떄론 사람끼리 얽히는 사연보다 말이 통하지 못하는 동물과 인간의 교감을 보여주는 영화가 훨씬 감동적인 경우가 있다. 필자가 어린 시절 태어나서 처음으로 극장문을 들어선 것은 '베어'라는 영화를 통해서였다.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곰이 나온다는 것 하나만으로 신기하게 스크린을 응시했던 유년시절 기억에도 후반부의 클라이막스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인간과 동물의 교감은 의사소통이 두절된 두 생명체가 서로의 마음을 인지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동을 부르기에 충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추억이라는 것은 단순한 기억을 뛰어넘어 간직할만한 가치를 지닌 기억으로 승화될 떄 발생하는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런 추억을 공유하는 상대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이 존재한다면 추억의 소유자로부터 애착을 얻을 수 있는 어드밴티지를 확보한다. 추억을 소환해주는 가치에 대한 우대감.
올 해 초에 개봉한 '드리머'와 이 작품은 사실 유사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소녀와 말의 아름다운 교감이라는 측면에서 두 작품은 비슷한 색채를 띠지만 이야기의 진행방향과 본직적인 감동의 클리셰에서 각자의 기로에 선다.
'드리머'는 어린 소녀의 성공담이자 흩어져가던 가족애의 확립을 중점에 두고 있다. 그에 반해 '각설탕'은 어린 소녀의 성장담이며 순수한 추억과의 소통 그 자체에 주안점을 둔다. 물론 두 영화가 감동을 끌어내는 발화점은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소녀와 말의 교감 그 자체에 있다.
소녀가 성인의 문턱을 넘어가면서 이야기는 본질에 다가선다. '드리머'의 소녀는 시작부터 끝까지 시절을 뛰어넘지 않은 채 소녀의 자태를 유지한다. 그래서 소녀는 여성으로써의 차별을 경험하기 보다는 어린아이답지 않은 영민함과 당돌함이 돋보일 뿐이다. 어디까지나 '드리머'의 케일 크레인(다코타 패닝 역)은 말의 어린 소유주일 뿐이다. 그러나 '각설탕'의 시은은 상황이 다르다. 그녀는 성인의 문턱을 넘어섰고 자신의 말을 통해 삶을 실현할 채비를 차리지도 못한다. 밑천도 없이 거친 남자의 세계에 기수로써 뛰어드는 그녀가 경험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순수한 승부의 열정보다도 돈놀음이 난무하는 비열한 야욕과의 마찰이다. 성인이 된 소녀는 어린 시절의 꿈만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없음을 깨닫고 좌절하기도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다시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역시 어린 시절의 추억 그 자체의 산물인 말 '천둥'과의 조우이다. 추억과의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보여지는 건 현실의 비루함에 길들여지는 것을 거부하는 야생적인 고결함의 발현이다. 그리고 그런 아웃사이더적인 고결함이 이영화를 통해 보여지는 대범함임과 동시에 반복되는 고지식함의 갈래적 특성이 된다.
사실 이 영화는 낡아빠진 뻔한 감동을 관객에게 주입하려 한다. 눈물을 끌어내는 요소에는 죽음이 개입되고 이별과 재회의 코드는 닳고 닳은 클리셰이다. 하지만 그 대상의 특별함에 의해서 그 뻔한 소재들은 묘한 생명력을 얻는다. 단순히 인간사 세옹지마적인 이야기가 아닌 인간과 동물간의 소통에서 주어지는 비언어적 감동이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은 특별할 것 없는 감정적 소재들을 있어보이게 만드는데 효과적으로 기여한다.
원톱에 가까운 여배우의 활용은 자칫 위험해보이지만 배후에 자리잡은 말의 백업은 단순히 그녀를 외롭게 하지 않는 보조자 역할로 충실해 보인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배우는 간만에 스크린에 얼굴을 비친 유오성이다. 영화에 우정출연하는 그는 영화외적인 사건에 휘말려 갖게 된 공백을 불식하듯 강단있는 캐릭터를 소화해낸다.
이 영화는 끝이 보이는 결말을 지니고 있지만 그 과정까지 식상한 것은 아니다. 여성으로써 겪어야 하는 사회적 차별과 꿈과 현실의 괴리감을 인지해야 하는 시련을 겪어가는 시은(임수정 역)의 성장이야기는 이 영화를 단순히 아름다운 이야기로서의 박제화를 막는다. 시련과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인물의 성공담은 분명 흔해빠졌지만 적당한 가공에 성공한다면 활용의 폭이 넓은 매력있는 소재임에 확실하다.
빗나가지 않는 결말의 식상함을 대처하는 것은 선한 말의 눈망울이다. 말못하는 짐승의 맑은 눈망울은 진실하게 느껴지는 연민을 관객에게 호소한다. 그런 호소는 관객의 눈망울을 붉히는데 적당히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 소녀의 성장기와 맞물리며 고결한 생명애의 구현이라는 커다란 명제는 다소 막연해보이지만 선한 짐승의 놀라운 연기는 막연해보이지 않는 호소력을 지닌다. 배우들의 열연조차도 막지 못하는 설정의 식상함을 막는것은 한마리의 말이다. 배우들의 슬픈 연기보다도 진실해보이는 말의 눈망울이 이 영화의 감정을 짙게 만든다.
이 영화가 중시하는 것은 가족애도 아닌 추억담이다. 말과 인간의 소통은 색다른 우정이자 진한 감동 스토리로 느껴질 법하다. 이 영화가 눈물을 건지는 것은 그래서이다. 연출력짙은 인위적인 느낌이 강한 감동이라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듯한 생명력있는 감동이 엿보이는 것. 조악한 설정에 비해서 감동의 명도가 맑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말한마리에게 이 영화는 상당한 빚을 진 것만 같다.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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