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아닌 동물을 가족으로 맞이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될 수 있다는 건 그다지 경험은 많지 않지만 절실히 알고 있다. 난 개나 고양이를 키워본 적은 애석하게도 아직 한번도 없지만, 어렸을 때 뭣도 모르고 학교 앞에서 올챙이를 한마리 사가지고는 며칠 키운 적 있다. 나름 애완동물이라고 애정을 쏟았는데 애가 생각보다 급성장을 하자 당최 마땅히 둘 곳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집앞에 버려야 했던 안타까운 기억이 있다. 정말 일주일도 채 안되는 시간동안 키웠었는데, 보낼 때, 아니 버릴 때(지금 생각해보면 버리는 것 말고도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텐데) 심정이 어찌나 착잡하던지. 특히나 몇 년동안 정말 가족의 일원으로 함께 살아왔다면 보내는 마음은 착잡하다 못해 찢어질 것이다.
이렇게 사람과 사람 간의 교감 뿐 아니라 사람과 동물 간의 교감 역시 결코 무시못할 수준의 깊은 감정적 파문을 일으킨다. 아니, 어떻게 보면 더 찡하고 절실하게 다가오는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 <각설탕>은 이렇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기도 어려운 세상에서, 서로에 대한 절대적 믿음으로 굳은 사랑을 이어나가는 사람과 동물의 아름다운 관계에 박수를 보내는 영화다. 말이 주인공으로 나온다고 해서 경마 영화가 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영화 속에 경마 장면들이 많이 등장하긴 하지만, 결국 이 영화는 종족의 경계도 뛰어넘는 순수한 교감에 대한 이야기다.
경마 기수였던 어머니를 어려서 낙마사고로 여읜 시은이(임수정)은 어머니의 벗이었던 말 장군이를 어머니처럼 의지하며 살아간다. 어머니의 낙마사고로 큰 마음의 상처를 입은 아버지(박은수)는 시은이 말과 가까이 하는 것을 극구 꺼려 하지만 시은이의 말을 향한 사랑을 끝이 없다. 그러던 중 장군이는 새끼를 낳지만 노산의 후유증으로 그만 목숨을 잃고, 그 대신 세상에는 장군이의 아들인 천둥이가 남게 된다. 시은이는 장군이 대신 천둥이를 정성껏 보살피겠다는 마음에 온 마음을 쏟아 천둥이를 보살피지만, 기어이 시은이가 기수후보생으로 등록된 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그만 천둥이를 팔아버린다. 이렇게 너무도 허망하게 시은이와 천둥이가 이별을 한 뒤 2년 후, 시은이는 후보생으로서 고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천둥이를 다시 만나게 되고, 둘의 따뜻한 우정은 다시금 살아나게 되는데.
먼저 연기 부분을 살펴보면, 단연 임수정의 공이 크다. 이 영화에서 처음 원톱 주연을 맡은 임수정은, 이젠 원톱 주연을 맡아도 전혀 우려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충분히 들만큼 당당하고 꽉찬 연기를 보여주었다. 더구나 상대역이 사람이 아니고 동물이라는 점에서 감정이입이 쉽지 않았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녀가 말을 상대로 벌이는 온갖 감정 연기는 사람을 상대로 할 때에 뒤지지 않는, 아니 어떨 때는 훨씬 능가하는 짙은 농도의 연기였다. 머리도 짧고 다소 선머슴같은 차림을 하고 있지만, 부당한 현실 앞에서 때론 눈물로 좌절하고 때론 당당히 소리칠 줄도 알고, 따뜻한 우정 앞에서는 한없이 부드러워지는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연기를 이 영화 한편을 통해 모두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더구나 경마 장면에서는 남성 기수들 못지 않음 파워풀한 면모 또한 훌륭히 보여주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시은이라는 인물이 꽤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편이라 이 역할을 맡은 배우도 연기력이 받쳐줘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임수정은 그야말로 적역인 연기를 펼친 것 같았다.
