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면서 "꿈"이라는 걸 참 얼마나 많이 꾸어왔던가. 잠잘 때 꾸는 꿈은 물론이요, 삶의 지표에 있어서 우리는 참 수십, 수백번의 꿈을 꾼다. 어렸을 때부터 "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와 같은 꿈을 꾼다든가, "난 나중에 이런 이상형의 이성을 만나야지"와 같은 꿈들 말이다. 그런데 이런 꿈들이 실제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이 요구되는 법이다. 노력을 해도 안되는 건지 아니면 하기 귀찮은건지 몰라도 어떨 땐 처음의 꿈에 좌절해 점차 그 높이를 낮춰보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영화 <드리머>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이런 일들을 하지 않는다. 제목에 걸맞게 주인공들은 한가지 꿈을 정해놓고, 그 꿈의 난이도나 높이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은 채 그저 그 꿈을 향해 달려간다. 꽤 무모하고 또 해피 엔딩이 될 가능성이 높음을 고려할 때 너무 작위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온다. 우리가 꿈이라는 위대한 보석의 크기를 감히 줄일 수 있는가 하는 면에 대해서 말이다.
한때는 좋은 말들을 골라 사육했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이름만 말목장인 곳을 소유한 크레인 가족. 이 가족의 가장 벤 크레인(커트 러셀)은 경주마를 키워 시합에 내보내는 과정에서 큰 빚을 지고, 이로 인해 여태까지 반대해오던 그의 아버지 팝(크리스 크리스토퍼슨)과의 갈등의 골은 깊어진다. 이리하여 남의 목장의 경주마 사육사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현재, 그가 훈련을 맡은 실력 있는 경주마 소냐도르가 엄청난 부상을 당하게 되고 그는 목장 주인과 협상해 그 말을 자신의 목장에 직접 데려온다. 이는 함께 경기를 간 그의 딸 케일(다코타 패닝)의 도움이 컸다. 케일은 목장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소냐도르에게 밤마다 캔디바를 가져다주며(소냐도르는 단 것을 좋아한다) 우정을 쌓고 그 우정 속에서 서먹서먹하던 가족들 사이도 점차 온기를 되찾게 된다. 그런데 어느날 소냐도르의 다리가 기적적으로 낫게 되고, 케일은 그의 주인, 아니 그의 친구로서 소냐도르를 다시 시합에 내보내기로 결심한다.
이 영화의 주연배우 다코타 패닝은 현재 국내외 적으로 <나홀로 집에>의 맥컬리 컬킨 이후로 가장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아역 배우가 아닌가 싶다. 최근 영화들 중에서 이 영화처럼 주인공 아역배우의 얼굴을 전면에 세우고 포스터 상단에 "다 코 타 패 닝"이라고 큼지막하게 써놓기까지 한 영화가 어디 흔한가. 다코타 패닝은 이 영화에서 그만큼의 값어치를 해낸다. 철부지 어린아이로서 가질 수 있는 서투름, 천진난만함과 동시에 어른못지 않은 배려심과 따뜻한 마음도 소유한 아이 케일의 모습을 너무도 멋지게 보여주었다. 너무 아이처럼 철부지 없기만 하지 않고, 또 너무 아이답지 않게 영악하고 명석하지도 않고, 적당히 똑똑하면서 여전히 순수한 아이의 모습이 맞춤옷처럼 잘 어울리지 않았나 싶다. 커트 러셀, 엘리자베스 슈, 데이빗 모스 등 부모님뻘의 성인 연기파 배우들 사이에서도 뒤쳐지는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이 그녀 혼자만으로도 스크린을 장악하는 능력이 이번에도 빛을 발했다. 슬픔과 기쁨의 순간에 망설임없이 감정을 드러내는 그녀의 모습은 보는 사람도 역시나 그 감정에 빠져들어 보다 흐뭇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왜 이 배우가 최근 미국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번 여자 배우가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도 남겠다.
