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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희로애락 주는 사람, 불러줄수록 더 욕심나 <모가디슈> 허준호 배우
2021년 8월 5일 목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이끼>(2010) 이후 잠시 ‘연기 쉬는 시간’을 가졌던 허준호는 2016년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을 시작으로 <인랑>(2018) <국가 부도의 날>(2018) <천문: 하늘에 묻는다>(2019) <결백>(2019) <퍼펙트 맨>(2019)까지 크고 작은 한국 영화에 꾸준히 출연했다. 코로나19 전파 상황을 유심히 지켜봐야 했던 지난주 개봉해 기분 좋은 입소문을 형성하고 있는 류승완 감독의 <모가디슈>에서 그는 내전 상황을 탈출하려는 북한 대사 ‘림용수’역을 맡아 다시한번 호연한다. 평생 이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생존 위기 앞에서만큼은 식솔의 안위를 위해 자존심을 접고 남한 대사 ‘한신성’(김윤석)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인물의 깊은 속내를 품격 있게 표현한 “이 영화가 잘 됐으면 좋겠다”는 진솔한 욕심을 숨기지 않았던 그와의 대화를 전한다.

언론시사회 당일 완성된 영화를 보고 눈물 흘렸다고 했다.
간접적인 경험이었지만, 나도 20대 때 시위대 안에 갇혀본 적이 있다. 총탄이 오가는 현장은 아니었어도 최루탄이 가득했다. 광화문에서 집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다가 시위에 참석한 학생으로 오해받아 헬멧 쓰고 몽둥이 들고 (진압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몇 대 맞기도 했고. 그런 상황이 이어졌다가는 전쟁까지 갈 수 있겠다는 공포를 느꼈던 사람인지라, 내전 상황을 담은 <모가디슈> 화면을 보니 먹먹한 감정이 느껴지더라.

특히 어떤 장면에서 감정이 북받쳤나.
현지 어린아이들에게 총을 들게 했던 연출은 다시 봐도 먹먹했다. 아이 엄마의 절규 소리도 카메라에 담았었는데,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소름끼친다. 다만 류승완 감독님이 절제하느라 최종본에는 담지 않은 것 같다. 맨 마지막 비행기 신도 떠올랐다. 감독님이 아무 디렉션을 주지 않은 상황이었고, 성인 배우들도 에어컨 하나 없이 너무나 더운 비행기 안에서 연기하느라 힘들어 뭘 가르쳐줄 여력도 없었는데 함께 있던 아역 배우들이 (극 중 헤어짐을 직감하고) 엉엉 울더라. 그런 장면이 머릿속에 교차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시나리오를 받지 않고 작품 출연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오랜 배우 경력으로 ‘이건 흥행할 것’이라는 직감이 있었던 건가.
그런 직감, 전혀 없다.(흐흐) 잘 될까 안 될까 생각하기보다는 대본을 보고 재미있으면 고르는 편이다. 류승완 감독님이 작품 제안 건으로 식당에서 한번 봤으면 좋겠다길래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그냥’ 만나러 갔다. 오랜 세월 동안 못 보다가 다시 보는 거니까 설레는 마음도 있었고. 그때 <모가디슈> 내용을 얘기해주는데, 소말리아 수도에서 내전이 벌어졌고 당시 대한민국 대사관과 북한 대사관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는 거다. 처음 들은 이야기였다.

출연을 마음먹게 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두 시간이 금방 지났더라. 류승완 감독님이 작품과 그 준비 과정에 대한 설명을 잘 해줬고 그 점이 좋았다. 듣다 보니 희한하게 믿음이 생겨 빨리 결정을 내렸다. 사실 내가 거절을 잘 못 한다. 작품 하나 쓰는 데 1년 이상씩 준비하는데, 말 안 될 정도로 엉뚱한 작품이 아니고 재미만 있다면 출연하는 편이다. 하지만 대본은 받아 본다. <모가디슈>는 대본도 안 받고 출연을 결정한 첫 작품이다.

설명만 듣고 상상한 북한 대사 ‘림용수’는 어떤 인물일 거라고 생각했나.
대본을 받기 전까지는 ‘림용수’가 한국의 외교를 아주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쎈 놈’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지도 동적으로 연출될 거라고 예상했고. 그런데 대본을 보니 북한에서 나와 20년 동안 해외 생활을 한 사람이더라. 그렇다면 체제에서 조금은 자유롭지 않을까 싶었다. 어릴 때 배웠던, 북한 사람들이 서로를 감시하는 오호담당제도 떠올랐다. 그런 제도 안에서 나이 든 사람이라면 눈치가 빠르고, 말부터 하기보다는 저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저렇게 행동하는지부터 계산하는 능구렁이 같은 인물이 돼 있지 않을까. 처음의 내 상상이 많이 무너졌고, 대본에 의지하면서 캐릭터를 새롭게 만들었다.


