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이 영화를 상당히 기대해 왔다. 솔직히 이전엔 그저 지나가는 화제거리로 이 영화에 대한 소식을 접했었는데, 갈수록 국내외에서 화제의 중심이 되고, 사회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알게 되고 부터는 왠지 모를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결국은 최근의 나의 기대작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어제 미리 가서 예매까지 하는 열의(?)를 보인 후 오늘 드디어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역시나 교회를 다니시는 분들이 많이 오신 거 같았다. 최근 헐리웃 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다양한 연령층이 있었다. 나같은 젊은 층에서부터 30~50대의 중년층, 나아가 60~70대의 어르신 분들까지 계셨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기독교 신자인 듯 보였다. 미국에선 18세 이상 관람가인 R등급을 받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생애를 다룬 만큼 다양한 연령층의 관객들이 온 것이 상당히 이채로웠다.
본격적으로 영화 얘기로 들어가 보겠다. 영화의 줄거리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예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인 유다는 은전 30냥에 자신의 스승인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밀고한다. 예수는 자신을 잡으러 온 로마 군사들에게 저항 하나 없이 순순히 자신이 '그'라면서 체포에 응한다. 예수는 체포되어 재판장으로 끌려가는 순간부터 로마 군사들로부터 구타를 마구 당하고, 이를 보며 심한 죄책감을 느낀 유다는 자신이 일러바친 제사장에게 돌아가 돈을 돌려주겠다면서 예수를 풀어달라고 부탁하지만 거절당하자 그 죄책감때문에 미친 사람마냥 허깨비에 시달리다가 자살한다. 이윽고 예수는 빌라도 총독에게 재판을 받게 되는데, 그는 예수의 죄가 없다고 생각하고 풀어주려 하지만 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라면서 심하게 반발하고, 빌라도는 헤롯 왕에게 판결을 맡기지만 헤롯 왕이 판결을 미루자 빌라도는 우선 체벌만을 명령한다. 그러나 악마에 홀린 듯 때리는 데에 재미를 붙인 로마 군사들은 예수를 단순히 체벌만 가하는 것을 넘어 죽음 직전의 상태로 몰고 간다. 가까스로 구타가 멈추고 빌라도는 만신창이가 된 예수를 유대인들에게 보이며 '이 정도면 충분치 않은가?'라고 묻지만 유대인들은 더욱 흥분하며 십자가에 못을 박으라며 반발한다. 계속 고민을 하던 빌라도는 감옥에 갇혀 있는 살인마 바라바를 데려다 '이 자와 예수 중 누굴 풀어주랴?'하며 묻지만 유대인들은 끝까지 바라바를 풀어주라며 예수의 처형을 원한다. 결국 그들의 요구에 못 이겨 빌라도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결정하고, 예수는 가시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나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한다.
보고 나서 처음으로 느낀 생각이, '참 뭐라고 딱 표현하기가 힘든 영화'라는 점이다. 보통 지어낸 사실인 '허구'를 다루는 영화와는 달리 이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사람, 거기다가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신으로 받들며 섬기는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한 번 보고 무작정 '걸작이다', '졸작이다'라고 평가하기가 상당히 뭐했던 것 같다. 실제로 이전에 각종 언론 매체로부터 영화적인 면에서는 허점이 많은 영화라는 말들을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허점을 쉽게 느끼지 못했다. 아마도 전체적인 영화의 분위기에 지레 압도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실, 이 영화를 볼 때 나의 태도는 다른 영화들을 볼 때의 태도와 사뭇 달랐다. 기독교 신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는 나의 태도는 상당히 엄숙했다. 그저 팔짱끼고 영화의 허점들을 가끔씩 집어내는 태도가 아니라, 그저 영화 속으로 들어가서 예수의 여정을 따라가는 것에 집중했다.
우선 이 영화는, 역시나 들어온 대로 표현이 놀랍도록 사실적이다. 이제껏 그저 인자하고 깨끗한 모습만 영화속에서 보이던 예수가 이 영화에선 거의 영화 내내 피투성이로 등장한다. 옷이 아니라 살이 말그대로 '누더기'가 되어 있는 모습으로. 재판과 형 집행 과정에서 그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눈을 질끈 감게 만들 만큼 사실적이고(물론 난 눈을 감지 않았다. 왠만한 폭력에 무덤덤해진 것인가...ㅜ.ㅜ), 그 폭력때문에 영화는 시종일관 유혈이 낭자하다. 특히나 체벌을 받는 장면에선 쇠가 달린 막대기가 예수의 몸을 철썩철썩 때리는 모습이 극히 사실적으로 다가왔고, 체벌 후에 사방에 피가 뿌려진 형틀 주위의 모습은 소름을 끼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십자가에 누워 손에 못이 박히는 장면이 나올 땐 많은 관객들이 탄성(와...가 아니라 어우...)이 나왔다. 사실 왠만한 영화 속 폭력을 견디는 나로서도 이 영화의 폭력은 잔혹성을 넘어서 그 처절함에 절로 충격이 전해 왔다.
