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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일생에 담긴 파격적인 근대성” <자산어보> 이준익 감독
2021년 3월 31일 수요일 | 이금용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이금용 기자]
<황산벌>(2003), <왕의 남자>(2005), <사도>(2015), <동주>(2016) 등 시대극 장인 이준익 감독이 본인의 주특기인 사극으로 돌아왔다. 설경구, 변요한 주연의 <자산어보>는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설경구)과 바닷길이 아닌 출세길에 오르고 싶은 청년 ‘창대’(변요한)가 함께 책을 집필하며 벗이 되어가는 이야기다. 보다 널리 알려진 정약용이 아닌 그의 형 정약전과 그의 벗이자 제자인 ‘창대’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준익 감독은 “한 사람의 사소한 일생을 가까이서 보고, 개인이 가진 파격적인 근대성을 영화로 그리고자 했다.”고 말한다.

정약용이 아닌 그의 형인 정약전을 주인공으로 앞세웠다는 점이 독특하더라.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 않나.
거대한 사건이나 영웅의 이야기보다 큰일을 하지는 않았는데 의미 있는 한 사람의 사소한 인생을 가까이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약전이다. 국가주의나 집단주의를 벗어난 시대가 이미 도래했고 이젠 거시적인 관점보다 미시적인 관점이 현대에 더 적절하게 느껴진다. 영화에서도 그런 시도를 하려고 했다.(웃음)

정약전이 남긴 여러 저서 중 ‘자산어보’를 주요 소재이자 제목으로 삼았다.
처음부터 '자산어보'로 영화를 만들 생각을 한 건 아니다. 가장 먼저 관심을 갖게 된 건 동학과 서학이다. ‘동학의 이름이 왜 동학일까?’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파고드니 서학이 있더라. 서학은 천주교인데, 우리나라 천주교는 가톨릭이 들어와서 전도한 게 아니라 신자들이 먼저 책을 보고 자생적으로 발전시킨 경우다. 아마 전 세계적으로 드문 경우가 아닐까.

그렇게 서학을 연구하던 정약전이 어떻게 어류 도감인 '자산어보'를 쓰게 됐는지, 또 그 집필을 도와줬다는 ‘창대’라는 인물이 너무 궁금해졌다. 두 인물의 이야기 속에서 시대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아 사건보다는 사연 위주의 사극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솔직히 ‘자산어보’가 극적으로 재미있는 소재는 아니지 않나.(웃음) 그런데 재미보다 중요한 건 영화가 건네는 메시지다. 일종의 자연과학 도서인 ‘자산어보’가 조선 문명의 근대성을 품고 있던 씨앗이라 생각했다. 누군가는 갑오개혁으로, 누군가는 동학농민운동으로 근대의 시작을 보지만 사실 전부 과거의 집단주의적 사고에서 바라본 인식이지 않나. 그런데 ‘자산어보’는 개인이 갖고 있던 근대성을 증명한 책이고, 그 파격적인 근대성을 영화로 그리고자 했다.

<동주>의 ‘송몽규’, <박열>(2017)의 ‘후미코’에 이어 이번에도 주인공 ‘약전’만큼이나 ‘창대’의 존재감이 두드러지더라.
혼자 사는 인간은 없다. 누군가 빛나려면 곁에서 빛을 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게 ‘윤동주’에겐 ‘송몽규’고, ‘박열’에겐 ‘후미코’고, 또 ‘약전’에게는 ‘창대’인 것이다. 우리는 ‘창대’에게 마음을 실어 영화를 봐야한다.

그렇다면 ‘약전’과 ‘창대’의 관계를 어떻게 그리고자 했나.
자기자신을 아는 게 제일 힘들다. 정확하게 아는 것만으로도 그보다 큰 장점은 없다. ‘창대’는 ‘약전’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그래서 ‘약전’이 죽고나서 ‘창대’가 흘린 눈물은 상실의 슬픔이 아닌 ‘약전’이 자신을 알아준 사람임을 뒤늦게 깨닫고 흘리는 가슴 벅찬 눈물이다.

