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발이 간간이 휘날리는 매서운 추위의 겨울날. 지난 며칠동안 잠도 제대로 못자고 기다렸던 바로 오늘. 연극 ''이''와 영화 ''왕의 남자'' 시사회를 보기 위해 두근거리는 가슴을 꼭 끌어 안고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으로 향했다. 연극 ''이''와 영화 ''왕의 남자''를 동시에 볼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비록 맥스무비 측에서 약속했던 것과는 달리, VIP석이 아닌 2층 구석의 R석이었다는 점과, 연극이 끝난 후 영화 필름을 틀기까지 사운드상의 문제로 한시간 가까이 상영이 지연된 점과 같이 진행이 미숙했다는 것이 맘에 걸렸고, 덕분에 일곱시간 가까운 긴 시간을 꼼짝없이 갑갑한 의자에 몸을 파묻고 눈에 핏발이 서도록 스크린을 지켜봐야 했지만 오늘 얻은 그 많은 것들에 비하면 이쯤은 웃음지으며 넘겨줄 수 있는 일이었다. 여러분 죄송하다며 필름이 돌아갈 때까지 무대 위에서 만담까지 선보였던 프로듀서와 원작자의 노력과 재치에 관객들은 오히려 박수를 보내며 단 한 사람도 자리를 뜨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힘들게 왕의 남자 시사회는 시작되었다.
▽영화 시작부터 공길의 아름다운 자태가 관객의 시선을 압도했다. 악단의 신명나는 연주며, 장생의 줄타기 묘기에도 불구하고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은 공길이다. 장생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새롭게 풀었다는 이준익 감독의 말과는 다르게, 이 영화는 ''공길의, 공길에 의한, 공길을 위한'' 영화다. 실제로 영화의 줄거리는 공길을 사이에 둔 연산과 장생의 미묘한 갈등이 주축이고, 공길이 등장하지 않는 장면은 단 한 컷도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공길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신인배우 이준기는 도무지 신인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열연으로 큰 박수를 받았다. 공길역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예쁘장한 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딘지 모를 신비감, 순하고 깨끗한 성품과 맑고 투명한 순진한 미소까지 표현해낼 수 있어야 했다. 이준기는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냈다.
공길의 상대역인 장생역을 맡은 감우성이나 연산역을 맡은 정진영은 역시 노련한 배우답게 각자 맡은 몫을 훌륭히 해냈다. 특히 감우성은 줄타기를 비롯해 꽹과리 치는 장면, 떨어지거나 구르는 장면 등 위험한 장면을 직접 소화해낸 노력이 엿보인다. 감우성의 연기가 노력의 결실이라면, 정진영의 연기는 영감의 결정체다. 순간순간 하늘에 연기퍼지듯 종잡을 수 없는 연산의 광기어린 감정곡선을 너무나 리얼하게 표현해냈다. 두 눈에서 뿜어나오는 광기어린 시선. 헤벌어진 입에서 쏟아져나오는 가시돋힌 말들. 더불어 더없이 진지하고 숨막히는 긴장감이 흐르는 장면에서까지도 정진영은 관객을 웃길 줄 안다. 그의 연기에 그저 찬사를 보낼 뿐이다. 연극에서 현실주의자의 이미지가 부각되었던 것과 달리, 영화에서의 녹수는 질투의 화신 그 자체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연산이 공길을 만난 뒤로 녹수를 전연 찾지 않고 등을 돌려버리기도 하지만, 끝없이 공길을 질투하고 모함하는 모습이 오히려 인간적이었다고나 할까. 영화 맨 마지막 장면에서 연산의 곁을 떠나지 않고 묵묵히 그 곁을 지키는 장녹수의 모습이 오히려 지조있는 열녀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이 또한 연기의 힘일까.
▽각각의 연기력이 모두 일품이었던 것처럼, 스토리 자체도 복잡하게 비비 꼬여있지 않아 좋았다. 쓸데없이 하고싶은 말을 줄줄이 늘어놓지 않은 감독의 절제의 미덕이 훌륭했다. 연극에서의 주제가 ''권력에 가장 가까운 자가 권력에 가장 물들기 쉽다''였던 것과 달리, 영화의 주제는 보다 복잡하고 미묘하다. 연극에서는 공길이 본래 광대의 특성을 저버리고 왕의 곁에서 권력놀음에 맛을 들이다 결국 그 권력의 덫에 걸리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했지만, 영화에서의 공길은 권력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공길은 순하고 착하고 한없이 순진한 캐릭터다. 광대패를 먹여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파는 일에 익숙하고, 이에 화가 난 장생이 공길을 데리고 도망갈 적에도 갑자기 나타난 방해꾼들에게 주먹질 한 번 하지 못하고 벌벌 떠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런 공길도 장생을 놓고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장생이 위기에 처하자 대장의 등에 낫을 꽂아버리고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어쩔 줄 몰라 바들거리다 장생의 품에서 안도하고, 장생이 두 눈을 잃은 후에는 그 무한한 상실감에 자신의 손목에 칼을 들이대 자살까지 시도한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도 공길은 연산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의 곁에 남고자 한다. 연산의 폭정에도 차마 활을 바로 겨누지 못하고 기둥을 쏘아 맞히고는 자신을 죽이려다 연산에게 죽은 중신의 마지막 한마디를 되뇌이며 실신한다. 장생이 두 눈을 잃게 된 것에 슬퍼하며 자신의 손목을 긋고도 연산 앞에서 쓰러질 때까지 인형놀이를 멈추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의 중심은 왕의 권력을 탐한 광대도, 광대의 자유를 탐한 왕도, 그렇다고 비극적 결말의 근본적 원인으로서의 동성애도 아니다. 이 영화의 중심 테마이자 결정적인 주제는 허망한 인생과 그 허망한 인생을 특별하게 해주는 사랑, 사랑이다.
