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본 'Dangerous Liaisons' 원작의 영화들 중 가장 웃기고 가장 야했습니다. 영화의 중반까지는 흡사 이대근 주연의 토속에로물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지요. 작업 도중 능청스럽게 내뱉는 의고체의 대사들은 딱히 웃어야할 장면도 아닌데도 웃게 만들더군요.
하지만 극이 종반으로 치달으면 제가 본 'Dangerous Liaisons' 원작의 영화들 중 가장 말랑말랑해지고 로맨틱해집니다. 배용준과 이미숙은 원작대로 끝까지 갈등관계를 유지하지만, 스티븐 프리어즈의 'Dangerous Liaisons' 에서 묘사되는 그 숨막힐듯한 긴장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특히 실망인 부분은 밋밋한 캐릭터라이징입니다. 존 말코비치가 연기한 'Dangerous Liaisons' 의 발몽 역시 윤리적 인간형이긴 합니다. 키아누 리브스의 칼에 찔려 죽으며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기 바로 전까지도 그는 Merteuil을 향한 끓는 정염과 뒤늦게 찾아온 낭만적 연애감정을 모두 끌어안고 위험한 에너지를 내뿜는 복잡한 캐릭터였습니다. 하지만 <스캔들>의 배용준은 그런 복잡함이 없는 평면적인 캐릭터지요. 전반부는 오입쟁이였지만, 후반부는 이루지못할 운명의 사랑에 빠진, '돌아온 탕아'입니다. 칼맞은 그 자리에서 깔끔하게 죽는 존 말코비치와 피 질질 흘리며 말등에 올라타 한양서 강화까지 님을 만나러가다가 비명횡사하는 배용준은 그 신파성에 있어 큰 차이를 보입니다.
평면적인 캐릭터라이징은 이미숙 쪽이 더 심합니다. 이미숙은 정말 좋은 느낌의 배우이지만, 'Dangerous Liaisons' 에서 글렌 클로즈가 보여준 그런 압도적인 사악함은 보여주질 못했습니다. 이건 이미숙의 잘못이라기보다 감독 이재용의 잘못 같습니다. 등장 인물들의 갈등의 원인과 그에 대한 반응들을 너무 이해하기 쉽게, 너무 뻔~하게 한정지은 것이지요.
세심하게 준비된 영화의 소품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볼거리 중 하나입니다.(다른 큰 볼거리는 여인네들의 나신이거나 배용준의 엉덩이겠지요.) 하여튼 재밌는 영화였습니다. 줄거리 다 알고 보는 탓에 긴장감은 떨어졌지만, 유럽제 치정극이 조선시대로 이식되어 나름의 설득력을 갖는 영화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음미하는 것은 색다른 즐거움이었습니다.
동숭씨네마텍의 좌석은 아주 거지같습니다. 앞좌석 머리통에 화면 하단이 2/5는 가릴 정도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