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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게 돈 벌어 훌륭한 예술 소비하는 노동자 <오버데어> <기생충> 정재일 음악감독
2019년 6월 4일 화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아침에 일어나 자정이 되기 전에 잠든다. 보통 사람의 일상에 맞춰 근면하게 일하고 퇴근한다. 취미 삼아 듣는 음악은 늘 듣던 곡, 새로운 것을 부러 찾아 듣지는 않는 편이다. 일을 위해 감상하고 학습해야 하는 음악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까닭이다. 정재일 음악감독은 뭇 노동자처럼 일하고, 쉰다. 일감 준 이를 위해 충실히 복무한 뒤에는 자기만을 위한 휴식 시간을 사수하고 싶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작업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술적 짝궁’과도 같은 장민승 감독과의 작업 <오버 데어>에서는 조금 예외였을까. 어느 작업에서든, 그의 지향은 퍽 일관적이다. 예술가는 여러 직업 중 하나이며, 그 직업이 자기 인생의 전부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저 조용하게 돈 벌어 좋아하는 무용극처럼 훌륭한 예술을 소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영화음악을 선보이기 앞선 지난 4월 장민승 감독의 <오버데어> 영화음악으로 관객과 만났다. 45분간 제주 영상과 음악만 등장하는 실험적인 영상에 당신의 음악을 입힌 독특한 형식의 작품이다.
그동안 ‘장민승+정재일’이라는 이름의 현대미술 듀오로 활동해왔다. 사진과 오디오를 이용한 설치미술 ‘더 모먼츠’(2012)를 선보였고, 몇 단계의 작업을 거쳐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을 받은 ‘보이스리스’(2014)를 작업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음악은 내 맘대로, 비주얼은 형(장민승) 맘대로 작업하는 방식을 택하게 됐다. 기본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되 작업은 각자 생각하는 대로 한다. 두 사람의 것을 합쳤을 때 뭔가 꺼림칙하면 그때 다시 상의하더라도 말이다.

<오버데어>도 그런 방식으로 작업했다고 들었다. 장민승 감독은 지난 인터뷰에서 당신에게 아무런 요구 없이 45분간의 ‘통음악’을 주문했다고 했다. 자신이 촬영해온 영상에 당신이 작업한 음악을 그대로 합쳤는데, 놀랍게도 딱 맞아떨어졌다고 말이다.
지금까지 한 작업보다 더한 모험이었다. 나는 이 정도로 (러닝타임이) 긴 작품을 해본 적이 없다. 내가 한동안 장민승 감독의 집 별채에 세 들어 산 게 도움이 됐다. 그가 제주를 다니며 찍어온 영상을 바로바로 받아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때로는 목숨을 걸고, 민간인이 갈 수 없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 촬영해온 영상이었다.


영화 속 이미지는 일반인이 견디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하다. 흔히 생각하는 제주의 아름답고 따스한 면모는 찾아보기 어렵다. 거센 눈발, 음울한 비, 거친 파도와 묘연한 안개만 가득하다. 보는 이로서는 일종의 압도감에 사로잡히지만 종종 지나치게 쓸쓸해진다.
과연 이게 어느 행성일까? 장민승 감독이 촬영해온 영상을 처음 봤을 때 마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2014)를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모레퍼시픽의 지원을 받아 만든 작품인 만큼, 처음에는 제주의 아름다움이나 근대사의 슬픈 사건을 표현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도 했다. 많은 서적을 읽었고 장민승 감독과 함께 제주 칠머리당굿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둘 다 학술적인 사람이 아닌지라… 그런 것들을 예술의 재료로 사용하는 데 어설펐다.

영화는 아무런 대사도 들려주지 않는다. 이야기가 완전히 소거된 영상에서 오히려 당신의 음악이 서사적인 기능을 맡은 느낌이다. 판소리를 기본으로 한 정은혜의 한 서린 목소리에서는 자연히 진혼곡이 떠오른다.
나와 정은혜가 영상을 보고 느낀 그대로 즉흥 연주를 한 결과물이다. <오버 데어>의 음악을 들은 누군가는 “왜 곡소리를 넣었냐”는 말도 했다. 제주가 품고 있는 우주적인 에너지의 근원을 표현하려면 여성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어떤 감정을 만들어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장민승 감독과 함께 작업할 때는 내 음악이 그저 공기나 바람처럼 느껴지길 바란다.

하지만 누군가 <오버데어>의 고통스러운 영상과 구슬픈 음악을 접한 뒤 4.3이나 세월호의 슬픔을 떠올린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본인의 프리즘으로 작품을 받아들여 준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드러나지 않았을 뿐) <오버 데어>를 준비하던 중 장민승 감독이 4.3에 관한 공부를 많이 했다. 제주와 관련된 비극적인 역사를 다루지 않은 건 ‘내가 감히…’라는 생각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작업은 <오버 데어>와는 판이했을 것이다. 상업 극영화의 흐름에 따라, 시퀀스의 특색에 따라 각기 다른 느낌으로 25곡을 썼다.
솔직히 말하면 <기생충> 편집본을 처음 봤을 때 봉준호 감독님한테 이렇게 말했다. 음악은 안 넣어도 되겠는데요? 여기서 편집을 꼭 더 해야 하나요?(웃음)