‘림용수’는 내전 상황에서 북한 대사관을 약탈당하고 평소 경쟁 관계로 지내던 남한 대사 ‘한신성’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는데.
남한이 UN에 가입하지 못하게 하는 임무를 맡고, ‘한신성’에게 외교의 기회를 주지 않아야 하는 입장이었다가 생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탁을 해야 하는 거다. 살아서 모가디슈를 빠져나가야 하는 상황에는 이념이고 나라고 상관없이 내 식구들을 살려야 하니까. 그런 변화의 과정을 표현하는 게 내게는 숙제였다. 어렵기도 하고 잘 모르겠더라. 감독님의 디렉션에 많이 의지했다.

모로코 현지 로케이션을 무려 4개월 동안 진행했다. 1년의 1/4에 해당하는 긴 시간이다. 출연진 중에서는 유일하게 그 정도로 길고 규모 있는 로케이션 경험이 있다고 들었다.
로케이션 촬영한 전쟁 소재 작품만 서너 번 출연했을 거다. 필리핀, 태국 정글과 이탈리아, 미국, 일본 등 별 군데를 다 가서 촬영해봤다. 그때는 전반적으로 열악했다. (비용 문제로) 데려오지 못한 스태프 대신 배우들이 짐을 나눠서 들고, 촬영 허가를 못 받아 촬영 도중 기다리는 일도 많았다. 심지어는 한국에서 제작비가 조달되지 않아서 제작자가 경찰에 잡혀간 작품도 있었다.(웃음) 정지영 감독님의 <하얀 전쟁>(1992)이 그나마 베트남에서 좀 충분히 찍을 만한 여력이 됐던 것 같다. 그런 경험을 다 하고 <모가디슈>를 촬영했으니, 옛날 생각이 나면서 처음에는 좀 우려가 되기도 하더라.

그때와 많은 게 달라졌을 텐데.
어? 어? 어? 하다가 와! 로 변했다.(웃음) 이렇게 잘 준비된 프로덕션이라니. 모로코에 도착해서 촬영 현장까지 5~6시간 차를 타고 들어가는 비포장도로가 좀 힘들긴 했지만, 도착해서 현장을 구경하면서는 정말 깜짝 놀랐다. 꿈에 그리던 현장이었다. 단순히 과거보다 자본이 많아졌다는 정도로 표현될 일이 아니더라. 준비하는 과정과 그 역량을 보면 <모가디슈>가 내가 경험한 로케이션 현장 중 1등이다. 류승완 감독님은 현지 촬영에서 필요한 분, 초까지 다 계산한다. 그걸 보니 (과거에도 돈이 아니라) 사람이 문제였던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트 준비도 너무 잘 돼 있어서, 촌스럽게 아저씨처럼 세트 배경으로 사진도 많이 찍었다. (웃음) 소품, 의상, 분장까지 전부 잘 준비돼 있었다.


모로코 현지에서 기억에 남는 경험들이 있다면 공유해달라.
<모가디슈>에 어울리는 얼굴을 만들기 위해서는 얼굴 살을 빼야 했고, 그러려면 근력 운동을 많이 해야 했다. 그런데 동네에 헬스클럽이 거의 없어서, 비좁은 한 군데에 (영화에 출연하는) 3~40명의 외국 배우들이 늘 모여 운동을 하게 됐다. 같은 민족이 아니라 약간은 이질감이 느껴질 수도 있었는데 (자주 보다 보니) 나중에는 정말 친구처럼 되더라.

한국 배우들과도 끈끈한 관계가 형성됐을 것 같다. 눈 뜨고 감는 순간까지 같은 공간에서 일하며 매일 살을 부대낀 것 아닌가.
정말 가족같았다. 촬영 끝나고 앉아 있으면 밤쯤 돼서 전화 온다. 김윤석 배우가 “형님 올라오시죠.” 하는 거다. 가보면 음식을 차려 놓았다. 제작발표회 때도 얘기했지만, 그 아프리카에서 도가니탕이 나왔다니까?(웃음) 어떻게 준비했냐고 물어보니 혼자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사와서) 사람들 맛보게 해준다고 요만~한 냄비에 직접 끓였다는 거다. 모로코의 종교 문제상 돼지고기를 팔지 않았는데 덕분에 소고기를 많이 먹었다. 스테이크까지, 별의별 음식이 다 나왔다.(웃음) 배우들끼리 생활하는 모습도 보고 대화도 많이 하면서 사람에게 접근하는 법을 새롭게 배운 것 같다. 이렇게 계속 배우고 산다.

당신이 준비해간 커피 덕분에 많은 스태프가 행복했다고 하더라.
가만히 방에 앉아 있으면 ‘똑똑’ 소리가 난다. (조)인성이가 “커피 타줘요” 하고 들어온다.(웃음) 사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있었다. 대화를 깊이 나눴는데 개인 생활에서의 마음가짐도 굉장히 깊이가 있고 안정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가도 촬영을 시작하면 작품에 몰입하는 깊이감이 남달랐다.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역할에 끝까지 매달렸다. 내가 박수를 칠 정도였다.


