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을 보고 많은 언론이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잇는 또 다른 판타지 블럭버스터라고들 한다. 사실, 이 영화도 시대를 알 수 없는 배경에 비현실적인 구석이 많아 어느 정도 판타지로 분류될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영화는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잇는' 영화는 아니라고 본다. 그들 시리즈와는 별도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이 영화는 같은 판타지라도 좀 다른 구석이 있다.
그 때문에, 만약 이 영화를 보기 전에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볼 수 있는 스펙터클이나 화려한 그래픽, 그리고 보편적인 감동 코드를 기대한다면 대략 낭패를 볼 수가 있다. 처음부터 이 영화는 삐딱선을 타고 있다는 점, 이게 이 영화의 포인트다.
때와 장소는 언제 어딘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곳.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온 보들레어 삼남매는 각각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다. 첫째 바이올렛(에밀리 브라우닝)은 리본으로 머리를 묶는 순간 창의력 쑥쑥 솟아 발명을 하는 능력을 지녔고, 둘째 클라우스(리암 에이켄)는 읽는 책마다 진공청소기마냥 그 내용을 모조리 암기해버리는 능력을 지녔다. 막내 써니(카라 호프먼, 셀비 호프먼)는 닥치는 대로 깨무는 능력(?)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은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접한다. 바로 삼남매의 부모와 집이 대형 화재로 몽땅 사라져버린 것.(이 사이에 삼남매는 딴 곳에 있었다는 게 신통하다) 남은 건 부모의 막대한 재산인데, 이들 삼남매는 나이가 어려 그 많은 재산들을 법적으로 관리할 수가 없어, 새로운 친척에게 맡겨져야 할 상황에 놓이고, 그 결과 겁나 먼 친척인 올라프 백작(짐 캐리)의 손에 길러지게 된다. 그러나 이 올라프 백작은 불순한 생각으로 가득찬 인물. 이들 삼남매를 없애 재산을 모두 차지하려는 속셈이다. 그로 인해 삼남매를 죽이려는 계략을 세우지만, 삼남매는 고비마다 능수능란하게 통과한다. 이후 파충류 매니아 몽티 삼촌(빌리 코놀리), 두려움을 낙으로 살아가는 조세핀 숙모(메릴 스트립) 등의 손에 맡겨지지만, 그럴 때마다 올라프 백작의 마수는 남매를 덮치는데...
이 영화의 기본 내용은 고아 남매의 시련 극복기 - 악당이 등장하고 위기 상황이 발생하지만, 그럴 때마다 슬기롭게 극복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어드벤처의 공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기존 어드벤처와는 다른 구석이 제법 있다. 이 영화의 배신(?)은 처음 오프닝에서부터 시작된다. 발랄한 오색 빛깔로 가득한 숲이 나오더니, 한없이 밝은 표정의 요정이 나와 아주 아기자기하고 발랄한 이야기를 전개해 줄듯 싶다. 그러나 그 순간 화면이 정지하더니만, 해설자인 레모니 스니켓(주드 로)이 '여러분이 보실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이야기를 원한다면 다른 상영관으로 가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그러더니 한없이 음울한 화면으로 뒤바뀐다. 이처럼 이 영화는 보통 판타지 어드벤처에서 일정량 관찰할 수 있는 밝은 분위기가 거의 없다. 주인공 삼남매에겐 매번 암담한 상황이 덮치고, 조력자가 나타났다 싶으면, 금세 악당의 계략에 빠져 그만 그 역할을 다하고 만다. 해설자가 시종일관 '내가 그리고자 하는 이야기는 뻔한 해피엔딩 스토리가 아니다'라고 말하듯, 이렇게 이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은 가족 어드벤처라고 하기엔 다소 암울하고 괴팍한 구석이 있다. 마지막에 가서도, 어쨌든 해피엔딩이라고 밝은 분위기로 끝나기는커녕, '앞으로도 이들 앞에는 더 많은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라고 겁을 주니...
