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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버텼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수입한 영화사 진진 김난숙 대표
2016년 12월 16일 금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영국의 대표적인 영화감독 켄 로치는 <레이닝 스톤>(1993)에서 첫 번째 성찬식을 맞는 일곱 살짜리 딸에게 드레스를 사주려는 아버지를 그린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실직 상태였고, 돈을 벌기 위해 벌인 일마저 곤혹스러운 사고로 돌아오고 만다. 영화사 진진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진실되게 응시해온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을 한국 관객에게 선보이며, 수입 배급사로서 첫 발을 떼었다. 작품은 그 해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꼭 10년이 지난 2016년, 영화사 진진은 다시 한 번 켄 로치 감독의 영화를 수입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은 정교해졌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레이닝 스톤>의 시절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가난과 소외를 마주하는 지금, 동시대를 함께 버텨온 영화사 진진은 다시 한 번 영화로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건넨다. 그 중심에 김난숙 대표가 있다.

먼저 영화사 진진의 10주년을 축하 드린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언론시사회 직전 무대에 올라 기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감사인사, 당연히 해야지.(웃음) 보통 영화 수입 배급사는 10주년쯤 되면 영화제 같은 행사를 한다. 우리가 운영하는 극장이 사라진 마당이긴 하지만 그런 행사를 하면 선뜻 극장 스케줄을 비워주겠다고 한 서울아트시네마도 있었고. 그런데 그런 행사 자체가 진진 멤버들에게 또 하나의 일이 된다는 의견이 있었다. 개봉작 준비로 다들 바쁜데 10주년 행사까지 준비하고 챙기는 건 너무 힘들 것 같다는 두 팀장님의 반대의견이었다. 그래서 약소하게나마 내가 그 자리에서 감사 인사를 했다. 어쨌든 우리는 영화 수입 배급사니까 앞으로도 무엇이든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작품으로 이야기하는 게 가장 정확 한 거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황금종려상을 타면서 10주년 기념 인사를 위한 명분이 섰다.(웃음)
진짜로 운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영화를 사고 나서 칸에서 상을 줬다. 황금종려상을 받은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으로 진진의 역사가 시작됐는데 10년 뒤에 같은 감독이 또 다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을 개봉하게 됐다.(웃음)

정성일 평론가가 참여하는 GV도 진행하는 걸로 안다.
이번 작품 GV는 10주년인 기념인만큼 김영진 선생을 비롯한 많은 영화계 인사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부탁을 드렸다. 특히 정성일 선생은 워낙 진진하고 인연이 있는 분이다. 물론 모든 회사하고 인연이 있으시겠지만(웃음). 동숭동에서 운영하던 영화관 ‘하이퍼텍 나다’를 문 닫을 때 폐관 토크를 해줬고, 삼청동에서 운영하던 ‘씨네코드 선재’를 문 닫을 때 개최했던 허샤오쉬엔 감독 특별전에도 참여해줬다. 게다가 나를 비롯한 1세대 씨네 키즈들에게 정성일은 영화에 대한 치명적인 바이러스(웃음)를 퍼트린 사람이기도 해서.(웃음)
그에 대한 감정이 각별한 것 같다.
정성일은 내가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키노’라는 영화 잡지의 편집장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수익구조 없이) 그런 잡지를 만드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 정성일 당시 편집장의 욕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거기에 더불어 기사를 쓰는 기자들의 피와 땀이 녹아 있다고 생각하니 버릴 수가 없더라. 그 기사들을 쓰느라 얼마나 만성피로에 시달렸을까.(웃음) 그래서 특집이나 기획 기사 몇 개는 꼼꼼하게 읽었는데, 희한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책 한 권을 다 읽는 건 참 힘들었다. 독자도 다 못 읽는 잡지였다.(웃음) 하지만 영화 업계에 몸 담은 사람으로서 ‘우리도 이런 잡지 한 번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욕심과 비전도 생기게 만든 책이었지. 물론 돈이 안 되는 책을 계속 만드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겠지만.

