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사랑을 갈라놓을 수 있을까요? 혹은 사랑은 죽음조차 극복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우리들,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사는 저 같은 사람들은, 그런 문제를 고민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랑 자체가 중요하지 거기에 죽음이 어떤 방식으로든 끼어드는 경운 드무니까요. 예컨대 시한부 인생인 줄 알고도 그 사람을 사랑한다... 이러기 쉽지 않고 내 연인이 시한부임이 밝혀졌다... 이런 것도 확률이 적은 편이잖아요. 그래서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이 사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런 소재가 횡행하는 것 같습니다. 일례로 최근에 종영한 드라마들도 그런 경우 아닐까요? <완전한 사랑>이나 <로즈마리> 같은 것 말이죠. 하긴 윤석호 드라마도 첫사랑과 운명적 사랑 운운하다가도 그 사랑을 모두 극복한 연인 중 하나가 죽는 걸로 등장하는군요. 그만큼 매력적이란 소리겠죠. 사랑의 순결성, 절대성에 대한 질문을 하는 방식으로서 말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글쎄요, 차인표의 죽음이 너무 과하지 않나 뭐 그런 생각이고 <로즈마리>는 과격하진 않은 대신, 너무 잔잔해서 너무 일상에만 주목해서, 송지나라는 작가에 대한 기대치에 못미친다는 게 개인적인 소감입니다. 윤석호 드라마야 이젠 뻔하다 못해 지겨울 따름이죠, 뭐.
그런 의미에서 <8월의 크리스마스>는 정말 ‘난 놈’ 같아요. 저는 허진호 감독의 두 영화 중에 <봄날은 간다>보다 <8월>을 더 좋아하는데요. 그렇게 극적인 것도 없이 담담하게 풀어가는 영화가 남기는 여운...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녀(심은하) 때문에 살고 싶었던 남자, 그렇다고 그(한석규)는 발악하진 않습니다. 그저 담담히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겠다고 마음을 정리할 뿐입니다. 그녀가 하는 최고의 반항이 사진관의 유리창을 깨는 것입니다. 그녀는 평생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를지도 모릅니다. 혹은 몇 십 년이 흘러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서야 알게 될지도 모르겠죠. 그녀에게도 결국 좋은 추억이 될 사랑 아닐까요? 안타깝긴 하겠지만 이미 지난 사랑은 아름답게 여겨질 뿐입니다. 시간은 고통도, 상처도 모두 퇴색시키고 미화된 기억으로 남기는 법이니까요.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그것의 최고치는 추억입니다.
그런데 <빙우>에선 추억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녀(김하늘)는 이미 정리한 사랑을 위해 목숨을 끊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고층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했던, 자신을 사랑했던 남자가 보는 앞에서 말입니다. 그것도 그(이성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죽음으로 사랑하는 이의 삶을 지속시킵니다. 그가 사랑하는 공간 산에서요. 그 기억은 그에게 추억이 되지 않습니다.결코 추억이 될 수 없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잦아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아픈 생채기가 되어 살아납니다. 그렇게 견고했던 그의 마음도 일상도 모두 무너지고 그는 결국 그녀를 찾아 떠납니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했던 또 한 남자(송승헌)를 만납니다. 그녀를 안타까운 추억으로 남겨두었던 또 다른 남자는 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그는 압니다. 자신의 냉정함을 가장한 우유부단함이 한 여자를 죽음에 몰아넣었고, 다른 한 남자의 가슴에 상처를 남겼다는 것을. 그는 결국 자신의 죽음으로 상처받은 한 남자를 살리기로 합니다. 물론 그녀 곁에 남고 싶은 마음도 크겠지만. 그녀는 이미 과거의 사람이고, 또 한 남자는 현실의 사람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에게 느낀 우정, 묘한 연대감, 호감이 그녀를 둘러싼 탓도 있었지만, 또 한 남자에 대한 미안함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에 대한 우정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빙우>를 보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게, 혹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게 혹은 그런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저와는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 신문에 해외토픽 감으로 날 것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사랑이 절박하면, 혹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 사랑이 식지 않았다면 죽음을 택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빙우>는 제게 사랑의 한 측면에 대한 깊은 이해를 안겨준 영화입니다. 그래서 산악 장면이나 약간은 거추장스런 컴퓨터 그래픽을 눈감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단점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요. 솔직히 그런 사랑을 만나고 싶지는 않습니다. 중현이나 경민처럼 죽음을 택하게 될까봐 문득 두렵습니다. 가늘고 길고 모질게 살며 삶의 희로애락을 느끼고 싶은 저는 그저 보통사람일 뿐이니까요. 저와는 다른 사랑의 방식, 삶의 방식을 택한 그들... 그들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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