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나 가수, 감독에 이르기까지 문화계에서는 부모의 직업을 이어받아 자식 세대까지 그 일에 종사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목격한다. 그러나 배우나 가수 면에서는 이런 경우가 허다하게 나오고 있지만, 감독 부분에서는 그리 쉽게 발견하기가 힘들다. 생각나는 경우를 찾아보면 미국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과 그의 딸 소피아 코폴라 감독, 존 카사베츠 감독과 그의 아들 닉 카사베츠 감독, 일본의 후카사쿠 킨지 감독과 그의 아들 후카사쿠 겐타 감독 정도. 감독일은 아무래도 한 부분에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연기, 각종 효과, 구성 등 영화의 모든 면을 말그대로 총괄해서 책임져야 하는 직책이기에 단순히 부모의 일을 물려받는다는다고 해서 쉽게 감독이 되는 게 아닌, 정말 실력이 되어야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이번에 지브리 스튜디오의 신작 <게드전기-어스시의 전설>(이상 <게드전기)이 나올 때에도 이 영화의 감독이 미야자키 하야오도 아니고 그의 아들인 미야자키 고로라는 사실에 살짝 우려가 되기도 했다. 더구나 이 아들까지 아버지를 따라 영화 제작일에 종사해 온 것도 아니고, 지브리 박물관장이 이전 직책이었다고 하니 그 걱정은 배가 되었다. 그야말로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아들이라는 이유로 감독직을 맡게 된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더더군다나 불과 몇년 전에 후카사쿠 킨지 감독의 아들인 후카사쿠 겐타 감독이 아버지가 만든 영화의 속편인 <배틀로얄 2 - 레퀴엠>을 신명나게 말아먹은 기억이 떠올라 더욱 그랬다.(일본흥행은 성공했을지 몰라도 작품성은... 왜 1편의 여운을 거침없이 깨냐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나 재능은 유전되는 게 아니었다.
예전엔 용과 인간이 하나되어 함께 살아갔지만,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용과 인간의 영역이 갈라지게 된 "어스시"라는 세계. 이곳에서 어느날 용이 인간세계에 나타나면서 두 영역의 균형은 깨지고 만다. 각 도시에서는 작물과 동물들이 병에 걸려 죽고, 농민들이 보금자리를 떠나는 등 이상한 현상들이 연이어 발생하고 도시를 횡단중인 대마법사 현자 하이타카(스기와라 분타)도 이런 어스시의 모습이 의문을 갖게 된다. 그는 여정 중에 한 소년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바로 어스시의 왕인 아버지를 찌르고 왕궁을 탈출한 왕자 아렌(오카다 준이치). 우연한 인연으로 둘은 여행을 함께 하게 되고, 그러던 도중 이들은 호트타운이라는 마을에 이르게 되고 그곳에서 양치기 소녀 테루(테지마 아오이)를 만난다. 한편, 이렇게 세계의 균형을 깨뜨리며 위기에 몰아넣은 장본인인 마법사 거미는 이전에 하이타카와의 대결에서 패한 뒤 그를 향한 복수심과 영생에 대한 욕망으로 불타는 인물. 그는 여전히 불안 초조 증상을 보이는 아렌을 미끼로 하이타카를 또다시 불러들이는데.
이젠 헐리웃에서도 나오는 애니메이션마다 3D 일색인지라 2D 애니메이션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음에도, 지브리 스튜디오는 예나 지금이나 끄떡도 하지 않고 2D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오고 있고, 대신에 2D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최고의 완성도를 보여왔다. 이번 <게드전기> 역시 시각적 완성도 면에서는 2D 애니메이션이 보여줄 수 있는 상당한 완성도를 자랑한다. 하이타카(게드)와 아렌이 호트타운에 당도했을 때 펼쳐지는 호트타운의 전경은 단순히 "마을"로 치부하기 힘들 정도로 눈부신 장관을 뽐내고, 초반에 용이 인간세계에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나 간간히 펼쳐지는 용이나 새의 비행장면, 후반부의 결투신 등에서도 꽤 매끄러운 화면 연결로 시각적 즐거움을 준다. 중간중간 스케일 작은 장면에서는 다소 투박하기도 하고 그림선의 결도 다소 굵은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나, 역시 2D 애니메이션의 명가로서 실망스럽지는 않은 비주얼을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홍보용 전단지에 잘 나와 있듯, 이 영화에는 이제까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들에서 흔히 봐왔던 요소들이 꽤 낯익게 등장한다. 용과 인간의 공존, 진짜 이름과 정체성의 갈등 등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도 등장하는 요소이고, 용과 인간의 세계의 균형 운운하듯 두 세계의 공존을 의미하는 부분은 <모노노케 히메>에서도 목격할 수 있다. 이렇게 이전부터 미야자키 하야오가 꼭 영상화하고 싶었던 작품답게 영화 속에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동안 차용했던 여러 설정들을 발견해 맞춰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하지만 그동안 나오는 작품마다 나쁜 소리는 거의 듣지 않았던 지브리 애니메이션 답지 않게 이 영화는 좀 안좋은 소리를 할 만한 구석들이 있다. 우선, 에피소드가 풍부하진 않은데 이야기 전개는 꽤 복잡하다. 사실 두 시간 좀 안되는, 애니메이션 치고는 긴 러닝타임동안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그다지 길지 않다. 균형이 깨진 세계와 이를 파헤치는 이들, 그리고 악당과의 대결 정도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 속에 아기자기한 재미를 주는 에피소드들이 풍부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내공 면에서 차원이 다른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과 비교를 한다는 게 좀 그렇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의 경우는 일단 풍부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아무리 러닝타임이 두시간을 넘어가도 관객의 시선을 붙들어 놓아주지 않는다. 큰 스케일의 세계관에서도 때론 박장대소할 수 있는 코믹한 에피소드와 가슴찡한 에피소드를 수시로 집어넣으면서 극이 지루할 틈을 주지 않고, 이런 에피소드들을 영화가 갖고 있는 하나의 큰 줄거리와 메시지에 어울리게 융합시키면서 맛깔스런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게드전기>는 이런 아기자기한 맛이 별로 없다. 아무리 진지하다고 한들, 웃음을 유발하는 캐릭터도 없고 캐릭터들의 개성을 더 부각시켜줄 부차적인 에피소드들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캐릭터들의 개성도 뚜렷하게 남지 못한다는 점이 다소 아쉽다.