‘강 참사관’역을 맡은 후배 조인성의 존재가 무척 흐뭇했나 보다.(웃음)
사실 <더 킹>(2016)이라는 작품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인성이가 확 커 있더라고. 여자 배우도 마찬가지지만, 남자 배우 역시 세월과 연륜에서 오는 멋이 있다. 연기 세계가 확실히 멋있어지거든. 인성이는 이제 더 멋있어질 나이다. 그래서 기대되고 궁금하다. ‘태준기’역을 맡은 (구)교환이도 굉장히 열정적이다.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일에 달려드는데… 내가 어렸을 때 딱 그랬다. 현장에서 아침만큼은 좀 쉬었으면 좋겠다 싶던데 4개월 동안 하루도 안 빼고 뛰더라. 지금도 삐쩍 말라 있어서 걱정된다. 살 좀 불려가면서 연기를 했으면 좋겠다. 교환이도 일이 잘고 있는 것 같아서 박수를 보내고 있다.

조인성이 인터뷰에서 당신을 두고 주름 하나만으로도 캐릭터의 서사를 표현해내는 선배라고 했더라.
공백기를 갖고 처음 돌아왔을 때 왜 이렇게 늙었냐는 말을 들어 좀 힘들었다. 늙은 사람한테 왜 늙었냐고 하면…(웃음) 어떻게 대답할 말이 없지 않나. 별생각 없다가도 가끔은 주름이 너무 많나? 시술해야 되나? 생각도 했었고. 그런데 그걸 좋게 봐주니까 인성이한테 고맙다.(웃음)

가장 많은 신에서 맞붙은 김윤석과의 연기 호흡은 어땠나. ‘연기 베테랑’ 간의 만남인데.
난 진짜 김윤석 팬이었다. 누가 캐스팅되는지도 모르고 일단 출연하겠다고 했다가 나중에야 김윤석, 조인성, 김소진, 정만식, 김재화, 박경혜 등이 다 들어온다고 해서 얼마나 좋았는지. 현장에서 ‘드디어’ 김윤석을 만났는데 대놓고 그랬다. 당신 봐서 좋다고.(하하하) 연기하는 걸 보면 고개가 끄덕끄덕해지더라. 저렇게 (열심히) 준비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알고 나도 배웠다. 연기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간 수많은 배우와 함께 연기합을 맞췄을 텐데, 가장 기억에 남는 상대 배우가 있다면.
아이, 그걸 어떻게 한 사람만 꼽나.(웃음) 음… 굳이 꼽으라면 (안)성기 형님. 항시 나에게 너무 따뜻하게 해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좋다고 느껴지는 게, 촬영장에서 내가 편하게 하고 싶은 연기를 다 할 수 있도록 자유를 주셨다. (윤)복희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내게 길을 알려주신 분이다. 그래서 그분들이 좋았다. 후배들은 뭐, 말 안 해도 괜찮겠지.(웃음)

이제 대부분의 현장에서 연기 경력이 가장 많은 선배일 텐데.
그렇지. 이젠 내가 선배가 된 입장이다. 그렇다고 특별한 건 없다. 현장에 갔을 때 누군가가 나 때문에 불편하지 않았으면 한다. 시대가 바뀌어서 제시간 안에 촬영을 끝내야 하지 않나. 실수하거나 누가 되거나 짐이 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뿐이다.

<이끼>(2010) 출연 이후 쉬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인랑> <국가 부도의날> <천문: 하늘에 묻는다> <결백> <퍼펙트 맨> 까지 크고 작은 한국 영화에 꾸준하게 출연 중이다. 김한민 감독의 <노량: 죽음의 바다>까지 선보일 예정인데.
자꾸 불러주고 써줘서 너무 고맙다. 그런데 그래도 욕심이 생긴다.(웃음) <모가디슈>가 잘됐으면 좋겠다. 물론 상도 주면 좋을 거다. 안주면 어쩔 수 없고… 속상하기도 하지만 괜찮다. 그동안 너무 못 받아서 뭐.(웃음) 이제는 상보다는 작품이 우선이다. 어른이 되다 보니 많은 게 변했다.

뭐가 가장 변했을까.
작품을 고르는 기준 같은 건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재미있는 걸 고른다. 보는 사람이 시간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 안 되니까. 솔직한 얘기지만, 나도 남의 작품 보다가 시간 아까운 적 많았다.(웃음) 배우로서는 나이 들면서 정립된 게 좀 있는 것 같다. 나는 두세 시간 동안 관객에게 희로애락을 주는 사람이더라. 그런데 정작 내가 희로애락을 받을 데는 없더라. 어렸을 때는 그게 힘들었다.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었으니까. 이젠 그런 게 많이 없어졌다. 받을 생각을 안하고 사는 게 편하다.(웃음)

사진 제공_롯데엔터테인먼트


2021년 8월 5일 목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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