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정혜> 와 소리, 그리고 음악.
<여자 정혜> 우선, 이 영화에 음악이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뚫고 역시 매일 같은 시간에 울리는 고막이 얼얼할 정도로 큰 알람 소리, TV 홈쇼핑 호스트 멘트, 매일 습관처럼 들르는 같은 맥주집에서의 무미건조한 대화, 옆 사람들의 소음, 싸움 소리, 무심한 듯 지나쳐 달리는 차소리, 한여름 그악스런 매미, 풀벌레 소리, 우체국 문을 여닫는 소리 그리고 그녀의 영혼을 비집고 들어온 미약한 고양이 소리...
온갖 소리가 먼저 떠오릅니다.
도시의 한가운데서 숨쉬지만 실제로는 온전히 차단된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여자 정혜, 어린 시절의 씻지 못할 상처로 인해 가장 가까운 엄마와도 소통을 단절하고 살던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에게서도 떠났고, 이제는 엄마마저 보내고 혼자 삽니다. 아무 감정도 싣지 않은 표정으로, 그렇게 그저 숨쉬며 삽니다. 가끔 아픈 기억들에 사로잡히기도 하지만 늘 같은 옷에, 같은 낡은 구두에 자신을 감추고 사는 것에 익숙해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그녀로서는 불편함으로 보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답답했고, 묵직했고, 그녀 대신 내가 숨을 시원하게 내쉬어줘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마음의 변화 조짐을 보이던 어느날 그녀는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사람을 찾아가 복수하고자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가슴 깊이 눌렀던 울음을 터뜨립니다. 차이밍량의 [애정만세]에서 양귀매가 목놓아 울었던 울음보다 더 응축된 눈물을 보며, 이 영화 감독은 아마도 차이밍량의 골수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통을 간절히 원하면서도 자신을 더 깊숙이 가두기만 하는 주인공들의 닮은 모습을 보며, 누군가와 소통이 이뤄질 듯한 순간에 비로소 자신의 상처를 털어버리는 의식의 터널을 거치는 모습을 보며, 비슷한 방식으로 관객에게 얘기를 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느 날 그녀의 마음에 어떤 남자가 들어왔는데, 자신도, 관객도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는 들어왔습니다. 더구나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그남자에게 먼저 말을 걸고, 일단 거부당하고, 다시 시작되는 벅찬 가슴 고동 소리로 이 영화는 스스로 걸어갑니다. 역시 이 것도 소리입니다. 분명 스크린 속의 소리인데 끝날 즈음에는 이제 억눌렀던 숨쉬기를 고요히 가라앉혀도 될 것만 같은 심장울림으로 보는 사람에게 전염됩니다. 희망도 소리가 있는 모양입니다.
개봉관을 잡지 못해 아직도 ‘개봉예정’인 이 영화는, 그러나 김지수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제값을 하는 영화입니다. 이 조심스런 감독은 우리에게 익숙하지도, 빠져들고 싶지도 않은 정서로 말걸기를 시도해 불편하게 하지만 일단 맘이 통하면 조곤조곤 밤새워 술없이 얘기해도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이 영화에 어떤 음악이 있었는가요?
(실은 이 감상은 제 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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