또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배우가 있다면 시은이 아버지 역의 박은수 씨와 유오성 씨를 들 수 있겠다. 우리에겐 일용이라는 캐릭터로 너무나 잘 알려진 박은수 씨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이 영화 속 나름대로의 개성 있고 묵직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홀로 외동딸을 키워오면서 애정을 듬뿍 담아주지만, 어머니처럼 일찍 사고를 맞게 될까봐 조심스럽고 그래서 한편으로는 엄해질 수 밖에 없는 아버지의 착잡한 마음이 무뚝뚝하면서도 따뜻한 특유의 이미지와 잘 어우러지지 않았나 싶다. 유오성 씨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비중은 크지 않지만, 엄해 보이지만 실은 속정 깊은 그만의 이미지를 잘 살려 영화 속 캐릭터들을 보는 재미를 더욱 풍부하게 해주었다. 말은 많지 않지만 홀로 외롭게 싸우는 시은을 말없이 위하는 모습이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배우가 있으니 바로 천둥이 역을 맡은 말 천둥이이다.(촬영하다가 아예 이름이 천둥이로 굳어졌다고 한다) 물론 한마리가 아니라 여러 말들이 영화 속에서 천둥이 역을 맡았지만 임수정을 상대로 한 주된 감정 연기는 모두 이 천둥이가 도맡아 했는데, 정말 우리나라에서도 이렇게 동물을 인간 배우와 대등한 연기를 펼칠 수 있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유난히 사람의 눈동자와 닮아 보이는 항상 촉촉히 젖어 있는 눈동자만 봐도 뭔가 감정을 담고 있을 듯이 느껴지는데, 이 천둥이가 시은이를 하염없이 쫓아가고, 힘차게 달리고, 아파 쓰러지는 장면장면들마다 전혀 조작되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운 느낌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용하게 이런 연기들을 모두 굳세게 해낸 천둥이에게도, 이 천둥이를 훈련시키느라 온갖 고생을 다했을 스탭들에게도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비주얼 면에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은 단연 경마 경기 장면들이다. 드넓은 트랙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여러번의 경마 경기는 때론 기수들의 시점에서 트랙을 질주하고, 때론 기수들 앞에서 역동적인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따라오는 등 예전 한국영화들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숨막히는 촬영기술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화면의 때깔 또한 상당한 수준에 올라서 정말 헐리웃 영화 못지 않은 깔끔하고 세련되면서도 속도감 있는 액션 장면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사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이전에 개봉했던 다코타 패닝 주연의 <드리머>와 비교를 하곤 하는데, 사실 말과 소녀의 우정, 소녀는 어머니가 없다는 점, 둘이 힘을 모아 큰 경기에 출전한다는 점 등 비슷한 부분이 좀 있긴 하다. 그러나 영화를 주의깊게 보면, 두 영화의 포커스는 전혀 다른 곳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드리머>가 좌절과 실패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으로 꿈을 향해 한껏 전진하자는 "꿈"에 관한 보편적 메시지를 갖고 있다면, <각설탕>은 좀 더 감정적으로 내밀하게 들어간다. 물론 "꿈과 희망"같은 것도 부차적인 요소로 들어가긴 하지만, 이 영화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에 대한 믿음의 끈을 놓지 않는 순수한 교감이다.
이를 위해 영화는 이런 순수한 교감과 대치되는 차가운 현실을 보여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낙마사고로 일찍 여의고 만만치 않은 삶을 살아온 시은이는 환경 덕분에 말에 대한 애정이 유난히 커지게 되고, 그래서 장래희망으로도 기수를 꿈꾸지만 아버지는 다시 어머니와 같은 불행한 사고를 겪지 않게 하기 위해 반대한다. 이를 무릅쓰고 경마후보생으로 들어간 시은이 앞에는 역시나 고난들이 도사리고 있다. 대다수가 남자 기수인데 비해 시은이는 여자라는 이유로 더 냉혹한 시선과 구박을 받기 일쑤다. 실력은 운운하지 않고 넌 그저 경마홍보를 위한 얼굴마담일 뿐이라며 제대로 된 평가를 하기를 거부하는 김 조교사(이 분도 참 연기 잘 하셨다. 정말 보는 내내 어찌나 정나미가 뚝뚝 떨어지는지;;). 때문에 시은이는 여자라는 이유 하나때문에 일단은 다른 남자 기수들과 실력 면에서 신뢰를 갖지 못하는 기수가 되고 만다. 뿐만 아니다. 