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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어디 덤벼봐 <우상> 천우희
2019년 3월 19일 화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천우희의 성향을 잘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그는 <한공주>(2013)의 이수진 감독과 <우상>으로 재회했다. 첫 촬영은 조선족 여인 ‘련화’(천우희)가 늦은 밤 인적 없는 아스팔트 도로를 도망치듯 달리는 장면이다. 집요하고 반복적인 연출 방식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수진 감독은 천우희의 전력 질주를 마흔 번 넘게 끌어냈다. 천우희는 고통스러웠을 법한 이 날의 촬영을 두고 “몸이 풀리고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고 말한다. 자신은 “상대가 밀어붙일수록 오기가 생기고 발동이 걸린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주변에서는 자기를 지나치게 소진하는 방식으로 일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법한데, 그런 말을 기다렸다는 듯 솔직한 고백도 곁들인다. “이제는 스스로를 옥죄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천우희는 <우상>에 들어서야, 어디까지 자신을 불태우고 또 어느 때에는 그것을 멈춰야 하는지에 관한 약간의 배움을 얻은 것 같다.

<한공주> 이후 이수진 감독과 두 번째 만남이다. 비평 면에서 좋은 결과를 낸 두 사람이 다시 만난 만큼 서로 기대감이 컸을 거 같다.
조금 웃긴 말일 수도 있는데… <한공주> 이후 몇 가지 작품을 거친 만큼 감독님께 내가 연기를 더 잘하는 배우가 됐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다. ‘어때요 저 잘 컸죠?’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정작 다른 출연진에 비해 캐스팅이 빨리 확정된 건 아니라고 들었다.
<곡성>(2016) 개봉 이후 감독님의 고민이 깊었다고 들었다. 당시 내 이미지가 워낙 강렬했기 때문에 주저하셨고 한동안 다른 배우를 찾으신 거로 안다. 그러던 와중에 설경구 선배가 내 이야기를 꺼내 주셨다. 그 덕에 기회를 얻었다.

언론시사회 이후 작품이 ‘어렵다’는 평가가 많다. 해석의 여지가 많다는 뜻도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구명회’(한석규)와 ‘유중식’(설경구) 그리고 당신 ‘련화’가 나누는 감정이 어떤 종류인지 단번에 파악되지 않는 희미한 느낌이었다고 할까.
<곡성> 때도 언론시사회 분위기가 비슷했다. 하지만 관객은 좋아해줬다.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 예상한다. 물론 나 역시 시나리오를 술술 읽은 편은 아니고, 숨은 단서를 하나하나 찾아내느라 감독님이 왜 나를 시험에 들게 하나 싶은 생각도 했다. 연기하기 쉽지 않겠다는 두려움도 느꼈다. 하지만 관객은 그저 극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되지 않을까. 맨 마지막의 공허한 장면이 남기는 잔상이 있다면, 그때 한 번쯤 그 의미를 생각해보면 될 것 같다.

배우들의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조선족 ‘련화’를 연기한 당신 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그런 감이 있다.
베를린영화제에서는 음향의 품질이 상당히 좋았다. 작은 소리까지 다 듣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한국에서 진행한 언론시사회 이후 처음으로 내 사투리를 잘 못 알아듣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은 약간 소심해진 상태다. 연습할 때 사투리 선생님께 칭찬을 엄청나게 받았거든.(웃음) 생각해보면 이미 극의 내용을 다 알고 있는 나와 달리 관객에게는 사투리가 다소 지나치게 느껴졌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감독님이 그 후로 음향 체크를 상당히 많이 하고 계신 거로 안다.

이수진 감독과의 촬영 과정은 어땠는가. 연기 측면에서 배우를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과정도 어느 정도 있었다고 들었다.
크랭크인 후 첫 촬영이 뜀박질 장면이다. CCTV를 통해 뒷모습이 보이는 그 장면을 완성하기 위해 4~50번가량을 촬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찍을수록 신이 나더라. 몸이 풀리고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랄까. 그러면서 정말 ‘련화’가 되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나도 참 만만치 않은 또라이구나 싶었다.(웃음)

음. 감독의 연출 방식과 궁합이 잘 맞는다고 해야 하나…(웃음)
<한공주>에서 이미 그의 방식을 경험해봤기 때문에 집요할 정도로 여러 번 촬영을 다시 하는 게 특별히 힘들지는 않았다. 나는 상대가 밀어붙일수록 더 오기가 생기고 발동이 걸리는 스타일인 것 같다. 좋아, 어디 해볼 때까지 해보자.(웃음) 유난히 집요하게 일하는 감독을 많이 만나서 그 측면에서 특화가 된 것 같기도 하고.(웃음)

하지만 분명 고된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납치 신은 확실히 힘들었다. 12시간씩 5일 동안 찍었다. 감독님이 아주 사실적인 장면을 원했기 때문에 실제로 청테이프를 얼굴에 칭칭 감고 있었다. 떼었다, 붙였다 하면 피부가 상하니까 그러지 못했는데 나중에는 눈이 짓물렀다. 그래도 화장실을 가고 싶은 마음까지 참아가며 촬영을 했다. 힘들었지만, 현장에 누를 끼치기 싫었고 연기를 완성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그런 촬영 앞에서는 맥을 못쓸 것 같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로 컨테이너 창고 속 의자에 묶여 며칠간 가혹 행위를 당하는 연기만 한 셈이다.
나름대로 마인드컨트롤을 잘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당시 기온이 영하 15도였다. 온 몸이 비에 젖은 상태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연기를 계속하다 보니 마지막 촬영 날에는 공황장애 증상을 느꼈다.

