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릭은 자칭 '떡대좋은 못생긴 괴물'이다. 숲의 늪에 집을 짓고 아무도 자신을 방해하길 바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어느날 말많은 당나귀의 출현과 함께 백작의 명령으로 추방당한 동화나라 사람들이 집앞으로 몰려온다. 왕이 되고자 하는 백작과 자신만의 늪을 되찾고자 하는 슈렉의 계약으로슈렉은 공주를 구하러 성으로 향하고 전혀 로맨틱하지 않은 기사로써 공주를 데리고 성까지 온다.
전체 줄거리는 슈릭이 공주를 구해오는 얘기지만 실상 자세히 들여다 보면 전혀 다른 스토리의 맥을 찾아낼 수 있다.
공주를 구하는 것은 이야기의 전개를 위한 구조적인 장치일 뿐이고 정작 슈렉 자신의 관심사는 자신의 늪지를 되찾는 것이다.
<왜, 슈렉은 자신의 늪지에 대해 지나칠 만큼의 애착을 보이는 걸까?>
슈렉은 바로 우리들의 숨은 모습이다. 남이 침범하길 허용하지 않는 자신만의 공간을 지켜가기 위해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자신에 대한 환상을 과장하고 더 끔찍한 괴물로 만듦으로써 스스로를 지켜나가는 슈릭. 이렇게 슈릭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내모는 것은 종이에 쓰여진 대로 반응하는 우매한 군중과 괴물사냥을 하는 평범한 다수의 폭력이다. 눈에 보이는 겉치레로만 판단하고 조금이라도 다른것에 대해선 지독하게도 배타적인 우리가 서로를 향해 자행하는 잔인성인 것이다. 예쁘지 않은 우리의 단면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숲속의 슈렉의 오두막 처럼 완전히 은폐당하고야 만다.
<왜 유독 팥쥐의 얼굴에만 주근깨가 있는걸까?>
또 하나 눈여겨 볼 것은 이 만화의 어느곳에도 폭력성이 내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공주를 사랑하지만 정작 별 상관도 없는 백마탄 왕자에게 그녀를 보내야만 하는 난쟁이의 숨은 아픔 같은 전형적인 비극을 완전하게 보상하고 있다. 심지어는 성을 지키는 마법의 용에게조차 이 영화는 관대했다. 용감한 왕자의 칼부림에 동강나는 흉측한 몰골의 용이 아닌 당나귀와의 로맨스로 또 하나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핑크색 용은 또 하나의 슈렉으로 이 영화의 주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낮에는 아름다운 공주. 하지만 밥에는 괴물으로 변하는 마술'에 걸린 공주가 지는 태양아래서 자신의 비밀을 들어내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름다움을 얻어 '괴물'로 변하는 장면으로 모든 메세지는 정점에 이른다. 슈렉을 괴물이라 비난하며 백마탄 왕자를 기다리던 낮의 공주가 아닌 '사람들은 나의 겉모습만 모고 나를 비판하지.' 란 말에 조용히 시선을 줄수 있는 또다른 공주야 말로 공주안에 내제된 진정한 아름다움 이었던 것이다.
콩쥐나 팥쥐. 신데렐라를 통해 봐 왔던 "예쁜 것은 선하고. 선한 것은 결국 행복을 얻습니다." 따위의 거짓 환상을 이 에니매이션은 아주 평화스럽게 부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