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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비명을 질러도 내일은 내일의 청바지를 입는다 <명당> 유재명
2018년 9월 21일 금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부산의 연극 무대에서 터를 잡은 유재명은 생활고의 비참함과 연기를 향한 권태가 무엇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아는 배우 중 하나다. 연극과 연출로 20년의 경력을 쌓은 뒤에도, 서울의 영상 매체는 그에게 끝없는 오디션 낙오를 안겨줬을 뿐이다. 그의 삶이 전기를 맞은 건 드라마 <응답하라 1988>(2015)의 ‘학주’역과 연이 닿으면서부터다. 이후 드라마 <욱씨남정기>(2016) <힘쎈여자 도봉순>(2017) <비밀의 숲>(2017) <라이프>(2018)에 연이어 출연했다. 이 드라마가 종영하는 동시에 저 드라마의 막이 오르고, 그가 출연한 세 편의 영화까지 연이어 개봉하는 요즘이다. 개중에도 주목받는 건 추석 연휴를 겨냥한 상업 대작 <명당>일 것이다. 놀랍게도, 이 모든 변화가 일어나는 데 걸린 시간이 불과 4년이다. 20년간의 연극 배우 생활 동안 마음 한편에 켜켜이 쌓였을 법한 좌절을 소주 한 잔으로 털어버리고, “오늘 죽을 것 같아 비명을 질러도 내일은 내일의 청바지를 입는다”는 말로 공력을 쌓아온 그다. 누구도 쉽게 허물 수 없는 단단함이 느껴진다.

요즘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당신만큼 바쁘게 누비는 배우가 있을까. 드라마 <라이프> 종영과 바톤 터치하듯 2부작 <탁구공>이 공개됐고, 영화 <봄이가도> <죄 많은 소녀> <명당>까지 연이어 개봉했다.
일정을 쪼개서 참여한 작품이 마치 농사일을 수확하듯 한 번에 돌아오고 있다. 단편 세 개를 묶은 <봄이가도>와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 제작과정을 거쳐 만든 저예산 독립영화 <죄 많은 소녀> 그리고 추석 시즌 개봉하게 된 대작 상업 영화 <명당>까지, 영화만 세 편이다. 말한 것처럼 드라마 <라이프>를 종영했고, <탁구공>이 새로 방송되는 중이다. 남들이 보면 대단한 욕심쟁이일 것이다. 하지만 그간 무직으로 살다시피 해서인지…(웃음) 작품 제안이 들어왔을 때 거절하면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자꾸만 아깝고, 머릿속에 맴돈다.

<응답하라 1988>의 ‘도롱뇽 아빠’이자 ‘학주’로 큰 사랑을 받았다. 그 뒤로 부쩍 대중과 접점이 넓어진 모양새다.
부산에서 연극만 20년을 했다. 흔히 말하는 영상 매체에서 연기를 선보인 건 이제 막 4년이다. 늦게 시작한 만큼 기회를 소중하게 받아들이려고 하다 보니 많은 일정을 소화하게 됐다. 자칫 대중에게 너무 과소비되고 있다는 느낌을 줄 위험이 있다는 것도 알지만, 내게 제안 들어오는 대본을 보는 순간 ‘아, 이거 하고 싶다’는 생각부터 든다.(웃음) 내 그릇이 작아서 다 담을 수 없었을지언정, 하나하나 전부 매력적인 작품이다.

조승우와 함께한 <명당>에서도 굵직한 배역을 맡았다. 명당을 알아보는 지관 ‘박재상’(극중 조승우)의 곁을 함께하는 친구 ‘구용식’ 역이다.
김명민, 변요한과 함께한 <하루>(2017) 이후로 영화에서 맡은 가장 큰 역할일 것이다. <관상> <궁합> <명당>으로 이어지는 연작 프로젝트가 영화계에서 꽤 큰 프로젝트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요구되는 역할은 아마도 웃음을 주는 감초 같은 역할일 것이라고 지레 판단하던 차였다. 그런데 박희곤 감독이 내 선입관을 단호하게 깨 주셨다. ‘구용식’은 단순히 ‘박재상’을 조력하는 인물이 아니라 자신만의 신념이 있는 남자라고 말이다. 그저 수단 좋은 장사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는 땅을 찾으려는 자들의 욕망과 암투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조연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구용식’ 또한 <명당>의 주체라고 생각하고 연기해달라고 했다. 그 말에 용기가 났고, 재미가 붙었다.


