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 들이 이 영화의 홍보화첩(포스터)을 보았을 것이요. 피로 물들인 듯 붉은 조씨부인 머리의 가체, 보랏빛 저고리와 진자주 치마위의 선홍색 옷고름, 흑색 저고리 바지를 입은 창백히 허연 남정내, 게슴츠레한 눈길에 등짝을 드러낸 여인네가 한데 어우러진 그 화첩말이요.
어허, 백의 민족이라는 말이 어찌 그리 무색해진단 말이오. 아무래도 이 영화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허여멀그레한 살내음나는 영화가 아닌가 했소이다. 하지만, 실상 영화속을 들여다 본 즉슨, 그러한 예측은 빗나가고 말았소.
그렇다고 은근히 기대한 염려스런 장면이 아니 나오는 것은 아니었소. 오호, 시대가 조선시대라고는 하였으나 조선남녀의 눈빛은 오히려 작금 남녀의 그것 보다 더욱 음탕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살섞은 남녀라면 누구나 '통'하였을 오랄섹스 (이 말은 우리말로 차마 표현하기 힘드오이다)는 보는 자들의 목청을 꼴깍대게 하였다오.
그러나, 이 영화는 이미 네번이나 영화로 제작된 전례가 있는 쇼데를로 라클로의 원작 - 위험한 정사 - 에 충실한 듯 하니, 사랑에 눈떠가는 각기 다른 남녀 군상들을 잘 포착 하고 있는 것 같소이다. 사촌인 조원을 향해 깊은 상처같은 연정을 지닌 조씨부인의 삐딱한 사랑과 질투도, 세상과 섞이지 못한 분풀이를 여인내와의 살섞음으로 하세월하던 조원이 진정한 사랑 을 향해 눈떠가고 몸떠가는 과정도, 능숙한 조원의 작업에 넘어가 다과상에 놓여있던 석류의 붉은 속살마냥 맘과 몸이 열어 제쳐진 정숙한 숙부인도, 호기심 많은 16세 나이에 중늙은이에게 첩살이 와서 이웃집 도령에게 맘 뺏기고, 능숙한 조원에게 몸 맡겨진 기구한(?) 운명의 소옥도,
모두들 이 영화를 캐릭터 영화로 불러도 될 만큼 입체적으로 만들어 내고 있었소이다.
내 진작에 듣기로는 제작비 60억냥 중에 30억냥을 디자이너 정구호란 작자가 아낌없이 썼다고 합디다. 조씨부인이 기거하는 부용정 세트를 짓는데만 강남 중소형 아파트 한채 값이 들어갔다고도 하며, 이 세트가 실내에 있다는 것을 관객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수백 kw의 조명을 햇살처럼 쏟아부었다는 이야기하며, 겨울에 연못 뱃놀이 장면을 찍기 위해 베트남과 타이에서 뿌리채 공수해온 연꽃과 수련은 또 어떠하며, 모든 소품과 음식 들, 등장인물들의 심리상태 변화에 따라 계절 변하듯 자연스럽게 뽑아진 치마 저고리 색채의 다양함에 이르기까지 그 작자의 손길이 미침을 보아하니 탄식이 절로 나더이다. (그렇게 치밀할지언데, 숙부인 역의 낭자 목에 있는 까만 점은 왜 없애지 않은 것이오. 점을 보아하니 '접속'과 '해피엔드'에 나왔던 그 낭자가 아닌가하여 심히 불편하였다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미덕은 역시 사랑과 연정이요, 또한 이 영화의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조원이 아닌가 싶소. 이미 십수년전에 '그대를 만나 가장 어려운 일은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요, 그대를 만나 가장 쉬운 일은 그대를 보고 미소 짓는 일이오' 라는 뻐꾸기를 뭇소녀들의 가슴에 무책임하게 날려댄 화려한 필자의 화류계 경험에 비추어 보건데, 조원이 숙부인의 마음을 빼앗는 과정이나, 특히 숙부인과의 첫 살섞음을 묘사하는데 있어 무릅 탁 치게 하는 그 치밀함과 와닿음은 그러한 사랑을 해 보지 못한 자는 죽어다 깨도 모를 "체험, 삶의 현장" 바로 그것이었소. (시나리오를 쓴 자도 만만치 않은 작자임에 분명하오)
이 영화에서 사랑에 대한 냉소적이고 비열한 조원의 시선이 점차 한 여인으로 인해 가슴 절절하게 바뀌어 가는 모습은 사랑에 눈떠가는 이 세상 남녀의 진정한 자화상일게요.