‘창대’, ‘가거댁’(이정은)을 비롯해 영화의 드라마와 유머를 담당하는 주요 캐릭터들은 어떻게 구상했을까.
기본적으로 이번 영화에는 허구가 거의 없다. ‘자산어보’에는 실제로 ‘창대’의 이름이 9번 정도 언급된다. 다만 ‘창대’에겐 ‘약전’에 비해 창작의 여지가 있어 가족 관계와 배경 등을 새롭게 만들었고, ‘약전’이라는 인물의 선명성을 드러내기 위한 기능성을 부여했다.

‘가거댁’ 또한 실제로 기록된 인물인데, 그 이름을 내가 붙였을 뿐이다. 고증과 허구가 적절하게 짜인 이야기로 봐주셨으면 한다.
<동주>에 이어 두번째 흑백영화라는 점에서도 주목받았다.
<자산어보>는 거대한 사건, 전쟁, 권력 다툼, 죽이고 피비린내나는 사극이 아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 나오고 신유박해를 제외하면 극적인 사건도 없다. 그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인 내용을 다루는 영화다. 상업적인 소재가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로 흑백을 선택하기도 했다. (웃음) 요즘 사극 영화 제작비가 100억 원 정도 드는데, 절반도 안 되는 비용으로 영화를 찍었다.

또 컬러는 이미 너무 많이 보지 않았나. 흑백을 보지 못한 세대에게 흑백이 낡은 게 아닌 특별한 것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흑백만이 잡아낼 수 있는 디테일이 있다. 인간의 삶, 혹은 본질을 보여주려면 흑백이 훨씬 유리하다. 컬러는 이미지 전부가 관객을 향해 밀고 들어간다면, 흑백은 인물의 감정은 물론이고 여러 미장센까지 현미경으로 보듯 세세하게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컬러는 외면이 더 뚜렷해 보이지만, 색을 덜어내면 인간의 내면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좋다. 물론 어마어마한 연기력을 지닌 배우들이 모였지만 연기가 더 돋보이는 건 흑백 덕분이다. 눈에 보이는 현란한 볼거리는 없지만 스펠터클한 인물의 감정이 볼거리라 생각하면 된다.

언급했듯 한 자리에 모이기 어려운 배우들이 많이들 나오더라. 특히 설경구 배우는 이번 작품이 첫 사극이라고.
설경구 배우와는 <소원>(2013)에서 함께 작업했다. 당시에 배우가 아닌 사람 설경구에 감동했다. 배우가 현장에서 연기할 때, 감독은 그의 외면보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에 임하는 내면을 본다. 그의 얼굴에서 조선의 선비를 봤다. 한국에 현존하는 배우 중에서 설경구 배우가 조선의 선비의 이미지가 얼굴에 가장 많이 내포돼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정약전의 얼굴이고 조선시대의 선비의 얼굴이라고 생각해서 함께 하게 됐다.

그렇다면 이번에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변요한 배우는 어땠나.
변요한 배우를 섭외하자고 제안한 건 설경구 배우다. <감시자들>(2013)에서 만났다는데, 그간 그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 거다. 솔직히 직접 보기 전까진 이 정도로 연기를 잘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웃음) 항상 진심으로 작업에 임했던 배우로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다. 촬영하는 동안 태풍이 온 적 있는데, 단 한 번도 집에 안 들어가고 숙소에만 있었다. 항상 ‘창대’ 안에만 있으려 했던 거다. 일산 세트장에서 찍을 때도 집에 안 가고 근처에 숙소를 잡아서 며칠을 지내더라.

이외에도 정진영, 최원영, 방은진, 류승룡, 김의성, 조우진 배우 등 잠깐 비치는 우정출연 배우진의 라인업이 화려하다.
나와의 인연보단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출연을 결정한 것이다. 영화의 규모와 자신이 맡은 역할이 작더라도, 결국 좋은 시나리오를 알아보는 안목과 교양을 겸비한 이들이기에 캐스팅이 가능했던 거다. 다른 배우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웃음)

마지막으로 아직 코로나19가 완전히 종식되지 않은 상태에서 극장 개봉을 하게 됐는데, 소감 한마디 부탁한다.
나이가 많아서 이제 한 두개 망하면 접어야 한다. (웃음) 나를 위해서라기보다 이 영화에 투자한 사람들을 위해서 흥행했으면 한다.

사진제공_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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