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시작한다. 미숙(심혜진)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기이한 아이의 그림이다. 아이의 그림으로 생각되지 않을 만큼의 묘한 공포 이미지를 보여주는 그림은 누군가의 시선을 잡아끌었으니 그 그림을 그린 아이는 자신에게 말을 건네주기를 바랬을 것 이다.
"이건 무엇을 보고(생각하고) 그린거니?" 이런 질문으로 시작하는 대화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건 관심의 시작이고 관계의 모태가 되기때문이다.
딱히 영화장르를 분류하자면 공포이고 더 파고들어가면 심리 공포물이고 더 세밀하게 표현하자면 가족잔혹극이라고 말해야 할 듯 싶다. 그러나 엔딩 화면에 스탭들의 이름이 자막으로 올라가는 동시에도 장르적 정체성을 깨닫지 못하고 표류하는 배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슬픔이 공포로 바뀌는 가족의 일그러진 시선이 나를 의자 깊숙히 몸을 옹그리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심리(감독 스스로 벗어내지 못했던 관객의 심리를 움직여야 한다는 욕심)적으로 가족의 잔혹함에 공감하지 못한 내 미련한 마음 때문이었나보다.
아이 없는 것 빼고는 부족한 것 없는 상류층 가정에 아이가 입양되었으니 외관상으로는 누구나 꿈꾸는 이상적인 가정 구성원을 채운 듯 하다. 거기서 부부가 진짜 아이를 임신함으로써 벌어지는 기이한 공포의 행렬은 충분히 매력적인 소재임에는 분명하다. 여기다 굳이 딴지를 들자면 나를 둘러싼 최소한의 구성 요소인 가족에서 공포를 창출하는 이야기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올해 들어 3편째이다. <장화홍련>이 기억에 의존한 가족의 진실이라면, <4인용식탁>은 가족간에 대화의 단절에서 얻어지는 심리적 공포를 표현한 영화이다. 그렇기에 <아카시아>가 보여주려는 가족심리공포는 색다르게 다가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맹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관객은 가족공포물에 대한 예습을 올해 충분히 했다는 소리이다. 그러기에 박기형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관객은 그리 어렵지 않게 간파하고 가족이라는 근원적인 구성원들이 만드는 심리적 동요를 즐기고 싶은 준비된 자세를 갖추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심리공포라는 말이 낯설지 않게 들리는 요즘, 공포의 대상이 뚜렷하게 나온 공포영화는 이제 관객의 오감을 만족 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요즘 공포 영화는 하나의 트랜드처럼 일상에서 느끼는 심리적 불안감을 공포로 형상화한 심리공포물에 더 후한 점수와 작품의 질을 논의하기를 즐겨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면에서 <아카시아>는 예습을 많이 한 관객들에게 적지 않은 실망감을 먼저 준다. 심리공포영화를 즐기는 방법을 잘 알고 관객에게 박기형의 영화 문제는 너무나 친절(쉬웠다는 소리다)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올해 마음에 드는 한국 공포영화를 못 만난 나로서는 심리라는 두 글자를 앞에 내세운 영화치고 아니 가족의 이중성을 그린 영화치고 그것을 제대로 공포로 탈바꿈한 영화를 못 만난 비운이 있어 더더욱 그러하다. 심리 공포영화는 하얀 백지 위에 관객이 마음대로 원하는 공포이미지를 그리는 영화이다. 그러나 <비밀>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여고괴담>보다 더 무게 있게 심리공포를 그리고자 했지만 그리 좋은 성과를 못 거둔 그는 방향을 약간 선회해서 아카시아라는 나무가 가지는 기묘한 이중적인 모티브를 상징화 시켜서 가족의 잔인한 면을 보여주고자 한다. 심리의 상상에 의존하면서도 공포의 대상을 일단은 그려놓고 시작한다. 그러기에 끌어내기 어려운 심리공포의 표현양식보다는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표현하기에는 더 쉬웠을지 모르지만 예습을 많이 하고 온 관객에게는 막상 대면한 박기형 영화문제는 너무 쉬워서 허탈감이 먼저 든다.
