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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드라마,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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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아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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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m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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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30 오후 8:0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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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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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학교 때, 우리 학교에선 해마다 태종대에서 교내 단축마라톤대회를 했었다. 거리는 약 4.2km로, 원래 마라톤 거리인 42.195km의 약 10분의 1이었다. 원래 운동에 소질이 없기도 했지만, 이 4.2km의 거리가 내게는 어찌나 힘이 들었던지. 무사히 완주하고 도착하면 온몸이 쑤시면서 도저히 다음 일정(학원 등)을 소화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고작 4.2km 뛰는데도 힘든데, 그 10배 거리를 뛰어야 하는 마라톤은 오죽 힘이 드랴.
거기다 일반인도 아니고 자폐아 청년이 마라톤을 완주한다?! 감동을 주기에 이보다 더 좋은 영화적 소재도 드물 것이다. 입소문만 잘 퍼진다면, 흥행과 동시에 관객들의 평도 심하게 좋아서 여러모로 소득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 <말아톤>은 다행히도, 이런 달콤한 유혹에 빠져들지 않았다. 내용이 충분히 감동을 줄 수 있는 내용이지만, 감동을 주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지 않고, 그 이상의 무언가로 더 확장했다.
우리의 주인공 윤초원(조승우)은 겉모습은 여느 청년들과 다를 바 없는 20살의 청년이지만, 실은 지능이 5살에 머물러 있는 자폐증을 앓고 있는 청년이다. 자폐증이란 말 그대로 스스로 소통을 거부하며 마음을 닫고 자신만의 세계 속에 갇혀 지내는 것. 초원이도 예외는 아니다. 타인을 제대로 바라보지를 못하고 언제나 허공만 보며,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고 손을 마구 움직인다. 동물의 왕국 프로그램을 끔찍이 좋아하고, 그 중에서도 얼룩말의 열성팬이다. 그러나 동물의 왕국의 내용을 줄줄 외우고, 한번 기억한 반찬거리는 빠짐없이 기억하는 등 암기력에는 탁월한 재능이 있기도 하다. 초원이 어머니(김미숙)는 아들의 이렇나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 달리기를 시키는데 10km 단축 마라톤에서 3등을 차지할 만큼 그 실력이 탁월하다. 초원이 자신도 달리기를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해서, 어머니는 이참에 마라톤 풀코스인 42.195km를 3시간 안에 완주하는 '서브 쓰리'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고 마라톤 선생님(이기영)에게 지도를 부탁한다. 그러나 왕년엔 챔피언이었지만 지금은 의욕이 없어보이는 이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쉽지 않거니와, 더구나 어머니의 지금까지의 자식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어쩌면 자신을 위한 대리만족과 집착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게 되면서 어머니는 혼란에 빠지는데...
이 영화를 얘기하는 데 결코 빠지고 지나가선 안될 부분이 바로 배우들의 대단한 연기다. 주인공 초원이 역의 조승우 씨의 연기는 실로 눈이 부시다. 얼마나 역할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자폐증이라는 장애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거졌는지 절실하게 느껴진다. 사실 지금까지의 영화나 드라마 속 자폐증 환자의 모습은, 혼자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소리를 빽 지르는 등 다소 과장되고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조승우 씨가 연기한 초원이의 모습엔 그런 면이 없다. 이런 말이 실례가 될 진 모르겠지만, 마치 영화 속 초원이의 행동과 말투가 실제 생활인양,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기에 녹아들었다. 단순히 장애의 한 면을 강렬하게 표현해 깊은 인상을 남기려고 한 게 아니라, 모든 면을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표현하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나를 지켜주니까~ 위%%', '꼭 한벌쯤은~ 캠브%% 멤%%' 등 광고문구를 아무렇지 않게 따라하거나 타인의 행동과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장면들은 웃음을 주기도 했으나 우스꽝스럽게 보였다기보다는 그만큼 초원이의 순수하고 천진한 내면을 보여주는 데 한몫 하지 않았나 싶다. 보통 조승우 씨 나이 정도면, 멋있고 매력 있는 멜로 영화 주인공을 탐낼 법도 한데, 이렇게 과감한 변신을 마다하지 않은 점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나 <하류인생>에서 보여준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과는 완전히 상반된 순수하고 밝은 모습이,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놓고 거기에 기대려고만 하지 않고 맡은 배역마다 거기에 완벽하게 흡수되어 동화될 줄 아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 또 한 명의 제대로 된 배우가 탄생했다는 생각에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장담하건대, 분명 올해 각종 영화제의 남우주연상을 휩쓸거나 적어도 2개 이상은 받지 않을까 싶다.