그런데 또 영화의 원작이 워낙에 스케일이 큰 판타지 소설이다 보니, 이 한편의 영화에 그 모든 걸 담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웠던 듯 이야기가 복잡하게 느껴지는 면도 없지 않다. 뭔가 비밀을 품고 있을 듯한 테루나 더 복잡한 역사가 있을 듯한 하이타카와 거미의 갈등 등의 요소가 다소 빈약하게 설명되어 오히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영화 속 캐릭터들의 행동에 대해 더 의문을 가지게 될 수도 있지 않나 싶다.
이 영화는 상당히 진지하면서도 잔잔하다. <모노노케 히메>처럼 시종일관 진지한 와중에도 대규모 전투신들이 연이어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대규모 액션 신도 손에 꼽을 정도로 그리 자주 등장하진 않는다. 맨 처음 꽤 스케일이 큰 용의 등장 신 이후 잔잔한 분위기를 이어가면서 역시나 가슴을 후벼파는 지브리산 영화음악이 깔리면, 헐리웃 애니메이션의 왁자지껄함과는 뭔가 다른 푸근함과 아늑함이 스크린 전체를 지배하면서 상당히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이렇게 진지한 것도 너무 오래 가면 잠이 온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는 중후반으로 갈 수록 캐릭터들이 삶과 죽음, 빛과 어둠에 대한 다소 관념적인 대사를 늘어놓고 그걸로 말다툼도 하는지라, 다소 철학적으로 다가와 좀 딱딱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원작이 딱딱하고 철학적이라 한들, 영화화한다면 그걸 좀 유화시켜야 하는 게 당연하면서도, 이 영화는 그런 딱딱한 분위기까지 그대로 옮겨오려 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내가 원작을 안봐서 모르겠지만, 원작은 오히려 더 부드러웠을지도 모르지)
<반지의 제왕>만 보더라도 원작책은 어찌나 막막하던지 1권 초반부의 배경 설명 읽다가 좌절했으나 영화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듯, 판타지 소설을 영화화한다는 것은 보다 폭넓은 관객층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길을 더 넓게 트이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역시 자연 친화, 정체성 갈등 등 꽤 무거운 소재를 다루면서도 영화는 풍부한 에피소드들과 매력적인 캐릭터들로 일단은 "재미"를 추구하지 않았던가. 그런 점에서 <게드전기>는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 영생불멸보다 인간의 유한한 삶이 왜 더 소중한지에 대한 메시지에 치중해서인지 정작 재미 면에서는 다소 놓친 감이 없지 않았다. 때문에 아이들도, 어른들도 지루해할 가능성이 꽤 있는 영화가 되었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최고의 명장면이라 꼽고 싶은 용의 시점으로 본 아렌과의 비행장면과 마지막 조우 장면은 두 세계의 공존이 평화로운 균형으로 발전하는 순간, 미성숙했던 아렌이 삶의 의미를 진정 깨닫고 받아들이는 순간으로서 꽤 짠한 울림을 주었다. 그래도 역시나 지브리가 만든 애니메이션은 여타 애니메이션들이 쉽게 주기 힘든 푹 우려낸 여운을 줄 줄 아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난 이 영화가 차라리 내년 정도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3년만에 내놓는 신작으로서 나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진정 그라면, 애니메이션판 <반지의 제왕>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쉴새 없는 재미와 진한 여운이 배어나오는 메시지로 관객들을 포박했을텐데 말이다. 역시 재능이라는 건 부전자전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 아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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