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얘기하는 심리적 공포란 과연 무엇인가?
프로이드는 일찌기 '우리는 무서워서 도망가는가? 아니면, 도망가므로 무서워지는가?'라는 명제를 남겼다.
난 이 명제가 심리적 공포를 단적으로 설명하는 명제라고 생각한다.
예를들어 여러분의 지하실에서 계속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해보자.(지하실도 좋고 다락도 좋고 옷장도 좋다)
그 소리는 충분히 여러 상상을 부추킨다. 그런데 어느날 그소리가 왠지 유령의 소리라고 느껴진다.
당신은 그 소리를 확인하기로 결심하고 지하로 내려간다. 한걸음 두걸음... 가는 동안 여러분의 긴장은 쌓여간다.
그런데, 여기서가 문제이다. 당신은 두가지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냥 왔던 계단을 다시 올라가 스스로 '밑엔
아무것도 없어...' 하며 살던가, 그것이 설령 너무도 끔찍한 것이라 당신이 심장마비로 죽을 지언정 확인해보던
가...
용기 없는 당신은 그냥 왔던 계단을 올라가기로 한다. 목숨 걸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올라가는 계단은 내
려왔던 계단보다 훨씬 길고, 힘들고, 공포스럽다. 마치 뒤에서 뭔가가 튀어나올것처럼.
그리고, 다행히 평지로 올라와서 지하로 내려가는 문을 봉하고 밝은 햇살속으로 나가더라도, 당신의 마음속엔
계속해서 지하의 무언가가 살아남는다. 그것은 다시 내려가서 확인하기 전엔 아마도 영원히 당신의 가슴속에
공포스런 존재로 남아있을 것이다.
영화 검은 물밑에서 는 바로 이런 영화이다. 그리고 이런점은, 개인적으로 소설의 엔딩이 훨씬 더 잘 표현했다
고 본다.
아마도 단편이라 그대로 따르기에는 무리가 있었겠지만, 소설속의 여주인공은 이 아파트에 뭔가가(옥탑 물
탱크에 빠져 죽은 소녀의 원귀)있다고 느끼는 순간, 그대로 딸을 데리고 아파트를 떠난다. 짐도 챙길 여유 없이.
그야말로, 살아야겠다는 본능으로 다시 지상으로 가는 계단을 뛰어올라가는 것이다.
어쩌면, 물탱크의 비밀을 풀고, 그 원한을 달래주는 것이 관객(특히 우리나라 관객)의 입장에선 뭔가 영화답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현실의 공포, 우리 인간 본능 그대로의 모습은 이 검은 물밑에서가 훨씬 더 잘 살렸다고 생각
한다. 그것은 감독의 용기이고, 어쩌면 원작의 힘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우리 주변의 수많은 어둠속에서 뭔가가 우리를 부르고 있다. 갈 것인가? 아니면 상상만 하고 살 것인가?
그냥 지금처럼 사는 게 편할 것이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고 굳게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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