승부의 세계가 아무리 냉정하다지만, 각 조교사들이 맡은 각 조들간의 경쟁심도 극심하고, 이들을 후원하고 있는 마주들의 시선도 만만치 않은 터라 이들은 정말로 인정사정 없는 경쟁을 펼쳐야 한다. 승부야 정정당당하면 오죽 좋겠냐만, 안타깝게도 여기에 돈을 걸어버린 사람들은 더 이상 정정당당하지 못하고 한없이 비열하고 냉혹해진다. 사람이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하지 못하고, 사람다운 교감은 하지 못한 채 오로지 승부와 스피드, 돈을 중요시하는 세계 속에서 냉정한 경쟁만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시은이와 천둥이의 진실한 사랑은 더욱 더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가 사실 극적 구조는 지극히 뻔한 구조고, 앞으로 어떻게 내용이 전개될 지도 충분히 예상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호소력을 발휘하는 것은, 이들의 이런 따뜻한 이야기가 결코 보들보들한 동화 속에서 편안하게 자리잡고 있는 게 아니라 냉혹한 가시방석과 같은 현실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마에서 말이 사람에게 "탈것"으로 인식된다 한들 결국은 생명체와 생명체가 힘을 합쳐 경기를 펼쳐나가는 것인데, 말은 그저 잘 달려주기만 하는 자동차마냥 인식되고 기수들은 냉혹한 승부 속에서 인간적인 많은 것들을 희생하기를 강요당하는 현실이 자리잡고 있다. 사람이 동물을 물건 취급하는 것은 물론이요, 돈이 오가는 승부 앞에서 사람과 사람 또한 정직한 관계에 놓여 있지 못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를 향한 굳건하고 올곧은 믿음만으로 의지하는 시은이와 천둥이의 관계는 그만큼 가슴 뭉클하게 다가오고, 또 그만큼 안타깝게 다가오지 않나 싶다.
우리의 삶과 가까이 하는 많은 동물들은 한번 주인을 맞이하게 되면 좀처럼 그 주인을 쉽게 잊어버리지 않는다. 언제나 그 주인(혹은 친구)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언젠가는 그들이 버림받게 되더라도, 우리는 쉽게 그들을 잊을지 몰라도 그들은 잊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이런 동물들의 인간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참 비열하게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동물들의 순수한 애정을 이용해 그들을 팔아넘기는 등 온갖 이익을 얻으려 들거나, 죄없는 동물들을 아무 생각없이 무자비하게 학대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간간이 볼 때면, 인간이 너무나 인간답지 못하게 변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동물들은 인간처럼, 아니 인간 이상으로 끈질긴 애정과 관심을 보여주는데 정작 인간은 때론 동물보다도 못하게 감정이 싸늘해져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변함없는 애정으로 관계를 돈독히 다져가는 시은이와 천둥이의 사랑은 더 가슴에 와닿는 듯 싶다. 뭐 기술이라든지 전략같은 것이 나름 존재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보다도, 돈과 주종관계에 놓여 수직적인 형태를 만드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보다도, 오로지 마음만으로 서로가 통할 수 있기에 이런 관계는 더 어려울 것이고, 그래서 더 아름다울 수 있지 않을까. 정작 진실한 사랑이라는 것은 이렇게 말이 필요없이, 그저 마음만 있다면 되는 것 아니던가. 위험한 순간에도 온전히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꿋꿋이 나아갈 수 있는 마음 말이다.
예전부터 꾸준히 생각해 온 것이지만,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결코 사람이 이들을 무시해선 안될 일이다. 어쩌면 너무나 쉽게 감정을 바꿔버리는 많은 사람들보다도 동물들은 더 초지일관으로 한번 갖게 된 마음을 잃지 않고 꾸준히 지켜나가는, 한번 맺은 사랑도 절대 잊지 않는 믿음직한 존재인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언제 많은 이들과 사랑과 우정을 나누면서 요란한 말이나 화려한 선물같은 게 정말 필요했던가. 진짜 사랑과 우정은 말이 필요없는 법이다. 이렇게 영화 <각설탕>은 종족을 뛰어넘는 진정한 관계, 그 말이 필요없는 진솔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 삶에도 영화 속 시은과 천둥처럼 마지막 순간까지도 결코 손을 놓지 않을 누군가가 있다면, 정말 복받은 삶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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