남성이 여성을 처음 사랑함에 있어, 사랑보다 우선은 정복욕과 육욕에 눈이 멀어 있다는 것 쯤은 촌구석 숫처녀가 아닌 이상 다 알 것 이외다. 하지만 사랑의 칼날에 베어 본 경험이 있다는 작자들 조차 남에게 충고함에 있어 간과하는 것이 있나니. 여성이 사랑에 빠지면 흔히 나는 이제 니꺼요 하는 식의 저자세를 취하게 되기 쉬운데 이는 상대 남성으로 하여금 자신을 더 이상 오를 데 없는 신림동 관악산 같은 존재로 여기게 할 수 있으니 늘 남성에게 도도한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외다.
하지만, 필자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도 마찬가지오) 사랑은 결코 정복하는 일도 아니오, 정복당한 자가 손해보는 것도, 정복한 자가 승리하 는 것도 아니오. 비록 정복 당하는 쪽이 여성이요, 정복한 쪽이 남성이라 할 지라도 그 여성의 인품이 단아하고, 자신을 가꾸는 일에 소홀하지 않으며, 사랑하는 남성을 위하는 마음이 성심일진데, 그 남성이 정복욕에 취해 그 여성을 버린다 한 들, 남녀의 속성상 평생 그 남성의 마음속에는 화상같은 후회의 상처가 남을 것이요, 여성은 어느새 더 좋은 텃밭에서 꽃 피워질 것이기 때문에 사랑에 있어 승자는 결코 쟁취하는 쪽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더욱 아끼는 쪽에 있다는 것을 왜 모른단 말이요.
숙부인과 조원의 예에서 보여지듯, 사랑은 게임이 아니라 어느새 그리움의 빗물로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하는 마음 속 연못과 같은 것임을.. 쯧쯧.
비록 영화는 어느 샌가 비극적인 파국을 맞이할 차비를 하게 되고 세 주인공의 결말은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슬프고 가슴 아프게 표현되어 나름대로 흡족하더이다. 특히 숙부인이 사라진 곳에 조원에게 바쳤던 처녀성의 순수한 혈흔을 상징하는 선홍색 비단이 남은 것과, 질투와 욕정에 가득했던 조씨부인의 꽃잎이 바람과 함께 허무함으로 사라지는 것은 가히 이 영화의 아름다움을 흐트러트리지 않는 멋진 마무리라 생각되오.
그러나, 사극이라 어쩔 수 없었던 정적인 행동이나 차분한 분위기는 눈꼬리 연기만 으로도 객석을 쥐락펴락 하는 이미숙과 배용준의 훌륭한 연기와 부단히 노력한 카메라 의 움직임 (소옥이 조원에게 겁탈당했음을 조씨부인에게 고백하는 장면을 보자. 감독은 이러한 장면하나에도 지루함을 줄여보기 위해 잠시 앉아서 얘기하게 하다가 카메라를 빠져 나오게 하여 조씨부인으로 하여금 일어나 문을 닫게 한 뒤 또 잠시 서서 얘기하다가 다시 주저앉는 장면 등을 연출시켰다 ) 에도 불구하고 중후반부에 이르러 영화가 조금 지루하였음을 돌이켜 생각해 볼 때 15분 만이라도 시간을 줄였다면 어떠하였을까 사료되는바오.
끝으로 숙부인의 대사를 읊어보리다. "늘 지나가는 계절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나리를 사랑한 이 가을은 어찌도 이리 의미가 깊단 말입니까.."
Filmania crop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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