핏줄에 집착하는 이 사회에 가족의 모순을 공포로 포장하기전 그가 건네 관객과의 커뮤니케이션의 시도는 슬픔이다. 아이가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문제라면 부모도 자식을 선택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미숙의 시선에 진성의 그림이 먼저 들어왔듯이 진성과의 시작도 관계가 아니라 선택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점이 영화의 공포가 되는 토대가 되기에 진성과 미숙의 핏줄이 제외된 부모자식간의 관계는 슬프게 묘사되고 그려진다. 슬픔이 응축되어 공포로 형상화 되는 과정은 지루하지만 감독의 세심함 이려니 하고 보면 참을 만하다.(나름대로 여기까지 난 좋았다) 중후반에(진성이가 사라진 뒤부터) 들어와서부터, 영화는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감에 의해 점점 극도의 긴장 상태를 보인다. 서로가 시선을 맞추기를 꺼려하는 미숙, 도일 그리고 아버지는 무언가를 알고 있지만 침묵한다. 박기형이 제시하는 첫 번째 공포 테마가 핏줄에 집착하는 가족의 슬픔이라면 두 번째 공포테마는 바로 가족간의 의심과 대화의 단절이다. 침묵이라는 말로 달리 표현되는 이 두 번째 공포테마는 진성의 꿈에 나온 빨간 털실로 상징되는 핏줄에 대한 집착과 슬픔을 공포로 전환하는 반전의 시작이다. 하지만 반전이 이루어지기전 관객은 슬픔에서 분노로 감정을 전환하지 못했기에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을 지키려고 침묵하는 그들의 잔인성이 공포적으로 다가오지 못한다. 이런 감정의 전환을 끌어내지 못한 이유는 진성이가 사라진 그 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관객들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한 시간 가까이 영화의 앞부분에서 느리게 보여주면서 만들었기에 일단은, 예상한 문제였다는 것에 있다. 플래시백으로 표현된 현재와 과거(진성이가 사라진 밤)의 표현은 진실을 목격한 놀라움보다 이중삼중으로 정답을 가르쳐주는 효과이외에는 거둔 것이 없다. 무엇인가를 목격한 듯 보이는 옆집 소녀의 존재도 후반의 공포감을 감소시키는 역할로 한 몫을 할 따름이다. 심리적 불안과 그것을 대변하는 아카시아 나무에 얽힌 가족의 공포는 친절한 감독의 의지와 예습을 많이 하고 관객에게 의해 문제는 복잡한데 답은 간단한 수학문제와 같다.
공포감이라는 영화상의 감정은 영화가 픽션이기에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감독과 관객들이 이런 존재하지 감정을 영화라는 장르에 그리고 상상하는 것이다. 감독은 관객이 공포감을 느낄 수 있도록 상상의 장을 마련해주고 관객은 눈으로 보고 나름대로 이미지를 맞추어서 공포라는 존재하지 실체를 생물학의 피드백처럼 상상으로 만들어 나가는 유기적 관계이다. 그러나 이번 박기형 감독의 <아카시아>는 관객의 몫으로 남겨질 상상의 시간을 뺀 듯하다. 느리게 흘러가는 사건은 마지막 반전을 위해 마련한 준비물이라면 진성이네 가족이 그리는 공포 괴담은 관객 자신에게 투영시키는 효과를 보아야 한다. 그래야 감독이 전하고자 하던 그 공포의 감정(자신을 구성하는 최소한의 사회단위 가족의 진실)을 기분 좋게 즐길 수 있는데 필요치 않은 화면과 후반부의 설명하듯 보여주는 스토리 구조는 제3자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게끔 만든다.
샤말란 감독의 <식스센스>의 놀라운 마지막 반전은, 말을 적게한 감독의 연출 방식에서 효과를 본 케이스이다. 궁금한 것 없이 영화를 진행하다가 한번의 플래시백으로 모든 상황을 역전시키는 구성과 관객과의 대화보다는 관객으로부터 질문을 유도한 이 영화는 공포의 질을 한 단계 높였다. 그러나 <아카시아>는 감독 스스로 끊임없이 영화속에서 관객과의 대화를 시도한 반면 관객의 대답은 간단하다. 박기형 감독이 의도한 영화의 방향은, 가족들이 서로 이해하기 위해 관심어린 대화를 필요하듯이, 양질의 공포토대를 마련해서 마지막 장면에서 진실을 마주 했을 때 슬픔과 분노 그리고 공포감을 극대화 시키는 것 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의도는 확연히 보였지만, 너무 많은 말은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는 비유가 있듯이 진실은 처음부터 보였기에 관객의 일방적인 대화의 단절을 이끌어 낸 것이다.
영화는 예습이 필요 없는 2시간여의 다른 세상과의 조우이다. 올해 한국 공포영화는 가족을 공포의 소재로 끌어들여 가족의 구성원이면서도 고립되어 있는 우리의 자화상을 표현한 반면 심리적 동요감은 제대로 끌어내지 못했다. 결국 <아카시아>는 예습 한 것도 모질라 본 시험에 앞서 복습이라는 형태로 관객에게 다가갈 듯 하다.
나는 영화라는 선생님 앞에서 끊임없이 정답을 알고자 질문하는 학생이기에 많은 진실과 이해를 담고 있는 선생님에게 배우길 바랄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아카시아>는 질문을 유도하지 못하는 선생님으로 남아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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