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동화들을 책에 인쇄된 대로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된다는 것은 이제 만인의 진리가 되다시피 했다. 이젠 나도 더이상 순수한 존재가 아니라 그런지 <백설공주>나 <신데렐라>같은 이야기를 떠올리면 모범적이고 해피엔딩인 스토리에서 항상 벗어나기 일쑤다.(원본을 알고 계신 분이라면 납득이 가실 것이다.) 더구나 가족영화의 전형으로 여겨지던 헐리웃 애니메이션들도 <슈렉> 때부터 기존 동화의 이야기 구조를 칼로 난자하듯 이리저리 쑤시기 시작하면서, 그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커져버렸다. 애니메이션들에게 있어서도 이런 전복과 패러디는 이제 필수불가결한 덕목이 되어버렸고.
이 영화 <빨간 모자의 진실>은 한술 더 뜬다. 기존의 내용에 패러디를 살짝 가미하는 게 아니라, 아예 자기들 멋대로 내용을 확 바꿔버린다. 내용 하나하나에 딴지를 걸고, 전개를 확 뒤집어버리면서 모든 면에서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음을 끊임없이 드러낸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응큼한 늑대와 지혜로운 소녀의 대결이 주된 소재인 "빨간 모자" 이야기가 이 영화에서는 <유주얼 서스펙트> 뺨치는 범죄 스릴러가 되어버리니 말 다했다.
평화롭기만 해보이던 숲속 마을에 일대 혼란이 일어난다. 집집마다 갖고 있던 요리책들이 잇따라 도난당하는 것. 우리의 주인공 빨간 모자(강혜정)는 이에 할머니(김수미)가 걱정되기 시작한다. 빨간 모자의 할머니는 숲속 마을에서 최고라고 일컬어지는 요리 실력의 소유자이고, 그만큼 할머니의 요리책도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할머니네 집에 늑대, 빨간 모자, 왠 덩치 좋은 도끼맨이 한꺼번에 마주치고, 뒤이어 손발이 묶인 할머니까지 발견되면서 한바탕 사건이 터진다. 이들 중 분명 요리책을 노리는 이가 있을 것이라는 거다. 나름 지혜롭다고 할 수 있는 폴짝이 형사(임하룡)은 한명 한명 심문을 통해 진실을 캐나가기 시작하는데, 그런데 같은 상황인데도 이 사람들이 말하는 건 하나같이 다르다. 과연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고, 요리책을 노리고 있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이 영화는 근래 보기 드물게 오직 더빙판만을 상영한다. 아마도 수입사 측에서 그만큼 더빙판에 자신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리라. 그만큼, 이 영화는 더빙판도 상당히 재밌다. 아니, 오히려 더빙판으로 봐야지 더 재밌을 것 같다. 단순히 유명 연예인들을 성우로 캐스팅해 유명세만 빌리려 한 게 아니라, 그들의 개인기도 끄집어냈다는 소리다. 자막판에서 할머니 역의 글렌 클로즈가 번지점프하듯 강가에 내려가선 고기잡는 아저씨에게 "헬로우~"하는 것보다 더빙판의 김수미 씨가 "어이구 안녕허쇼~"하는 것이 아마도 더 웃길 것이다. 거기다 "끊어, 프란체스카 봐야혀~"와 같은 멘트는 더빙판이 아니면 절대 들을 수 없는 멘트이다. 그만큼, 이 영화는 더빙판만의 재미가 꽤 많이 숨어있다. 강혜정은 특유의 똑부러지는 목소리로 빨간 모자에 딱 맞는 연기를 소화해냈고, 안그래도 정신없는 노홍철은 거기에 특수효과까지 덧입혀 정말 자막판보다 더 정신없을 것 같은 다람찍사의 모습을 재현해냈다. 임하룡 씨 역시 특유의 무뚝뚝한 말투로 "쑥스러운" 형사의 이미지를 잘 보여줬고, 늑대 역할의 경우는 굵직하고 남성적인 목소리의 성우가 의외로 애교많고 웃긴 톤으로 얘기하면서 유행어인 "왜 이러세요 아저씨~ 안그러셨잖아요~" 멘트를 날리는 등 재미난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결말도 뻔히 보이고 내용 전개도 눈감고도 맞출 만큼 훤히 아는 동화에서 추리할 건덕지가 있는가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영화는 그 와중에 "요리책 도난"이라는 나름 솔깃한 사건을 꺼내놓는다.("누가 할머니를 죽였는가?"와 같은 사건을 꺼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 영화 가족용 애니메이션이다. 그랬다간 부모들의 질타를 받는 건 시간문제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단순한 사건일 텐데, 이 사건을 놓고 빨간 모자, 늑대, 할머니, 도끼맨 등 용의자들 간의 진술이 서로 다른 전개를 통해 추리물로서의 재미를 제법 살렸다. 