돈이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공감이 느껴진다.(웃음)
나는 계속 돈 안 되는 것만 했다고 할 수는 없다.(웃음) 상대적으로는 행복한 케이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 출장 갈 때마다 헌책방에 들러서 키노, 뿌리깊은나무, 샘이깊은물 같은 잡지를 발견하면, 무조건 산다. 그걸 가지고 오면 남편이 읽지도 않을 걸 왜 자꾸 사오냐고, 좀 갖다 버리라고 할 때가 많은데(웃음) 그럼 나는 ‘네 거나 갖다 버려라’라고 응수하면서 싸운다.(웃음) 돈 안 되는 그 무언가를 계속 하는 사람들에 대한… 뭐 아무튼 그런 묘한 감정이 있다. 요즘은 그런 사람들을 알게 되면 ‘저 사람 뭔가 대안이 있어서 계속 저러고 있나?’하고 자세히 들여다보곤 하는데, 역시나 그래 빚이 많구나, 그럴 줄 알았어. 하고 읊조리게 되는 상황이다. (웃음)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살 때도 회사에 대단한 금전적 이익을 안겨 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텐데.(웃음)
팀장과 상의하고 이 영화를 샀을 경우 마이너스가 얼마인지 손익안을 먼저 짜봤다. 진짜다.(웃음) 게다가 영화 자체를 패키지 딜(한 영화를 팔 때 다른 영화를 끼어 파는 계약 형태)이라는 굉장히 불평등한 계약으로 사야 했던 상황이어서, 애초부터 쉽게 이익이 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이 영화를 사야 되는지 멤버들이 고민도 했었다.

결국엔 샀다.
칸국제영화제에서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고 난 직후에는 사실 각자 소화해야 하는 스케줄이 있었기 때문에 바로 의견 교환을 하지 못 했지만, 그날 저녁에 숙소에 모여 정태원 팀장과 함께 서로의 생각을 물었다. 바로 다음날 그 영화를 살지 안 살지 의사표현을 해야 됐던 상황이기도 했고. 당신, 이번 칸국제영화제에서 단 한 편만 사라고 한다면 뭘 사고 싶어? 그런 질문을 던졌을 때 나와 정태원 팀장 둘 다 꼽았던 게 이 영화다. 선택이 일치했다. 사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현지에서 별점도, 기자평도 너무나 안 좋았던 영화다. 전반적으로 올드하고, 동어반복을 하고 있다는 평이 많았다. 우리 입장에서도 이 영화를 서울에 가져갔을 때 보려고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손해날 걸 알면서도 산 거다. 그러니 비즈니스의 기본이 안 돼있는 거였지.(웃음) 그런데, 손익을 가늠한다고 해서 그대로 된 적은 별로 없었으니까. 또 그런 현실적인 상황과 상관없이 우리는 그 영화가 참 좋았다. ‘그냥’ 사고 싶었다.
‘그냥’은 사실 상당히 많은 이유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웃음)
일단 영화를 보고 둘 다 울었다. 물론 울었다고 영화를 사는 건 아니지만.(웃음) 현지 기자들과 평론가들이 왜 올드하다고 얘기하고, 동어반복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지도 백프로 다 이해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노인네(켄 로치)가 50년 넘도록 왜 똑 같은 애기를 하고 있는가, 그 이유를 생각하게 됐던 거지. 나와 같이 영화를 본 정태원 팀장은 나보다 12살 아래고, 또 나와 성별이 다르니까 그간 똑같이 켄 로치의 작품을 봐 왔다고 하더라도 각자 다른 기억을 품고 있겠지만, 내 경우에는 바로 감독의 <레이닝 스톤>이 떠오르더라. 배관공인 주인공 ‘밥’(브루스 존스)이 자기 딸(줄리 브라운)의 첫 성찬식을 위해 아주 깨끗하고 아름다운 드레스를 사 주려고 하는 내용인데, 영화 전반에 자신의 소중한 딸이 자신과는 좀 다른 삶을 살기를 바라는 ‘밥’의 마음이 담겨 있다. 그런데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니 그 어렸던 딸이 영화 속에서 ‘케이티’로 성장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라. ‘케이티’가 하는 대사중에도 “우리 엄마가 이런 상황을 보면 어떠실까”하는 부분도 있고.

켄 로치 감독의 철학에 상당부분 동의하는 모양이다.
켄 로치는 가난했던 아버지 세대 이후의 자식 세대는 무언가 좀 더 나아지고 달라지길 바라면서 영화를 만들었는데, 지금도까지도 여전히 가난이 존재한다는 걸 목격하고 있는 거다. 그러니 계속 비슷한 얘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우리는 이미 한 국가의 시스템은 쉽게 변하지 않는 다는 걸 안다. 그걸 변화시킬 힘은 결국 사람들에게서 나와야 한다. 그러려면 어떤 사람이 곁에 있어야 되는 걸까? 그런 질문을 해 나가다 보니 결국 ‘케이티’와 ‘다니엘’같은 이웃 사이가 아닐까 싶더라. 영화를 보는 내내 그 둘이 이웃으로 존재한다는 게 나는 너무 좋았다. 설령 ‘다니엘’이 죽어도 ‘케이티’는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당장은 배고픔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계속 매춘을 할 수밖에 없더라도, ‘다니엘’이 베풀어준 온기를 기억하면 언젠가는 자기를 무너뜨리지 않는 방법을 찾아나갈 수 있지 않을까.