<안시성> <협상> 등 동시기 개봉하는 한국 영화 경쟁작이 많다. 예비 관객에게 <명당>의 매력을 꼽아 준다면.
어쩔 수 없이 팔이 안으로 굽는 거겠지만…(웃음) <명당>은 배우의 조화가 참 좋은 작품이다. 배우의 눈이 하나하나 내 머릿속에 각인돼 있을 정도다. 지성은 사슴 같은 눈망울에 엄청난 욕망을 고여 놓았더라. 그가 그런 ‘칼’도 품고 있는 배우라는 걸 처음 알았다. 문채원은 직접 보니 그가 이래서 사극에 잘 어울리는 배우로 평가받아왔던 거구나 싶더라. (이)원근이는 신인이라 관객 입장에서는 아쉬운 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장에 있던 나는 역할에 진심을 담으려고 하는 그의 고생스러움을 느꼈다. 무릎 꿇고 눈물 흘리는 신을 볼 때는 특히 울컥했다. 조승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가 막히게 중심을 잘 잡았다. 결코 먼저 달려나가지 않더라.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백윤식 선생님은…

백윤식 선생님은?
“어! TV에서 뵌 분이다!” 싶었다.(웃음) <내부자들>(2015)에서 뵌 적은 있지만, 그는 극 중 수석 기자였고 나는 평기자였기 때문에 회의실에 함께 앉아 있는 신 정도에서만 함께 출연했을 뿐이다. 실제로 부딪혀 연기해본 건 처음이다. 사실 하도 오래전부터 그의 팬이라… 좀 더 편하게 대해드리고 싶었지만 마음이 자꾸 경건해졌다.(웃음)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상대 배우를 향한 선하고 따뜻한 감정이 느껴진다.
다들 아주 친해졌다. 마치 가족처럼 정이 들었다. 우리 집 가족은 명절이면 내게 “너 아직도 연극 하냐?”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러면 옆에서 듣고 있던 외삼촌이 “아 놔둬요 거, 알아서 해요”라고 대신 대답해주고, 그 말을 듣던 또다른 외삼촌이 나서서 “너나 알아서 좀 잘해라” 하곤 핀잔을 주는 식이었다.(웃음) <명당> 배우들도 그랬다. 서로 치켜세웠다가, 깎아내렸다가…(웃음)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거다.

조승우와는 인연이 꽤 깊다. 드라마 <라이프>에서도 함께 출연하지 않았나.
둘 다 말이 많은 편은 아니라 ‘슴슴’한 관계라고 할까.(웃음) 하지만 둘 다 무대에서 활동했던 공통점이 있다. 조승우는 두 시간 이상 에너지를 뿜어내야 하는 뮤지컬을 여러 차례 소화한 배우인데, 영상 매체에서 연기할 때는 그 누구보다 절제된 섬세함을 보여준다. 함께 호흡을 맞추면서 굉장히 치밀한 준비 끝에 중심을 잡는다는 걸 알게 됐다.



당신의 경우는 어떤가. <명당>에서 이것만큼은 잘 해냈다고 평가할 만한 게 있다면.
연극을 오래 한 배우는 실수에 민감하다. 공연은 한 번만 실수해도 극 전체가 망가지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자신을 몰아붙이며 강박적으로 연습하는 편이었다. 사실은 그게 날 늘 힘들게 했는데 말이다. 다행히도 <명당>에서는 내 마음대로 연기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지만 속된말로 (핵심적인 장면을) ‘따먹는’ 식의 연기는 하지 않았다. 작품 전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늘 경계하며 연기했다. 그게 내가 가장 잘한 점이 아닌가 한다.

그간 100편 이상의 연극 무대에 선 거로 안다.
따져보니 150편 정도 출연했더라. 주연 뒤의 코러스, 창 든 병사 같은 단역부터 코믹한 조연을 거쳐 나중에는 직접 연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성격도 아주 불 같고 거칠었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배우의 연기를 지적하다가 큰 소리 내며 싸운 적도 있다. 하지만 각박한 서울생활을 하면서 모가 많이 깎였다. 여기(서울)는 너무 무서운 곳이다.(웃음)

결코 녹록지 않은 게 연극배우 생활이라고 들었다. 그럼에도 20년이나 한 우물을 팠다. 생활고는 물론, 권태기도 있었을 것 같다.
젊은 연극배우 대부분이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한다. 정말 가난하고, 힘든 직업이다. 나 역시 3년 전 마지막 연극 무대에서 받은 출연료가…(웃음). 얼마나 적은 수준이었느냐면, 당시 쫑파티 자리에 온 후배 한 놈이 내 출연료 봉투에서 자기 택시비 만원을 빼 갔는데 그걸 본 내가 정색하며 화를 낼 정도로 적었다.(웃음)