공길은 연산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의 곁에 머무르지만, 결국에 가선 자신이 장생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공길과 장생 사이의 관계는 단순한 ''동성애''로 치부하기엔 모자란 감이 있다. 그렇다고 단순한 우정이라고 보기에도 2% 부족하다. 그들은 서로가 없이는 살 수가 없는, 두 명의 목숨이 하나의 끈으로 이어진 일심동체이다. 그런 마음에 장생은 공길을 보호해주려 하며, 공길은 장생곁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내 목숨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사람. 연산이 공길에게 마음을 뺏긴 것에 눈멀었다고 고백하는 마지막 외줄타기 장면에서, 울면서 뛰쳐나와 장생의 말을 맞받아치는 공길의 모습이 내 마음을 깊게 울렸다. 영화 첫 장면과도 연결되는 이 장면에서, 둘은 울면서 웃고, 울면서 논다. 다시 태어나면 중신이 되고프냐, 왕이 되고프냐는 공길의 질문에 두말하면 잔소리라며 자신은 광대로 태어날 것이라는 장생의 말에, 그리고 이 년 역시 두말할것 없이 광대로 태어날 것이라는 공길의 대답에, 그저 배고프면 놀고, 배부르면 행복한 그들의 소박한 인생을 그렇게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결국 서로가 아닐런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나에게 이 다음 생에서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느냐고 묻는다면, 어쩌면 나 역시도 지금의 나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대답하지 않을까. 지난 인생이 후회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진정으로 나 자신을 내 인생을 그리고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도 지금처럼 태어나고 싶다는 것은, 그들에겐 서로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왕도 부럽지 않은 공길과 장생의 애틋한 마음이, 그 사랑이 부러웠다.
덧붙여 ''모든 비극의 시작''이라는 광고카피와 달리, 이 영화는 무척이나 재밌다. 실제로 관객들도 무척이나 자주, 크게 웃었고 나 역시도 정말이지 속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으로 웃었던 것 같다. 진지한 장면에서도 한번씩 웃음이 나게 하는 것이, ''황산벌''을 찍은 이준익 감독 특유의 유머가 묻어나는 듯 했다. 영화 중반 이후로부터는 공길은 웃는 모습이 안보일 정도로 영화의 분위기가 싹 달라진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육봉을 위시해 조연들이 몇 번 우스운 대사를 날려주긴 하지만, 영화 전체의 톤이 말그대로 ''비극''을 향해 달려가는 분위기다. 영화 초반에도 슬쩍 눈물이 나긴 했지만, 중반 이후로는 정말 많이 울었다. 영화 마지막 장면,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마치 저승에서 만난 듯, 꿈을 꾸고 있는 듯, 예전처럼 신명나게 놀이판을 펼치는 광대들의 모습에 코끝이 찡해졌으니. 영화 보는 내내 티슈를 꺼내놓고 되는대로 집어다 눈물을 훔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중엔 정말 영화가 슬퍼서 우는건지, 울다보니 계속 우는건지, 아님 공길이 슬프게 울어서 울고 있는건지 분간이 안갈 만큼 울었다. 두 눈이 빨개질 만큼, 그렇게 울다 눈이 녹아버릴 만큼 울었다. 나도, 공길도, 다른 관객들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하자면 연극을 보지 않고서는 이해가 잘 안갈 대목이 몇 군데 눈에 띄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찌나 편집을 거칠게 했던지, 특히 막판에 반란을 모의하고 마지막에 반란군들이 들이닥치는 장면은 너무나도 뜬금없고 비약적이었다. 장생과 공길의 마지막 놀음에 한창 감정몰입하고 있던 중에 감정을 흐트려뜨릴 만큼. 하긴, 풀버전 DVD가 네시간 분량이라니. 촬영 분량의 절반을 편집한 셈이니, 감독의 고충도 십분 이해할만하다. 이야기의 흐름이 막판들어 급박해진다는 것, 덕분에 이야기의 비약이 생긴다는 것. 그것이 유일한 아쉬움이랄까. 그러나 공길의 눈물에 한 가닥 슬픔을 더해주는 가슴에 와닿는 음악이라든지, 화려한 색채의 의상들, 다양한 놀이판의 모습들 등등 볼거리가 너무도 많았다는 점을 플러스 해주고 나면, 그 아쉬움마저 곧 사라져버리고 만다.
▽오랜만에 영화를 보고 참 많이 울고 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같이 관람한 친구와 함께 근처 술집에서 맥주 한 잔에 이런저런 영화평을 나누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꾸만 할말이 더 생기고 참으로 생각할 것, 돌아봐야 할 것을 많이 남겨준 영화란 느낌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싸늘한 밤길. 외줄에 위태위태하게 걸터앉아 왕을 조롱하던 장생과 울면서 장생에게 소리치는 공길의 모습이 떠올라, 저 깊숙한 곳에 남아있던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을 끌어냈다. 그들은 저 하늘에서 지금쯤 또 한번 놀이판을 벌이고 있을까. 아련하게 멀어지던 꽹과리 소리에 눈물이 흐른채로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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