초원이 어머니 역의 김미숙 씨의 연기도 대단했다. 조승우 씨의 연기가 젊음의 열정에서 오는 패기와 도전정신의 연기였다면, 김미숙 씨의 연기는 오랜 관록에서부터 비롯된 소리없이 강한 내공이 있는 연기였다고나 할까. 자식에게 끝없이 헌신만 하는 어머니가 아닌, 자식에 대한 사랑을 의심받으면서 갈등도 겪고 좌절도 겪는 어머니의 모습이 더욱 현실감 있게 느껴졌다. 이러한 어머니의 모습이 김미숙 씨의 묵직한 연기에 힘입어 영화를 더욱 빛나고 안정되게 만들어주었다. 이렇게 연기를 잘 하시는 분이 왜 여태 영화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는지 모르겠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이 영화는 희귀한 소재에 이끌려 감동만 주려고 급급하는 휴먼드라마가 아니다. 이 영화가 만약 감동에만 집착했다면, 처음부터 일반인의 시선에서 초원이를 열등하게 묘사하면서 그의 장애를 부각시키고, 그가 만나는 현실의 고난을 자세히 묘사하며 힘든 면을 강조하다가 나중에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루면 '이렇게 우리보다 불리한 면이 많은 이도 소망을 이루지 않는가'하면서 닭살 돋는 감동을 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러지 않는다. 초원이는 우리보다 열등한 존재도 아니고, 단지 세상과 소통하는 과정이 우리보다 조금 늦을 뿐인 보통 소년이다. 어머니가 먼저 말을 해야지 따라 할 만큼 자신을 표현할 줄 모르던 초원이는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점차 자신의 의지를 표출하는 능력을 깨닫게 되고, 이제는 스스로 가슴에 손을 대고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초원이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요'라고 말을 할 수 있고, 선생님과도 함께 물을 주고 받을 만큼 자신을 드러낼 줄 아는 소년이 되어 간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 <말아톤>은 단순히 휴먼드라마라기보다는, 한 소년이 자신만의 세상에서 나와 타인과의 소통을 하고 자신을 표현가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영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성애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이 영화는 기존의 영화와 은근히 궤를 달리 한다. 지금까지 인간승리가 초점이 되어 왔던 영화들은 어머니의 헌신을 단순히 주인공의 성취를 극대화하고 감동을 배가시키는 수단으로 이용해 왔던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 <말아톤> 속 초원이의 어머니의 모습은 보다 현실적이다. 자식을 향한 헌신과 애정은 변함없지만, 자신의 이런 애정이 어쩌면 자식을 더욱 억압하고 자신만을 위하는 집착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좌절하기도 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초원이 어머니 모습은 기계적으로 헌신을 강요당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현실 앞에서 좌절도 하고 갈등도 하는 어머니의 모습으로써 더욱 인간적으로 공감이 가고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이렇게 좌절과 방황을 겪은 모성애는 그래서 더욱 마지막에 가서 깊은 울림의 감동을 준다.
조승우 씨가 이전에 한 인터뷰에서 실은 초원이는 자폐아(自閉兒)가 아니라 자개아(自開兒)라고 했다. 마음을 닫고 꿍하지 않고 스스로 마음을 열고 타인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인물이라는 뜻에서가 아닐까 싶다. 사실, 우리같은 아무 장애 없는 평범한 이들이 오히려 마음을 여는 데는 더 큰 장애를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이 영화 속 초원이는 원래 마음을 열기가 쉽지 않은 자폐증이라는 장애를 갖고 있었지만, 부단한 노력 끝에 스스로 자물쇠를 풀고 자신의 마음을 남들에게 스스로 내보였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어떨까. 우리가 영화 속 초원이처럼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손을 마주 치며 기쁨을 나눠볼 때가 얼마나 있었던가. 정작 자폐증이 없는 우리들이 마음을 여는 데는 인색해서 스스로 자물쇠를 채우고 자폐증 환자가 되어가는 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초원이는 자신이 자폐증을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마음의 문을 열어보라고 타이른다. 자신의 심장 박동을 느낄 줄 알고 타인과 그 떨림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어보라고 타이른다.
이처럼 <말아톤>은 휴먼드라마라는 좁은 폭을 벗어나 더 다양한 면을 둘러싸고 있는 영화다. '자폐아의 마라톤 완주'라는 소재의 상업적 코드에만 얽매여 감동만 주려고 안달하지 않고, 더 나아가 타인과 소통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과정, 좌절도 하고 방황도 하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 등 다양한 관점에서 소재를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연초부터 이렇게 착하고 발랄하고 감동적이며 세상을 보는 시각도 넓은 영화를 만난 건 참 행운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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