다음으로 배우들의 연기를 보자면, 우선 예수 역을 맡은 짐 카비젤에게 진짜 기립박수를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연기파냐 아니냐를 떠나서 영화 속에서 그만큼의 폭력을 견뎌내는 모습을 보여준 자체가 배우로서 대단한 시도라는 생각이 든다. 로마 군사들로부터 끝없는 구타를 당하고, 손에 못이 박히고, 십자가에 피투성이가 되어 매달리는 그의 모습은, 정말로 당장에 달려가 병원에 데려다 주고 싶을 만큼 처절함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그가 영화에서 보여준 이런 열의가 담긴 모습은 내가 아카데미 심사위원이라면 당장에 남우주연상을 주고 싶을 정도로 호소력이 강했다.그러나 이 영화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그런 처절한 모습만은 아니었다. 이 영화를 찍을 당시 이 배우가 예수가 죽을 당시의 나이와 같은 33세였다고 하는데, 그 이유 때문인지 그가 보여준 예수의 모습은 뭔가 사뭇 달랐다. 눈빛부터가 상당히 깊고, '현명해' 보였다. 무언가 슬픔을 담고 있는 듯하지만 동시에 무언가 큰 진리를 깨달은 듯한 그런 모습이 한결 예수의 모습에 가깝게 표현된 원동력이 아닌가 싶다. 성모 마리아 역의 마이아 모겐스턴의 연기 또한 상당히 깊은 울림을 선사했다. 이 배우는 솔직히 많이 본적이 없는 배우인데, 그만큼 그녀가 연기하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 한결 잘 몰입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유명배우였다면 그 배우 특유의 이미지때문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을 듯) 인류 역사의 손꼽히는 성인을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한없이 감싸고 아들이 극한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한시도 놓치지 않고 곁에서 눈물로 지켜보는 그 모습은 다시금 모성애의 위대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개인적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던 예수가 쓰러진 모습을 보고 어린시절 예수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에게 달려가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은 영화 내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였다. (어머니도 같이 영화를 보셨는데, 어머니께선 성모 마리아가 나오는 장면마다 눈물이 나오더라고 하셨다) 모니카 벨루치 또한 그녀의 결코 거부할 수 없는 미모를 과감히 포기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이 영화의 출연을 자청했다고도 하는데, 그녀의 열의가 있어서인지 성모 마리아 옆에서 애처로운 눈빛으로 예수를 쫓아가는 그녀의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으로 보였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혹은 가장 특이했던 건) 영화 특유의 잔혹함이 특이하게도 감동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중간에 빌라도의 명령에 따라 예수가 형틀에서 체벌을 당하는 장면. 만약 다른 영화, 다른 사람이 그런 매를 맞는 장면이었더라면 많은 사람들이 눈을 가리면서 충격만을 받았을 것이다.(물론 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는 관객들 중 일부도 그랬으리라) 그러나 이 영화에서 관객들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영화 속 예수가 당하는 폭력의 잔혹함이 단순히 눈요기의 대상이 아닌 그가 인간으로서 받은 고통의 강도가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 보여주는 수단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실제도 나도 그 장면을 지켜 보면서 '너무 잔혹하다'는 생각이 들기보단 '정말 고통스럽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만큼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폭력은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수준은 아닌, 단지 예수가 받은 고통을 그대로 전달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감정의 울림을 격화시키는 하나의 수단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받은 엄청난 고통이 결국엔 죽음 직전에서 그의 용서로 마무리되고, 극한의 폭력을 당한 뒤에 내뱉는 한마디 '다 이루었도다'가 결정적인 감동을 분출시키는 것이다.
사실 영화적으로 봤을 때 이 영화는 의외로 허점이 많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이 영화를 보며 느꼈던 건, 예수의 일대기를 그토록 영화로 만들고 싶어 했던 감독 멜 깁슨의 진지한 태도가 영화 속에서 묻어난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극사실적인 폭력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강렬하게 표현하는 수단이 되고, 관객도 그러한 강렬함에 절로 압도되어 영화의 카리스마에 쉽게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러한 카리스마는 결국 영화를 한층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밑바탕을 마련해주지 않나 싶다. 신자냐 비신자냐의 여부를 떠나서 이 영화는 한번 봐두는 게 좋지 않나 싶다. 신자라면 왜 그를 믿어야 하는지를 더욱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고, 비신자라면 그를 많은 사람들이 믿게 만드는지, 그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를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번 보는 건... 글쎄... 영화가 내뿜는 카리스마가 워낙에 강렬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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