(웃음) 하지만 결국 완성해냈다.
극영화 음악을 할 땐 감독님이 원하는 지점에 도착하기 위해 철저히 노력하는 편이다. 연출자의 의중을 알아차리는 게 내 첫 번째 임무라고 생각한다. 나보다 적어도 열 배는 많이 자기 영화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 말은, <기생충>의 테마곡 하나하나가 봉준호 감독의 의견에 따른 결과물이라는 의미겠다.
물론이다. 음악의 결부터 세세한 지점까지 모두 감독님의 의견을 따랐다. 내가 만드는 음악이기 때문에 내 색깔이 들어가기는 하겠지만, 전체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길을 이끄는 건 감독님이었다. 봉준호 감독님은 엄청난 음악광이고, 이번 영화에서는 바로크 음악을 모델로 제시했다. 우아하면서도 구슬픈 느낌을 체득하기 위해 매일 아침 바흐를 연주하고 비발디를 들었다.


봉준호 감독의 전작 <옥자>(2017) 음악을 쓸 당시에는 상당히 경쾌하고 다채로운 음악을 구사했다. 마케도니아에서 브라스 밴드와 협업을 했고, 오케스트라 연주와 일렉트로닉 사운드까지 장르도 다양했다.
<옥자>는 <기생충>에 비하면 마음대로 작업한 편이다. 강원도 시골, 서울, 뉴욕의 도살장으로 진행되는 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음악을 확확 바꿨다. 주인공 ‘옥자’가 말을 못 하기 때문에 음악으로 자신 있게 밀고 나간 측면도 있다. 하지만 <기생충>에서는 달랐다. 레스토랑에서 피아노 치는 사람의 연주 같은 느낌의 음악을 써야 했다. 대사가 어마어마하게 많아 음악이 나설 데가 많지 않았다. 감독님도 <옥자>와는 달리 처음부터 딱 한 가지의 결을 원했다.

어떤 점을 주문하던가.
음악이 인물에 감정 이입하지 않길 원했다.

쉽게 와 닿지 않는다. 어떤 뜻으로 이해하고 작업했는가.
아마 감독님은 명확하거나 온전한 느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어딘가 나사가 빠져있는 듯한 느낌을 선호한다고 느낄 때도 있다. <옥자>를 작업할 때는 “멋지게 걷다가 갑자기 넘어져서 쩔뚝대는 느낌”이라고 하셨고 <기생충> 때는 “실제로는 우아하지 않은데 아주 우아한 척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하셨다. 관객으로서 그의 영화를 오랫동안 봐 왔기 때문에, 막연하게나마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만 갈피를 잡기까지는 오래 걸렸다. 몇 차례 시행착오도 겪었다. 역동적이고 서사적인 음악에 자신 있던 내가 그런 감성을 억눌러야 했으니까.


최우식이 직접 부른 마지막 곡 ‘소주 한 잔’에서는 유일하게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오는 느낌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창작곡 중에서 목소리가 나오는 곡으로는 ‘소주 한 잔’이 유일하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를 다 보고 난 관객이 씁쓸한 마음을 안고 소주 한잔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기를 바란다고 했다. 곡의 결은 펑크로 정했고, 블루스 같은 느낌으로 시작해 경쾌한 동요가 등장한다. 최우식 씨가 본인이 노래를 잘한다고 했다더라.(웃음)

노래를 시킬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랬다고 하더라.(웃음) <오버 데어>와 <기생충> 영화음악을 선보이며 2019년 상반기를 보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가.
작곡가는 어떤 주인공을 위해서 일하는 경우가 많다. 올 해는 박효신의 데뷔 20년를 기념하는 큰 프로젝트가 있다. 연극 음악도 두 작품 정도 할 계획이다. 내년에는 영화 음악도 한두 작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 도장을 찍지 않아서 모르겠다.(웃음) 그 외에는 보통 사람들의 시간에 맞춰 근면하게 일하고 퇴근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마감일이 닥치면 철야를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아침에 일어나서 자정이 되기 전에 잠들려고 한다. 쉬는 시간과 자는 시간을 확보해야 하니까.(웃음)

근면 성실한 노동자 느낌이다. ‘괴짜 예술가’와는 거리가 먼...(웃음)
예술가도 많은 직업 중 하나이고, 나는 노동자다. 베토벤이나 말러 같은 사람이 아닌 이상 대부분은 특별할 게 없다. (괴짜 같은) 특이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예술도 물론 황홀하지만, 나는 예술이 내 인생의 전부가 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조용히 살다 가고 싶다.(웃음) 조용히 돈을 벌어 훌륭한 예술품을 소비하면 된다.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시간이 될 때마다 유럽으로 가서 이 도시, 저 도시의 현대무용 공연을 본다. 지난해 가을에는 벨기에에서 10년 전 서울에서 본 <이사벨라의 방>을 다시 봤다. 독일에서 1,200km를 운전해서 간 길이었는데, 과거 팔십 넘은 할머니 역할에 출연했던 배우가 여전히 건강하게 같은 역할을 연기하고 있었다. 오래전 느꼈던 에너지를 똑같이 느꼈다는 사실에 굉장히 흥분했다.(웃음)

사진_이종훈 실장(스튜디오 레일라)


2019년 6월 4일 화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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