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3.04 메가박스
<주>이 글에는 다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내용을 알고 싶지 않으신 분들은 읽는 것을 자제해 주십시오.
일상적인 대화를 할 때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이 '다르다'와 '틀리다'이다. 쉬운 예를 들면 생각없이 "야, 그거랑 이거는 틀리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틀리다'는 '옳지 않다','그르다'의 의미이기 때문에 앞의 문장은 잘못된 문장이다. "그것과 이것은 다르다."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만 이 착각은 언어의 사용에 국한된 문제만은 아닌듯 보인다.
사람들은 보통 '평범하다'라는 느낌과 다른것에 대해 '다르다'라고 느끼기 보다는 '틀리다'라고 느끼는 경우가 많은 듯 보인다. 익숙하지 않은, 나와는 다른 어떤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부정이라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자연상태에서 모든 생물은 다른것에 대한 도태의 양상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정상이라 불려지는 개체는 변종에 대한 공격성을 보이고, 무리로부터 도태되지 않더라도 생존에 큰 위협을 겪는다. 인간이 아름답고 신기하다고 화제에 올리는 백호나 백사자는 자연 상태에서는 도태되기 십상이고, 이종(異種)결합으로 탄생한 노새나 라이거,타이곤은 번식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자연상태의 약육강식과 우성 생존을 거스르는 것이 인간의 문명이다.
인간의 문명은 고대로부터 점차 약한 개체 또한 안정적으로 생존할 수 있도록 진화했다.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강한 우성개체가 열성개체의 우위에 있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인간도 어찌할수 없이 자연으부터 발생한 존재이기 때문일까.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거부감은 현대에도 만연하다. 다만 장애인이나 정신지체자에 대한 우월감 혹은 멸시는 생물학적인 우위라는 점에서 단순하다. 이 문제는 어쩌면 단순하다. 문명과 교육은 이러한 도태를 방지한다. (그것이 개개인에 따라 어떻게 지켜지고 있던 간에.)
오히려 문명은 또다른 종류의 도태를 보여준다. 사회적인 규약에 의한 도태이다. 이혼, 결손가정, 독신, 반(反)정부적가치관 (2차대전 당시 독일의 반나치주의자, 자국 전쟁중 반전주의자) 등, 그 대상의 옳고 그름과는 관계없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도태되는 다양한 경우를 보여준다. 이러한 도태의 양상은 점차 긍정적인 수용의 형태로 변화하고 있으나, 아직 갈길은 멀다.
그리고 이러한 이질적인 대상에 대한 도태에서 아직도 수용에 어려움을 겪고있는 문제중의 하나가 '동성애'이다.
'동성애'란 사회적인 도태와 더불어 생물학적인 도태의 문제 또한 함께 포함하고 있기에 쉽지 않은 문제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생물학적인 도태라 함은 문명의 존중에 의해 장애가 사라졌으나, 사회적인 도태의 문제는 쉽사리 풀리지 않는다.
영화는 이러한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낸다. 대부분의 퀴어 영화가 이러한 사회적인 도태에 맞서는 치열한 모습을 그려내는 것에 비해, 영화의 주인공들은 지극히 순종적이다.
인상적인 것은 그들이 처음부터 동성애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고립된 공간에서의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인간 대 인간으로 사랑에 빠진다. 그 과정의 자연스러움은 관객을 당황시킨다. 일반적으로 가지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이미지들과는 달리 그들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들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 사회적으로 형성된 분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특히 '애니스'(히스 레저)는 자신이 동성을 사랑하고 있음에도, 동성애는 그르다는 학습된 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자신의 애정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끊임없이 머뭇거리고 벗어나고자 한다.
그들은 정해진 사회적 규범을 따라 가정을 꾸린다. 그들이 자신들의 아내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평범하다고 말하는 삶과 일상 속에서 느끼는 중압감과 무력감은 그들을 더욱더 브로크백으로 몰고간다. 그들의 사랑에 공감을 느끼는 것은, 브로크백에서의 그들이 의무와 책임, 사회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단순히 하나의 존재로써 교감을 나누었기 때문이었다. 둘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의 만남에서는 어떠한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함께 공명하고 함께 느끼는 인간과 인간일 뿐이다.
브로크백 밖에서는 그들은 한 가정의 가장이자, 아이들의 아버지이다. 자신의 감정에 대해 좀 더 용감했던 '잭'(제이크 질렌할)도 죽음이 닥친 순간까지 성실하게 일하는 가장이었다. '애니스'(히스 레저)는 비록 이혼하긴 하지만, 끝까지 좋은 아버지로써 남는다. 그는 '평범한' 규칙의 세계를 지켜냈다. 그들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자면, 조금은 측은한 마음이 든다. 필자는 여성인지라 그 느낌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남성다움'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그 권한(가장으로써의 존경, 집안의 중심으로써의 존중)과 기대치에 대한 중압감의 무게가 느껴졌다.
'애니스'의 딸이 결혼 소식을 알리고 떠난 뒤 '잭'의 셔츠를 바라보며 "I swear"라고 말하는 순간 소리없이 흘러내린 눈물은 그의 미묘한 서글픔에 대한 공감이었다. 자신에 대한 사회적인 기대와, 자신이 사랑하는 자식에 대한 신뢰를 지켜냈지만, 자유로운 인간으로써의 공감과 사랑의 감정은 참아내야했던 그의 슬픔.
평생 만나기 힘든, 어쩌면 살아가며 한번도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영혼의 짝을 잃어버린 슬픔에 대한 인간적인 공감이었다.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The Bridges of Madisoncounty, 1995)가 떠올랐다. '프란체스카'(메릴스트립:Meryl Streep)가 운명적인 사랑과 가족 사이에서 가족을 택하고, 그의 사랑을 떠나보내는 장면에서 느꼈던 슬픔. '프란체스카'와 '애니스'의 차이라면, 그 운명적인 사랑의 대상이 이성이었나 동성이었나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오히려 그들의 사랑은 '결혼'이라는 서약을 하기 전의 만남이기에 '프란체스카'의 불륜이라고 치부될 수 있는 감정보다 사회적으로 정당한 것일지도 모른다.
'애니스'와 '잭'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르게, 동성에게 영혼의 만남을 느꼈을 뿐, 그들은 '틀린것'이 아니라 '다른것' 뿐이었다.
그들은 조금 달랐다. 그러나 대상이 다른 것 뿐, 그 다른 사랑이 얼마나 평범하고 자연스러웠는가. 그들은 다르면서도 같다.
평범하다고 일컫어지는 사람들을 보자. 그들의 일생은 모두 거기서 거기인 것 같지만, 들여다보면 너무나 특별하고 그 하나하나가 다른다. 어쩌면 평범함과 다름은 어떤 관점에서 보고,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다르다'는 개념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다르다'를 '틀리다'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written by suy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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