물론 어른들의 연기도 앙상블이 좋았다. 지금까지의 좌절때문에 돈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딸을 사랑하는 마음 앞에서 그 꿈을 이뤄주는 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을 잘 보여준 커트 러셀, 커트 러셀과 상당히 흡사한 외모로 묵묵한 그러나 깊은 자식 사랑을 보여준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등 중견 배우들의 묵직한 연기가 없었으면 이 영화의 묵직한 무게감도 없었을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 영화의 스토리 구성은 굉장히 뻔하다. 순수한 소녀가 좌절에 빠진 동물을 만나고, 그 동물과 우정을 나누면서 점차 좌절의 늪에서 구해내고 결국 찬란한 해피 엔딩을 맞이하는 것. 전형적인 헐리웃식 휴먼드라마라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때론 너무 뻔하게 흘러가서 좀 웃기지 않는가 싶을 정도로.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 뻔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꿈"이라는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를 가슴 설레고 흐뭇하게 만든다. 새삼 "꿈"이라는 게 왜 "꿈"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영화를 보면서 하게 됐다. 말그대로 "꿈"이라는 건 우리가 잠자면서 겪는 것과 비슷한, 현실적으로 직접 만지고 느끼기 힘든 무언가를 의미할 것이다. 이런 것을 우리는 인생의 목표라고 삼고 달려가는 것이고.
생각해보면 우리가 그동안 꿈이라는 것을 얼마나 소극적으로 만들어왔는가 싶다.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서 항상 적어 보이던 장래희망만 해도 그렇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는 "의사", "과학자", "대통령" 등 듣기만 해도 으리으리한 직업들을 꿈으로 삼는다. 그러나 점차 학년이 올라가고 학교가 올라갈 수록 우리는 현실과 더 많이 접촉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꿈을 알아서 줄인다. 그저 안정적인 기업의 회사원, 때론 단란한 가정의 좋은 가장만 되도 장래희망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현실과 맞닥뜨리면서 내 처지를 깨달아가는 과정이기도 하겠지만, 다르게 보면 점차 더 많이 겁을 먹어 가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하면 의사가 될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기보다 "이 상황에서 내가 의사가 되기나 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한다는 얘기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영화 속 크레인 가족은 참 무모하다. 엄청난 부상을 당한 적 있는 데다 체력적으로 상대적인 열세를 보이는 암말을 메이저급 대회에 출전시켜 우승을 해보겠다는 케일의 마음, 나아가 그 가족의 마음은 정말 보는 나도 말리고 싶을 정도로 너무 막나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계속 보면서 이런 생각이 참 겁쟁이같은 생각이구나 싶었다. 그들은 현실의 장벽이 아무리 가로막고 서도 상관없이 그저 꿈을 바라본다. "꿈"이라는 건 당장 현실에선 불가능한 만큼 끊임없이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 꿈을 자신들의 내면에 마치 최면이라도 걸듯 끊임없이 되새긴다. 그 꿈을 이루어 행복에 겨울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꿈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 노력하고 결국은 자신들이 그 꿈에 가까워지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꿈"이라는 소재에 관해서 유난히 가슴에 깊은 여운으로 남는 말이 있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앙드레 말로)라는 말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백번 천번 맞는 말이다. 우리는 한번 삶의 목표를 정하고 그에 대한 꿈을 꾸면 그 목표에 우리가 좀 더 다가가야지 하고 생각하지만, 그 목표로 끊임없이 다가가다 보면 어느새 그 자신이 그렇게 바라던 그 목표가 되어 있음을 발견하는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다. 꿈이라는 게 단지 제자리에 서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노력만 있다면 점차 내 쪽으로 움직여 스며들 수 있다는 것이 참 재미있는 사실이다.
이 영화 <드리머>는 이렇게 자신들의 꿈을 좇다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남들이 그저 꿈만 꿀 줄 아는 "몽상가(Dreamer)"라는 소리를 할지라도, 오로지 그 꿈을 향해 달려가고, 결국 그 꿈과 자신의 모습을 일치시켜가는 용감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꿈"의 모습과 위치에 우리를 끊임없이 맞춰가도록 노력해야지, 우리의 지금 위치에 알아서 "꿈"을 낮춰서는 안되는 것이다. "넌 위대한 챔피온 네가 달리면 땅이 울리고 하늘이 열리지 승리는 네 것 우승컵을 안은 나는 네 등을 꽃다발로 장식하네." 우리의 꿈을 향해 최면을 걸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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