그런 경험이 당신 삶에 지장을 주지 않던가.
지금껏 연기에 관한 흥미나 의욕을 잃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약 7개월 간의 <우상> 촬영을 마친 뒤에는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회사에 “7개월 일했으니 7개월 쉬겠다”고 말했고 실제로 그 기간 동안 일을 하지 않았다. 신작을 고를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지난해에는 아무 작품도 하지 않았다. 여행을 다니면서 최대한 연기 세계와 멀어지려고 했다.

작품 후유증을 심하게 앓은 것 같다.
극 중에서 ‘련화’는 눈썹을 밀어버리지 않았나. 실제로 내 눈썹을 민 것이다. 감독님이 “눈썹은 다시 난대요”라고 하시길래...(웃음) 그런 상황에서 주연 배우가 세 명의 스케줄을 맞추다 보니 촬영 일정 변동이 많았다. 나는 본의 아니게 눈썹 없이 한 달 동안 집에서 칩거하는 시간이 생겼다. 그 상태로 밖으로 나갈 수는 없지 않은가.(웃음) 그런데 자의적으로 집에 머무는 것과 타의에 의해서 집에 있는 건 굉장히 다른 거더라. 시간이 지날수록 감상적인 태도에 휩싸였다. 마치 ‘련화’처럼.

어떤 기분이 가장 당신을 괴롭혔나.
한 작품에 이렇게까지 영혼을 불태워가며 임하는 게 부질없는 일처럼 느껴지더라. 아무래도 김주혁 선배의 죽음이 당시의 나에게 굉장히 큰 충격이었던 것 같다. 나 자신이 하찮게 느껴졌다. 그동안은 어떤 감정에 혼자만 심취해 있는 것 같은 모습을 부끄러워하고 경계했다. 자기 연민은 처량하고 구차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동안 그런 모습을 감출 수가 없더라.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아마도 한석규가 그런 당신의 모습을 걱정했던 것 같다.
한석규 선배는 현장에서 대기 시간이 있을 때마다 연기에 관해 두런두런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조금은 낯간지러울 수도 있는 이야기까지 솔직하게 말이다. 자신을 잘 알고 자기 내면의 불씨를 유지해야 한다고 하셨다. 너무 활활 타도, 너무 미약해도 안 된다고 말이다. 정말 와 닿는 말이었다. 지금까지도 감사한 부분이다.

그간 스스로를 완전히 소진시키는 방식으로 일해왔던 건가.
나를 불태우는 식으로 임했던 것 같다. 아주 오랜 시간 연기를 해오신 한석규 선배에게는 내가 그러다가 지쳐서 나가떨어질 것 같아 보였던 것 같다.(웃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연기를 계속 해나갈 수 있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다.

다음 작품 <버티고>의 출연을 확정한 건 그런 감정의 연장선인가. 편안하면서도 말랑말랑한 느낌의 멜로 드라마가 연상되는 작품이다.
오직 내 감정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연기를 한 번 해보고 싶었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많이 울기도 했다. 아마 지금까지 선보인 작품 중 가장 감상적이고 자기위안적인 작품일 것이다. 나에게는 다시 한번 연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고마운 작품이다.

배우 스스로가 위로를 받는 작품을 만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본다.
그동안은 이 세상 모든 짐을 혼자 떠안은 것 같은 역할을 주로 맡았다. 모든 감독님이 내게 이런 모습만 원하는가 싶을 정도였다.(웃음) 이제는 그동안 많이 해보지 않은 역할에 도전해보고 싶다. 멜로 작품도 많이 제안해주셨으면 좋겠다.

혹, 할리우드 진출에도 관심이 있나.
당연히 더 큰 시장에 나가고 싶었다. <곡성>으로 칸영화제에 진출하면서부터는 일종의 압박도 느꼈다. 그런데 지금까지 영어 공부를 하지 않고 있다.(웃음)

언어의 장벽이 충분히 부담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아주 단역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며 지금에 이르렀기 때문에 노력하면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큰 편이다. 그래서 새로운 작품에 임할 때마다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다. 이전보다 더욱 성장하기를 스스로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노력으로 되지 않는 일도 있더라.

공감한다.
할리우드 진출을 못 한 게 죄는 아니다. 잘못도 아니다!(웃음) 이제는 조금 더 편하게 생각하려 한다. 왜 이렇게 노력을 하지 못하냐고 스스로를 옥죄고 싶지는 않다. 10년 뒤에는 가능할 수도 있겠지, 생각하며 마음을 편히 먹었다.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영화가 드디어 개봉한다는 것. 나는 개봉할 때까지 극 중 인물을 마음 한구석에 두고 떠나보내지 않는 편이다. 개봉을 하면 그 인물이 비로소 내 손을 떠난다. 이제는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울적하기도 하지만(웃음) <우상>의 ‘련화’는 너무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것 같다. 어서, 자유로워지고 싶다.(웃음)

사진 제공_CGV아트하우스


2019년 3월 19일 화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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