할머니가 이런 일을 하고 있을 시간에, 다른 한편에서 빨간 모자는 이런 일을 하고 있었고, 그러다가 둘이 이런 상황에서 마주치는 한편, 저쪽에서 도끼맨은 이런 일을 하고 있었다는 식의 거미줄처럼 얽히는 인물들 간의 사건 전개는 퍼즐처럼 흩어져 있으면서도 교묘하게 연결되어 짜맞춰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단순히 추리 애니메이션 흉내만 낸 게 아니라, 제대로 그 구조를 따르면서 묘미를 살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패러디의 재미도 만만치 않다. 항상 활짝 웃고 착하기만 할 것같은 빨간 모자는 알고보니 수시로 냉소적인 눈빛을 쏘아댄다. 늘 포근하고 자상한 이미지로만 생각하는 동화 속 할머니의 모습은 이 영화에서 "엑스트림 스포트"(영화 속 김수미 씨의 발음을 빌리자면)를 즐기는 "트리플 G" 할머니로 변해있고, 생긴 건 천하장사 몇연패는 했을 것 같은 도끼맨이 알고보면 한없이 수줍고 두뇌회전도 약간 부족한, 도끼 쓰는 법도 제대로 모르는 소심한 닭꼬치 장수이다. 응큼하기만 할 것 같은 늑대는 알고보니 나름대로 진실을 추구하는 기자이고, 양들과의 인터뷰에서도 사람들의 경우와 다를 바 없이 금품이 오간다. 이처럼 기존의 동화 속 캐릭터들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었던 정형화된 이미지들을 사정없이 부수고 뒤틈으로써 패러디의 재미 또한 포기하지 않았다.
다만 몇가지 아쉬운 점도 있긴 하다. 첫째가 기술적, 시각적인 면. 요즘 헐리웃 애니메이션들이 하나같이 3D로 만들어지고, 털 한올 한올이 바람에 날리는 것까지 실사에 가깝게 묘사하는 등 기술이 있는대로 발전한 지라 우리의 눈이 다소 높아진 면도 있겠지만, 역시 3D로 만들어진 이 영화의 경우에는 여타 애니메이션들에 비해 기술력이 좀 부족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표정 묘사도 살짝 부자연스러운 점이 없지 않으며, 배경이나 사물 묘사도 이전에 봐왔던 애니메이션들보다는 다소 단조롭고 투박한 것이 사실이다. 애니메이션으로서 드물게 추리의 개념을 도입하고 패러디의 기능도 사정없이 사용했지만 거기에 기술력까지 받쳐줬다면 더욱 빼어난 애니메이션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좀 있다.
추리의 결과 밝혀지는 범인의 양상도 생각보다 좀 뻔한 것이 사실이다. 중간중간 용의자들의 진술이 이어질 때마다 복선을 깔아놓긴 하지만 조금만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금방 복선을 알아채릴 만하다. 복선을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뒤에 가서 다시 상기시킬 때 절묘하게 깨달을 수 있게 보다는 좀 눈에 띄게 깔아놨다는 점에서 반전이 드러나는 부분에서 충격이 덜한 것이 좀 아쉽다. 기왕에 도발적일 거 반전도 좀 그랬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단점들이 있긴 하나, 그래도 이 애니메이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을 지녔다. 우리가 아예 세트로 묶어놓고 하나의 고정된 관념 안에 가둬놓은 동화 속 캐릭터들을 하나하나 풀어놓고, 그들 각자에게 개인적인 사정을 마련해 줌으로써 보다 복잡다단한 이야기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같은 상황을 놓고 용의자들이 전개하는 전혀 다른 이야기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상황들을 지켜보는 추리 영화의 재미 또한 제법 쏠쏠해서, 이 영화는 그저 가족끼리 와서 마냥 즐겨야지 하고 보기에는 머리를 좀 써줘야 하는 영리한 애니메이션이다.
우리가 언제나 연약하고 청순한 존재로만 생각하고 있는 신데렐라가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연약하고 청순하기만 할까? 항상 악랄하고 무자비한 존재로만 여기고 있는 백설공주 이야기 속 여왕은 정말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이 악하기만 할까? 이 영화는 이렇게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 머리 속에 정형화된 동화 속 캐릭터들을 한바탕 뒤집어봄으로써 또 한번의 질문을 한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서로 다른 진술에 어리둥절해 하며 속고 속이는 것 뿐만이 아니라, 우리 또한 동화 속 캐릭터들의 이런 표면적이고 어쩌면 가식적일 모습에 제대로 속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앞으로 동화책 읽으면서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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