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부르는 경주마, 인간의 모습 닮다 -영화<씨비스킷>, 아날로그 영상의 흑백다큐 연상
그다지 큰 기대없이 봤기 때문일까, 영화가 가져다 준 감동은 더욱 컸다. 영화 <씨비스킷>(게리 로스 감독)의 배경이 된 1930년 대 미국의 모습이 2003년 우리나라의 현실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경제공황으로 늘어난 실업자와 그로 인해 희망과 미래를 잃어버린 시대에 한 마리의 경주마는 절망을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 따스한 미래를 보여준다.
영화가 주는 세 가지 형태의 카타르시스가 있다고 한다. 인간적인 감동을 주거나 별난 재미, 혹은 여운을 남기는 메시지를 전하는 등의 방법으로.. 대개의 영화가 위의 세 가지 범주에 속한다면 경주마가 주인공인 이 영화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감동을 준다.
경주마 씨비스킷 외에도 기수 레드(토비 맥과이어), 마주 찰스(제프 브리지스) 그리고 조련사 톰(크리스 쿠퍼)까지 서로 닮은 이들 세 사람은 절망 가운데 희망을 부른다. 사춘기 시절 불어닥친 경제 공황으로 부모와 생이별한 레드, 그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란 없어 보인다. 낮엔 기수로 밤에 도박복싱으로 방황을 하던 레드는 한 쪽 눈마저 실명한 채 씨비스킷과 만난다. 부모로부터 말을 조련하는 재능을 물려받은 그는 역경의 시대에 민중들의 희망이 되었던 경주마를 이끄는 기수가 된다.
자동차라는 발명품으로 인해 백만장자가 된 찰스는 한 순간에 아들을 잃고 그가 가졌던 행복을 모두 잃어버린다. 톰 역시, 당대에 잊혀져 가는 직업군의 하나인 말 조련사로 병든 말들을 돌보고 있다. 전설적인 경주마 태생이라는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작고 왜소한 이 경주마는 치료하면서 눈여겨 본 톰에 의해 찰스와 만나게 된다. 이들이 드디어 하나가 되어 희망을 일구어낸다.
한쪽 다리의 장애를 가진 적은 체구의 경주마 '씨비스킷'과 한쪽 눈과 한쪽 다리의 장애를 이끌고 경주에 참가한 레드는 대공황으로 황폐해진 미국 서민들의 삶에 희망이 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서부의 모든 경주를 석권하면서 씨비스킷은 서부의 유명한 경마대회를 모두 휩쓸 뿐 아니라, 동부의 명마 '제독'과 일대일의 경주를 꿈꾸기에 이른다.
과연, 씨비스킷이 부상당한 레드 대신에 나선 기수와 명마 제독을 물리치고 영광을 일궈낼 것인가.
전작 <플레전트 빌>(1999년 제작)에서 소외된 현대인들의 현실과 이상을 각각 흑백과 칼라라는 이원화된 세계로 나타내 소박한 삶의 중요성을 일깨웠던 게리 로스 감독은 4년만에 영화 <씨비스킷>을 내놓으며 마이너들의 삶을 통해 희망찾기에 나선다. 전작에서 행복을 강조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희망과 꿈을 이야기한다.
영화는 디지털 시대와 정반대의 빛바랜 흑백 사진들을 통해 향수어린 과거의 추억과 당대의 시대상을 표현해내며, 탄탄한 스토리텔링과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듯한 사실적인 표현 기법을 사용해 거대한 스펙터클과 화려한 영상을 주무기로 하는 최근 국내외 영화들과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영화 내내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경주마와 경마장 트랙은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메시지 위주의 영화에 사건의 전개에 긴박감과 현장감을 동시에 제공한다. 실제 경마장에서 마권을 사서 베팅에 참여한 사람처럼 관객의 시선이 닿는 경주마의 박진감있는 승부는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든다.
영화 속 경주 중계를 맡은 수다스러운 아나운서를 연기한 윌리엄 H. 메이시는 작은 스튜디오에서 갖가지 도구를 사용한 음향을 만들어 코믹한 분위기로 영화의 감칠맛을 더하고 있다. 2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내내 지루함을 느끼지 못한다.
자칫 안락사 될 수도 있었던 경주마 '씨비스킷'은 현실의 장애로 결코 미래를 포기할 수 없음을 일깨워준다.
경주마와 함께, 인생에 도박을 건 찰스는 마이너에 따스한 관심을 갖는다. 한 쪽 눈의 시력을 잃은 레드가 말에서 낙마해 더 이상 회생의 가능성을 보이지 않을 때에도 그는 그에 대한 신뢰감을 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경주에서도 씨비스킷이 경쟁마의 눈을 주시하게 해 '씨비스킷'에게 전적으로 맡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신뢰감을 받게될 때 이토록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걸까. 영화 <씨비스킷>은 대상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소중한지 보여주면서 포기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노력을 아끼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는 듯하다.
톰 : 인생을 접고 싶을 때 다시 일어나게 해줬거든요 찰스 : 인생을 접고 싶을 때 당신도 일어났잖아요 다 포기하면 그게 인생입니까? 조금 상처를 입었다고 해서 인생을 포기할 수 없어요
영화 속 톰과 찰스의 대화처럼 청년 실업, 카드빚 등 매일 접하는 우리들의 우울한 소식 속에 <씨비스킷>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한줄기 소박한 희망을 전하고 있다. 영화 <씨비스킷>은 11월 21일 개봉.
2003/11/13 오후 3:47 ⓒ 2003 OhmyNews /정선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