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라 봄바람>은 분명 관객들을 웃기려고 작정을 하고 만든 영화이다. 스크린 데뷔작인 <재밌는 영화>부터 코믹한 캐릭터를 구축해온 김정은과 자신의 필모그래피의 절반(14편에 출연)을 코미디 영화로 채워온 김승우, 그리고 <라이터를 켜라>에서 '웃기는' 능력을 인정받은 장항준 감독이 모여서 만들었으니 그 의도는 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요즘 충무로는 흥행장르의 다양화에 따라서 어느 해보다 다양한 영화가 개봉되었고,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불어라 봄바람>은 흥행이 보장된 장르인 '코미디'라는 열차에 슬그머니 몸을 싣고 있는 것이다.
돈을 아끼기 위해 한겨울에도 보일러대신 내복을 껴입고, 쓰레기 무단투기를 아침 운동으로 삼는 구두쇠 '선국(김승우)'의 집에 어느 날 한 여인이 세를 들어 온다. 얼마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몰래 부동산에 계약을 한 것. 작가인 선국은 집중을 위해 주위 환경에 민감하지만 어째 세입자 '화정(김정은)'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그녀가 이사오자 마자 한 말이 예술이다."전 화정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졸라 잘 부탁드립니다!"... 다방의 종업원인 화정은 이사온 첫날부터 친구들을 데려와 질펀하게 술판을 벌여 선국의 속을 뒤집어 놓는데.. 과연 화정은 선국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이 될 것인가 아니면 '뮤즈'가 될 것인가..
영화의 큰 줄거리는 간단하다. 보기만 해도 답답하고 한심해 보이는 한 남자에게 한 여자가 찾아온다. 그 여자가 남자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하는 것이 얘기의 전부이다. 하지만 여기에 여러 가지 양념이 곁들여진다. '선국'은 자신의 아버지를 두 집 살림을 한 난봉꾼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화정'은 어릴 적 버려진 가슴아픈 상처를 안고 살아온 여인이다. 이런 등장인물의 과거는 스토리 전개상 눈물샘 자극을 위해 깔아놓은 일종의 복선으로 작용을한다. 그리고 잔머리를 엄청 굴려대며 똑똑한 척을 하지만 결국 어눌하면서도 영악스러운 화정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는 선국의 반응을 보는 것은 하나의 재미이다.
<라이터를 켜라>에서 보여준 장항준 감독의 만화적인 상상력은 이 영화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간헐적으로 보여주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에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린다. 하지만 이 웃음이 박장대소가 아닌 실소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인지 몰라도 주성치의 영화와 상당히 닮은 점이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는 영화 중에 등장인물들이 '베사메무쵸'를 부르는 씬에서 절정에 달한다. 주성치의 영화들은 시작부터 끝까지 온통 만화적인 상상력과 어이없는 설정으로 관객들의 호응을 얻는다. 소위 매이나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주성치는 좋아하는 사람은 열광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거들떠도 안보는 그런 영화를 만든다. 아직 두 편의 영화밖에 만들지 않은 장항준 감독에게서 그만큼의 기대를 하는 것은 무리일지는 몰라도 <불어라 봄바람>을 보고있으면 여러 가지 영화를 섞어놓은 듯한 느낌이 든다. 분명 요즘 흥행하고 있는 영화들은 '웃기다가 울리는' 흥행 공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불어라 봄바람>은 이 공식에 무임승차하려는 것일까. 확실히 웃겨주지도, 또 눈물을 쏙 뽑아내지도 못하는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어째 앉은자리가 불편해진다. 장항준 감독은 갖가지 별볼일 없는 재료를 냄비에 넣고 끓이면 제법 그럴싸한 맛을 내는 '부대찌개'를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닌지..
이런 <불어라 봄바람>의 부족한 면에도 불구하고 이목을 끄는 것은 역시 배우들의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화정'의 연기를 하기 위해 강원도의 어느 다방에서 '레지 수업'을 받았다는 김정은, 신현준으로부터 '연기가 아닌 실생활 그자체' 라는 말을 들은 김승우의 자연스러운 연기는 든든한 캐스팅의 힘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여기에 곁들여지는 감초 연기자들의 연기도 반갑다. 극중 교회의 목사지만 욕을 거침없이 해대며 선국의 뒤를 쫓는 성지루와 '베싸메무쵸'를 느끼하게 부르는 변희봉 씨를 보는것도 볼거리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