이러한 괴팍한 분위기는 악당 올라프 백작을 맡은 짐 캐리의 연기도 한몫한다. 이 영화에서 짐 캐리의 연기는 혼자서 세 명의 연기를 능청스럽게 선보일 만큼 그 개인기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목소리 흉내, 변장술, 코믹한 율동에 이르기까지, 짐 캐리의 온갖 코믹 연기의 집결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짐 캐리가 악당 역을 맡았다는 것에서부터 어느 정도 짐작하셨겠지만, 이 악당 올라프 백작은 근엄한 구석이 없다. 보통 판타지 어드벤처의 악당은 <반지의 제왕>의 사우론이나 <해리 포터> 시리즈의 볼드모트처럼, 그 이름만 들어도 존재감이 느껴지는 상당히 중량감 있는 악당이건만, 이 카운트 올라프는 중량감이 느껴지긴커녕 성가시다. 혼자 있을 땐 집안 정리도 안할 만큼 게으르면서, 돈에 목숨 걸고 남의 목숨 아까운 생각을 할 줄 모르는 옹졸한 구석이 다분하다. 그가 나타났다 싶으면, 그 카리스마에 기가 죽기는커녕, '아, 또 나타났네' 하는 성가신 느낌이 앞선다. 이렇게 기존 어드벤처와는 다른 노선을 달리는 악당의 캐릭터도 영화의 특이성에 한몫한다. 그런 만큼, 짐 캐리의 악랄하면서도 웃긴 올라프 백작 연기는 영화를 더욱 묘한 분위기로 만드는 데 일조하는 딱 어울리는 연기라고 할 수 있겠다. 안그래도 우울한 영화, 악당까지 웃기는 구석 없이 한없이 악랄하기만 했다면 오히려 보기 꺼려졌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이 영화는 대신, 기존의 판타지 영화들이 갖고 있는 선굵은 재미와 반대로 상당히 아기자기한 재미를 갖고 있다. 그 주된 두 가지 재미 중 첫번째는 개성 넘치는 캐릭터를 보는 재미다. 우선 삼남매의 캐릭터부터 확연하게 구분이 지어진다. 첫째인 발명왕 바이올렛은 다소 깐깐하면서도 연약하고, 그러면서도 맞이답게 리더쉽이 있다. 둘째인 독서왕 클라우스는 외모상 이제 사춘기에 접어들 나이에 맞게 다소 반항적인 구석이 보이면서도 뛰어난 암기력을 소유해 위기상황마다 바이올렛과 호흡을 척척 맞추며 슬기롭게 대처해나간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 중 하나인 막내 깨물기왕 써니는 그 귀엽고 해맑은 미소를 연사하며 관객들을 즐겁게 하면서도, 깨물기 능력을 적재적소에 활용해 위기 탈출에 일조한다. 더구나 통역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다' 한마디에 '우리 밖에서 자자'라는 말을 압축할 줄 아는 탁월한 언어구사 능력까지 지녔다. 앞에서 말한 올라프 백작과 삼남매 이외에도 개성 있는 캐릭터는 또 있다. 파충류 매니아 몽티 삼촌은 언뜻 보면 짐 캐리가 또 분장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한없이 따뜻하고 즐거운 마음씨 좋은 삼촌이다. 거의 유일하게 남매가 함께 지내기에 성격적으로 가장 문제가 없는 쪽에 속하겠다. 메릴 스트립이 맡은 조세핀 숙모는 착하긴 하나 겁이 너무 많다. 집안의 온갖 물건이 자신에게 해를 가할 까봐 하는 두려움 속에 살아서, 그녀에겐 오히려 집이 제일 위험한 곳이다.(하긴, 집의 위치로 봤을 때, 그런 걱정을 안하는 게 비정상일 수도 있겠다) 이런 히스테리컬하고 코믹한 성격의 조세핀 숙모를 연기파 배우 메릴 스트립은 연기파 배우로써의 위압감이나 근엄함 없이 주책스럽고 보는 이가 즐겁게 연기해주었다.
또 하나, 아기자기한 재미가 추리소설 같은 몇몇 부분들이다. 부모님이 화제로 세상을 떠났는데, 거기엔 어떤 비밀들이 있으며, 친척들이 항상 갖고 다니는 망원경의 정체가 무엇이며, 또 조세핀 숙모가 갖고 있던 눈 모양의 그림은 무엇을 뜻하는지 등, 삼남매가 풀어가야 할 미스테리한 비밀들이 많아서, 함께 풀어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물론 상당히 싱겁게 밝혀질 때도 있고, 비밀을 여태 감춰놓고는 끝내 밝히지 못하는 부분도 있지만, 이런 비밀들은 나중에 후속편에서 차차 나오리라 생각된다. 원작 소설 1~11권 중 1~3권까지만의 내용을 영화로 만든 건데, 설마 나중 내용은 만들지 않고 여기서 시리즈를 접으랴.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이 영화만의 특징이 몽환적이고 시대를 알 수 없는 영상이다. <반지의 제왕>처럼 아예 새롭게 만들어놓은 가상의 세계도 아니고, 분명 차도 있고 무선 리모콘도 있고 무전기도 있어서 요즘 시대인 건 알겠는데, 인물들의 의상하며 집안 풍경이 한 1~200년 정도 전인 거 같은 인상을 준다. 배경이 되는 곳의 구체적인 지명이나 주소도 일체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시대를 가늠할 수 없는 영상이 오히려 영화의 판타지적인 느낌을 더 살려주지 않았나 싶다. 거기에 음울하면서도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영상은 팀 버튼이 만들지 않았음에도 팀 버튼의 스타일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아무래도 미술(릭 하인리히), 촬영(엠마누엘 루베츠키), 의상(콜린 앳우드) 등 팀 버튼과 많이 작업한 스텝진들이 제법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암튼 이렇게 팀 버튼 색깔이 어느 정도 밴 듯한 영상은, 스펙터클한 느낌은 없어도 참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많은 면에서,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은 '별종' 어드벤처다. 배경이나 주인공의 상황은 한없이 암울하면서도, 악당이라는 작자는 무섭다기보다는 웃기고, 거기에 영상은 참 아름답다. 이렇게 정통 판타지 어드벤처와는 삐딱선을 타고 있는 점들이 많지만, 오히려 이런 점들은 숙지해두고 영화를 본다면 쏠쏠한 재미가 있을 것이다. 나도 이런 팀 버튼 스타일의 영화가 취향이어서 그런지 상당히 재미있었으니까. 결론적으로,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은 진부하면서도 개성이 있는 외적 스타일처럼, 뻔하면서도 흔치 않은 재미를 주는, 꿋꿋이 색다른 길을 가는 별종 어드벤처다.
Tip 1 :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예술이다. 마치 종이로 하나의 애니메이션을 만든 듯, 삼남매의 모험을 따라가는 엔딩 크레딧이 영화 본 편 못지 않게 보는 재미를 더한다.
Tip 2 : 이 영화에는 또 한 명의 연기파 명배우 카메오가 등장한다. 누군지 이미 아시는 분은 어쩔 수 없지만, 모르신다면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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