그게 불과 3년 전이라니,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씁쓸한 경험이다.
솔직히 말하면 연극배우 생활, 그만둬도 된다. 경험을 해보니 꼭 연극을 한다고 해서 행복하고, 그렇지 않다고 해서 불행한 건 아니다. 다만 그 생활을 계속하고 싶다면 이런 말은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가난하고 힘들지언정, 늘 살아있는 느낌을 받는 게 연극배우의 삶이라고 말이다. ‘이 작품을 선택하면 생활이 안 될 텐데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다고 포기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는데…’ 가슴 속에 요동치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바로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 아니겠나. 물론 결과적으로 인생이 잘 풀린다는 전제 앞에서만 유효한 말이지만, 좌절감은 어떤 방식으로든 극복된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좌절감이 어떤 눈빛을 표현할 때 도움을 준다. 오늘 죽을 것 같다며 비명을 질러도, 내일은 내일의 청바지를 입는 거다. 그래야 한다.



지나치게 멋진 표현 아닌가.(웃음)
나도 4년 전 영상 매체로 넘어오면서 수없이 많은 오디션에서 탈락했다. 연극을 백여 편 출연하고 연출까지 했는데 말이다. 하다가 안 되니 흔히들 말하듯 박카스를 사다가 (심사위원 자리에) 올려둔 적도 있다. 나중에는 ‘에라 모르겠다’ 하며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하는 편한 마음으로 오디셨을 봤는데, 그런 작품과는 꼭 연이 닿더라.

얼마나 얄궂은 일인가…
내가 연기를 못해서 떨어진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미지가 그 작품과 더 잘 어울렸을 뿐이다. 그러니 오디션에서 떨어졌다고 해도 “에이, 떨어졌네!” 하는 정도로만 좌절했으면 좋겠다. 자존감을 해칠 정도로 갈 필요는 없다. 어렵고 힘들지만 연기에도 의외로 답이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만 잘 유지한다면 말이다. 그렇게 내성이 좀 생기고, 좋은 여자친구도 만나면 많은 것들이 나아진다.(웃음)

당신 얘기군.(웃음) 어쨌든 이제는 영상 매체에 완전히 적응했다고 봐도 되겠다.
하지만 여전히 방송국 카메라 앞에 서면 떨린다. 토크쇼 출연 제안도 한 두 번 들어왔는데 전부 거절했다. 그랬더니 작품을 홍보해야 하는 우리 스태프들이 힘들어하더라. 그래서 처음으로 출연한 게 부산 모교에서 진행한 ‘김제동의 톡투유’라는 프로그램이다. (김)제동씨가 워낙 방송을 잘 끌어나가시니, 큰 용기를 냈다.(웃음)

당분간은 연극을 병행할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 같은데.
<명당> 촬영을 마치고 바로 부산에 내려갔다. 두 달 반 정도 체류하면서 공연을 했다. 그리고 올라와서 바로 드라마 <라이프>를 찍은 거다. 과거에 비하면 너무 많이 바빠졌지만, 존경하고 좋아하는 선배들의 건강이 허락하는 한 짬을 내서라도 함께 무대에 오르고 싶다. 그럴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한 삶일 것 같다.




사실, 당신을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다.
뭔가.

드라마 <라이프>에서 당신은 폐원한 경남 진주의료원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긴 대화를 소화했다. 영화 <봄이가도>에서는 세월호 구조 현장에 투입됐다가 홀로 살아남은 구조 대원을 연기했다. 당신이 선택하는 역할 중 다수는 사회적 사건과 어떤 방식으로든 맞닿아있다. 이런 역할을 선택할 때, 심적 부담이 있을 법 한데...
배우가 그런 역할을 선택하는 순간 어떤 부분에서는 족쇄가 채워지는 것일 수도 있다. 살짝 겁이 나긴 한다.(웃음) 하지만 내가 연기하게 될 그 인물만 놓고 보면, 아무 문제도 없다. 그들은 전부 실존하는 인물 누군가일 뿐이다. 외부에서는 어떤 프레임을 씌워서 볼 수 있겠지만, 나는 실제를 연기할 뿐이다. 그것 말고는, 소위 경상도 말로 ‘다 때려 치아뿌라!’ 하면 된다.(웃음)

마지막 질문이다. 요즘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늦잠 자고 일어나 집 청소를 하고, 모든 먼지와 물기를 털어낸 다음 동네를 한 바퀴 산책하는 거다. 그 다음 동네 친구와 당구 한 게임 치고 술 한잔 마시는 것. 그런 걸 할 수 있는 휴식 시간이 이틀만 있었으면 좋겠다. 그럴 때가 가장 행복하다.

2018년 9월 21일 금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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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이종훈 실장(Ultra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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