들의 원초적인 욕망이 자신들을 철저히 갉아먹어간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이렇게 이들의 눈을 멀게 만들어버리는 애증이 교차하는 욕망은 수많은 피와 참혹한 계략을 통해서 충족시키려한다는 것이 이들의 더욱 비극적인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권력욕 앞에서 수많은 피가 뿌려지고, 아무런 힘도 없는 노인마저도 참혹한 매를 맞으며 피를 토하고 죽어간다. 이렇게 피와 죽음으로 하나씩 완성시키려 하는 이들의 욕망이 해피 엔딩을 맞을 것이라고 예측하기는 힘들 것이다. 영화가 각종 결투신과 폭력 장면에서 단지 수려한 스타일만 강조한 게 아니라 흩뿌려지는 피들을 유난히 강조한 것도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단지 무용같은 무술과 아름다운 연회라는 틀에 가둬두기에, 권력과 사랑에 대한 끝간데 모를 이들의 욕망은 너무나 극단적이고 적나라했을 것이다.
사실 이 영화도 내용의 치밀함이나 스피디한 전개를 기대하기는 힘들고, 무협 블럭버스터치고는 대단히 정적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정적이고 부드러운 전개 속에서 곳곳에서 보이는 욕망의 참상은 그래서 더 섬뜩하게 느껴져,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한없이 부대끼는 인간의 욕망의 비극은 확실하게 조명되지 않았나 싶다. 하얀 눈밭에 흩어진 핏방울들이 더 잔혹하고, 추악한 본성을 감춰둔 무표정한 백색 가면이 더 섬뜩하게 느껴지듯이 말이다.
나라를 휘어잡는 권력과 마음을 사로잡는 사랑에 눈이 멀어 영화 속 인물들은 여러 차례 계략과 음모를 세우지만, 이런 간절하지만 그만큼 추악한 음모들은 결국 피를 보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파국적인 결말은 단지 그들에게서만 끝나는 게 아니고, 그들이 지닌 권력과 사랑을 탐내는 또 다른 이들에 의해 다시 이어지고, 그렇게 욕망의 역사는 끊임없이 쓰여진다. 이렇게 <야연>은 온갖 화려한 것들로 가득찬 중국 황실의 역사 속에서, 정작 자신들의 욕망은 그 어떤 물질과 음모로도 채울 수 없는 운명을 지닌 황제, 황후, 그리고 황태자의 비극을 따라가는 영화다. 밤에 일어나는 연회에는 화려하고 웅장하지만, 드러낼 수 없는 은밀한 비밀이 도사리고 있다. 그들의 욕망도 그 화려한 연회에서 드러내기엔 너무나 거칠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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