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여름에 개봉했을 당시 설레이는 마음으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본 기억이 난다. 남자들이면 누구나 꿈꿔봤을 한 영웅 이야기에 스케일 크고 흥분되는 전쟁장면까지, 여하튼 이 영화는 남자들의 가슴을 분명 들뜨게 할 영화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난 후 기대감이 커서였을까, 왠지 모르게 실망감이 엄습했다. 아킬레스로 분한 브래드 피트의 지나친 영웅행각에 질려버린 것이다. 아무리 당대 최고의 용사라지만 안하무인격인 그의 모습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1년 반이 지난 이번 수업에서 나는 다시 트로이를 보게 되었다. 이번엔 그리스와 트로이 간 전쟁의 배경과 과정, 그 원인에 대해 주안점을 두고 감상했다.
이 영화는 독일 출신의 볼프강 페터슨이 감독을 맡고, 브래드 피트가 아킬레스를, 에릭 바나가 헥토르 왕자, 올랜도 볼룸이 파리스 왕자, 다이엔 크루거가 헬레네 왕비 역을 맡았다. 2억불이 넘게 투입된 대형 서사극으로서 제작 초기부터 개봉에 이르기까지 많은 관심을 끌었던 작품이다.
영화의 시작은 파리스 왕자가 스파르타의 헬레네 왕비와 사랑에 빠져 트로이로 도주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트로이 전쟁 시작의 사연은 좀 더 복잡하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여신 테티스와 영웅 펠레우스와의 결혼식에 불화의 여신 에리스만이 초대받지 못한다. 이에 앙심을 품은 에리스는 혼인 잔치 도중 하객들 사이에 황금사과 한 개를 던진다. 거기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드리는 선물’이란 문구가 적혀있다. 이에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나 세 여신은 사과를 놓고, 다투게 되고 결말이 나지 않자 제우스에게 판결을 부탁한다. 그러나 여자들 싸움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던 제우스는 파리스에게 판결을 떠넘긴다. 파리스는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주겠다고 약속한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주고, 아프로디테는 약속을 이행한다. 그 여인이 바로 스파르타의 왕비였던 헬레네이다. 영화는 이에 대한 사연을 생략한 채 시작을 한다.
이 영화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겠다고 생각을 했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아킬레스의 영웅적 행동이었다. 그래서 나는 영화 속에 그려진 그의 모습을 각종 자료를 비교해보고 확인해보기로 했다. 우선 그의 신기에 가까운 전투능력이다. 영화 속에서 어느 정도의 과장은 이었겠지만 신화 속 그의 모습은 영화 속에 그려진 모습과 거의 일치할 정도로 대단한 무를 지닌 것으로 묘사된다. 특히나 그의 신출귀몰한 활약 때문에 트로이의 운명이 위태위태하다는 대목도 눈에 띄었다. 또한 아킬레스와 아가멤논의 불화도 상당한 수준이어서, 트로이 전쟁 당시 아킬레스가 고의로 전투에 불참했다는 사실이 있음도 확인했다.
특히나 이 부분에선 왕의 권위에 전면으로 도전하는 아킬레스의 모습을 보고 서양의 왕권이 결코 동양의 절대적 왕권에 미치지 못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 원인은 초기 서양 문명의 모태가 된 그리스 때부터 각종 토론 문화가 활성화돼있고, 평등사상이 폭넓게 확산돼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왕도 한 인간에 불과하며,
그도 불완전한 인간인지라 실수를 할 수 있으므로 이를 줄이기 위해선 신하들과 토론을 통한 합의의 정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런 정치 문화 덕분에 서양이 동양보다 민주정치의 발전을 더 빠르게 이루어냈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 의심스러웠던 것은 아킬레스와 헥토르의 싸움이었다. 왕자의 신분인 헥토르가 아킬레스와 일대일로 승부를 겨룬다는 것은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었다. 우선 아킬레스의 사촌형제로 묘사된 파트로클루스는 사촌형제가 아닌 절친한 친구였다고 한다. 그리고 헥토르는 아킬레스와 처음부터 일대일 대결을 겨룬 것이 아니라 미처 퇴각하지 못하고 성 밖에 남겨진 상태에서 대결을 겨루었다고 한다. 이후 죽은 헥토르를 아킬레스가 전차에 묶어 끌고 간 장면이나, 아들의 시신을 수습키 위해 아킬레스를 직접 찾아간 프리아모스 왕의 모습은 모두 사실이었다.
이러한 영화와 신화 속 사실 관계를 확인해가면서 느낀 것은 등장인물들이 놀랍도록 인간적이고 진솔하다는 것이다.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원수인 아킬레스에게 애원하는 프리아모스 왕의 모습,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며 복수를 다짐하는 아킬레스의 모습, 단순한 사랑의 감정으로 트로이로 도주하는 헬레나의 모습 등은 신분의 귀천을 떠나 그들도 똑같은 감정을 지닌 한 인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인간적인 감정만으로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없듯이 트로이 전쟁의 발발이 헬레나라는 한 여자로 인해 일어났다는 것은 결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많은 인명과 경제적, 물질적, 정신적 피해가 막대한 전쟁이 무려 10년간 (영화 속에선 특성상 트로이 전쟁의 기간을 한 달로 한정시켰지만, 실제 전쟁기간은 10년이었다.) 지속된 원인이 한 여자의 사랑 때문이었다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 아닐까? 어느 역사가의 분석에 의하면 트로이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하는 험난한 항로를 피해 육로수송을 가능케 해주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그리스인이 이곳을 차지하려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주장을 했다. 또한 그리스인은 트로이에 정착하겠다는 생각이 없었고, 단지 대규모 약탈극을 벌일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트로이 발굴 작업을 통해 밝혀졌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도 그리스 연합군은 트로이 성 함락 후 약탈과 방화로 도시 전체를 약탈하는 모습만 보여준다. 그리스 북부 내륙지방의 히타이트 제국과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와의 긴밀한 교역으로 트로이가 눈부신 번영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확인된다. 전쟁이 미치는 피해가 막대하기에 이를 일으킨다는 것은 결코 감정만 앞세워서는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왕권이 미약한 서양세계에서 왕의 독단으로 밀어붙인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트로이 전쟁 신화의 발발 부분은 아마도 인간의 감정을 중시한 그리스 인들이 신화를 통해 낭만적이고 아름답게 미화시킨 것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전쟁은 인간에게 잔인하고 고통스럽고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전쟁마저 아름답게 미화하고자 했던 그리스인의 모습은 나를 너무도 놀랍게 만든다. 전쟁마저
한 폭의 그림과 예술, 영웅담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던 그들은 진정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아는 민족이 아닐까?
이 영화를 보고 좋았던 점은 귀동냥으로 주워 들었던 트로이 전쟁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그리스인들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 서양인들의 민주정과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의 기원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물론 가장 좋았던 것은 멋진 영웅들의 모습이었다. 옛 신화 속 영웅들은 눈물, 환호, 절망, 슬픔, 기쁨 등을 가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 그러나 항상 우리는 그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다. 영웅도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러기에 우리는 바쁘고 삭막한 현실 속에서 어린 시절에 품은 영웅에 대한 꿈을 접고 힘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린 시절의 꿈을 다시 떠올리며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인간적 영웅이 다시 나타나길 기원하며 글을 마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