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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를 준비한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정우성
2020년 2월 24일 월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잘 나가니까 좋은 작품은 다 하는구나’. 자신이 준비하는 작업을 향한 일부 세간의 평가에, 정우성은 차분하게 답했다. 소위 잘나가는 영화 배우라는 이유로 최고의 감독, 작가, 제작자만 고집했다면 <무사>(2001) 이후의 대다수 작품은 세상에 나오지도 못했을 거라고 말이다. 업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영화인이나 상대적으로 기회가 적은 신인과 함께 걸어온 길이 자국으로 남아 지금의 정우성이 됐다고 그는 표현한다.

지난 5년간 정우성이 영화계에 남긴 자국은 선명하다. <아수라>(2016) <더 킹>(2016) <강철비>(2017) <증인>(2018) <인랑>(2018)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2019)까지 화제작을 연이어 선보였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고요의 바다> 제작자로 참여한다는 최근 소식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직 자기 줏대로” 살아온 결과물의 일부다. 그런 중에도 ‘마무리’를 말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는데, “어떤 기성세대가 될지 고민한다”던 <강철비> 인터뷰 당시와 큰 변함이 없는 태도다. ‘지는 해’다운 마무리를 준비해야 한다는 그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본다.


로테르담 영화제에서 ‘특별 심사위원상’을 수상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안도한다. 흥행은 아무도 점칠 수 없다. (코로나19가 유행하는) 지금처럼 개봉 당시 사회적 상황이나 분위기도 극명하게 중요하다. 하지만 ‘어떤 평가를 듣느냐’는 영화에 참여한 사람이 거둘 수 있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코로나19의 유행으로 개봉일을 한차례 연기했다. 영화가 관객과 만나는 데 어려움이 예상된다.
현 상황이 개봉에 영향을 미치는 건 아쉽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코로나19 사태가) 우리에게는 더 큰 일이다. 빨리 상황이 안정돼서 편안한 일상으로 되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이 더 크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거액의 돈이 들어 있는 가방을 따라가는 이야기다. ‘연희’(전도연)와 당신, ‘미란’(신현빈)과 ‘진태’(정가람), ‘중만’(배성우)과 ‘영선’(진경) 그리고 ‘순자’(윤여정)까지 서로 다른 시간과 삶을 공유하던 이들은 어느 순간 하나의 돈 가방을 매개로 이어진다.
돈 가방의 흐름에 따라 등장인물의 욕망이 담긴 사연이 하나하나 등장한다. 구구절절하지 않고 짧으면서도 강렬한 사연이다. 보통의 장르 영화였다면 돈 가방 쟁탈전을 보여줬을 텐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그보다는 각 인물의 사연에 집중한다. 옴니버스 영화가 아닌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밀도 있는 이야기인지라 영화가 다 끝난 뒤에도 인물이 전부 살아 남아있다. 관객은 영화 속 이야기를 각자 자기 일상에 대입해보고, 스스로와 대화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연기한 ‘태영’은 어떤 인물인가.
‘연희’와의 관계에 집착한다. 내가 너에게 얼마만큼 사랑을 주고, 어떻게 사랑했는데… 그러니 커다란 보상을 받아야 할 거라고 기대한다. 사실은 ‘연희’에게 뒀던 자기 마음에 집착하는 것이다. ‘럭키’라는 담배가 인생에 행운을 가져다줄 거라는 생각도 그렇다. 주님과 부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불행은 올 수 있지 않나. 감정적 오류, 막연하고 합리적이지 못한 낙천주의, 그리고 그런 것에 자기 삶을 위탁하는 무책임함… 그게 ‘태영’이라는 인물이다. 아마 제작자와 감독은 내 여자에게 사기를 당한, 소위 ‘마초’ 느낌이 나는 진지하고 더 어두운 캐릭터를 원했을 것이다.

‘태영’은 어두운 데가 있는 인물인 건 맞지만 ‘마초’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연희’를 집에서 다시 만났을 때) 숟가락으로 식탁을 치면서 “어디서 뭐 했냐”고 묻고, 고무장갑을 끼고 후라이팬을 휘두른다. 그래서 (전도연이) 더 놀라고 당황했을 것이다. 정우성이 그런 걸 하고 있으니…(웃음) “우성아, 너 저래도 되니?” 하는 이야기를 자꾸 했다.

‘연희’를 연기한 전도연은 지난 3일 언론시사회 당시 뭔가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는 소감을 전하더라.
‘태영’역을 설계할 때 (떠나간 여자를 향해) 미련과 오지랖을 떠는 모습을 풍자하고 희화화하려고 했다.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태영’이 등장하는 순간이 관객이 잠깐이나마 가벼운 감정으로 쉬어갈 수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림이 눈에 보였다. 아마 (그런 내 모습이 낯설어서) 더 쑥스럽게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내 정우성이 그리려는 ‘태영’이 그런 인물이라는 걸 바로 인정하고 함께 호흡해주더라. 프로로서 긍정적인 결과물을 도출하기 위해 치열하게 각자의 캐릭터를 구현했다. 현장에 대한 전도연의 애정, 존중, 책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경험이라 기뻤다. 애정 가는 동료가 됐고, 성공적인 협업이었다는 생각이다.



두 사람의 협연을 즐길 만한 지점을 꼽는다면. 다른 출연진의 에피소드가 차지하는 분량도 적지 않기 때문에 ‘태영’과 ‘연희’ 커플의 이야기가 예상만큼 많지는 않다.
‘태영’과 ‘연희’가 마주하는 식탁 앞 첫 신에서 만들어내는 긴장감, 약간은 우스울 법한 서로의 태도, 관객이 그 장면에서 그런 분위기를 느낀다면 두 사람의 작업에 대해서 충분히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의 시나리오는 적당한 균형감을 지녔다. 아마 정우성과 전도연이 나오는 신을 좀 더 늘려 보자는 요청이 있었다면, 나나 전도연이나 둘 다 그러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서로 함께 더 작업해보고 싶다는 아쉬움은 다른 영화에서 해소하면 된다.

영화 제목처럼, 당신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을까.
10대 때, 그리고 물질적으로 굉장히 힘들었을 때. 하지만 그때도 내가 바라지 않았던 아르바이트 제안은 다 거절했다. 모든 물질에는 사연이 있다. 그 사연까지 다 감당할 수 있느냐는 질문 앞에서는, 그 돈을 갖느냐 마느냐 같은 수준의 단순한 생각만 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바라보고 있던 영화배우라는 길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뿌연 길이었다. 돌이켜 보면 소신일 수도, 용기일 수도, 무모함일 수도 있다. ‘요만큼’이라도 준비를 했던 애라면 모를까… 영화배우는 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막연한 희망 같은 거였다.

평범한 영화배우를 넘어 ‘스타’가 됐고, 그 반열을 넘어 영화 제작자로도 활동한다.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고요의 바다> 제작자로 합류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나가니까 별거 다 하는구나’라고 말할 수 있지만 <고요의 바다>는 부단히 긴 시간 동안 개발 과정을 거친 끝에 결국 넷플릭스 드라마로 제작 결정된 것이다. 만약 내가 매번 최고 수준의 스태프와 작업하려고만 했다면 <무사> 이후 대부분의 작품은 출연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신인 감독, 신인 제작자, 신인 작가, 업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거나 경력이 적은 젊은 친구들과 내가 가진 기회를 나누려고 했다. 오랜 시간 동안 업계에서 소위 ‘빠꾸’먹었던 고된 프로젝트가 나로 인해 열매를 피울 수 있는 시기를 만들기도 했다.

(끄덕끄덕)
<내 머릿속의 지우개>(2004)는 (감독과 스태프가 상대적으로 신인이라는 이유로) 매니저가 나서서 출연을 말렸다. 주변 사람들을 통해 출연하지 말라고 말려 달라고 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때는 최고 수준의 팀이 꾸려졌지만, 그중에서 왜 제일 눈에 띄지도 않는 ‘좋은 놈’을 하느냐, 그 역으로 네가 얻을 게 뭐가 있느냐 하는 말이 많았다. 모든 게 모험이었다. 하지만 그런 길이 나를 닦아 나가는 거라고 믿었다. 지금의 정우성은 그간 지나온 자국 덕에 남아있는 것이다.

부러 출연하지 않은 종류의 작품도 있는 거로 안다.
조폭 영화는 출연하지 않았다. <비트>(1997)를 끝나고 <똥개>(2003)를 촬영할 당시 촬영장이던 학교 뒤뜰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시커먼 어둠 속에 숨어 있던 10대들이 “우와 멋있어”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담배를 쥔)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더라. 나도 담배를 일찍 시작했지만, 그건 각자의 선택에 달린 문제지 나로 인해 누군가 ‘멋’을 염두에 두고 담배를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로서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생각하게 됐다.

앞으로의 활동 방향은.
마무리를 준비해야 한다. 내가 얻은 경험을 업계와 어떻게 나눌 것인지, 업계 시스템의 잘못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 새로운 세대와 어떤 대화를 나눌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나이를 먹어가는 사람들은 ‘아직 더 할 수 있다’는 생각보다는 자신이 여태까지 얻은 것을 빨리 내려놓고 다음 세대와 무엇을 나눌지 고민해야 한다. 그게 ‘지는 해’로 가는 길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니 (여러 분야에서) 세대교체도 되지 않고, 기성세대를 향한 (젊은 층의) 불신이 생기지 않나.

평소 궁금했던 점이 있다. 배우가 미치는 사회적 영향을 크게 생각하고, 개인적으로도 여러 사회적 활동을 꾸준히 이어나가고 있다. 그럴수록, 함께 비슷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뜻을 지지해줄 사람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주로 누구와 대화를 나누나.
(검지로 이마를 가리키며) 정말 속내를 털어놓는 대화는 나 혼자서 한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사회 구성원으로서 또 내가 속한 이 업계 사람으로서 그동안 내가 받아온 모든 것을 잘 돌아보고 스스로와 대화를 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마지막 질문이다. 요즘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넋을 놓고 있을 때.(웃음)

사진 제공_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2020년 2월 24일 월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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