따뜻한 이웃을 말하는 영화가 와 닿았던 셈이다. 영화사 진진을 함께 시작한 원년 멤버들과의 관계가 연상되기도 한다.
으흐흠.(웃음) 그럴 수도 있고. 우리 진진 멤버들 참 좋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가능한 한 회사에 일찍 나오는 편이다. 사무실이 좀 추운 편이라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에 이곳이 따뜻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먼저 와서 빨리 불을 떼 놓고 싶다. 그런데 가끔 나보다 더 일찍 나와서 설거지까지 싹 해놓는 팀장님도 있다. 여름에는 나서서 환기하고 냉방도 시켜놓고 그런다. 이런 사람들이 곁에 있으니까, 사무실에 일찍 나오고 싶은 거겠지.(웃음)

인터뷰 하기 전에 인사했던 장선영 차장, 정태원 팀장은 10년 이상 함께 하고 있고 들었다.
그러니까. 이따 우리 차장님, 팀장님 인터뷰도 꼭 해줘야 한다.(웃음) 그런데 정태원 팀장님은 더 좋은 회사에 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인데 왜 못 가고 여기서 서성대고 있는지 모르겠다.(웃음) 장선영 차장님도 예전에 다른 홍보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던 걸로 아는데 왜 못 갔지?(웃음) 아마 본인 스스로들도 왜 못 가고 있는가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가 어정쩡하게 시점을 놓치게 된 것 같다.(웃음)
 왼쪽부터 정태원 팀장, 김난숙 대표, 장선영 차장
왼쪽부터 정태원 팀장, 김난숙 대표, 장선영 차장
잠시 후에 제가 대신 질문해주도록 하겠다.(웃음) 세 사람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 된 건가.
장선영 차장은 내가 대우영상산업단에서 일하다가 동숭아트센터 극장담당자로 이직했던 97년쯤, 아닌가 96년인가? 기억이 잘 안 나네.(웃음) 아무튼 그때 이미 동숭아트센터에서 회사 선임으로 있었던 사람이다. 처음에는 영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 장선영 차장이 5시 30분부터 짐을 싸고, 55분쯤 되면 나갈 준비를 하고, 6시 땡 하면 칼같이 퇴근을 해서.(웃음) 게다가 당시에는 내가 너무너무 싫었다고 하더라. 대기업에서 와서 잘난 척 해서 재수 없었다고.(웃음)

회사에서 잘난 척 하고 그랬나.(웃음)
당연히 했지. 지금은 진짜 사람 많이 됐다.(웃음) 당시 장선영 차장은 나보다 10살 어리고 또 경리직이었지만, 극장 시간표를 짜는 일부터 매표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건지를 다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배우게 되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정태원 차장은 학교 후밴데, 동숭아트센터에 잠깐 아르바이트로 근무한 적이 있어서 얼굴만 알던 사이였다. 별로 친하지도 않던 사이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전화가 와서는 자기가 이제 막 제대를 했고 영화계에서 일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더라. 이쪽에서 일 안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경제적으로)좋지 않을 테니까. 다른 분야에서 일 하는게 나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도 굳이 영화 쪽으로 오고 싶다기에 그럼 대기업에 가라고 조언해줬다. 그 다음에 전화가 와서 메가박스에 취직하게 됐다고 하더라. 그러고 잘 다니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말하기를 극장에서 3교대 근무 하는 게 너무 힘들고 피곤하다고 하더라고. 그때 마침 동숭아트센터에서 배급 담당자를 필요로 하던 때여서, 극장 업무 말고 외화 수입과 배급을 해볼 생각 없냐고 제안했다. 앞으로 영화쪽 일을 계속 할 사람이라면 콘텐츠를 직접 구매하고 유통하는 쪽에 몸을 담는 게 본인에게 더 남는 경력이 될 것 같았다. 게다가 당시 동숭아트센터는 230석짜리 예술영화 전용 극장을 두 개나 갖고 있었기 때문에 원한다면 극장일도 놓지 않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영화에 대한 업무를 전방위적으로 다 익힐 수 있는 기회였다. 그렇게 세 사람이 만나게 됐다.

동숭아트센터에서 시작된 인연이 영화사 진진으로 이어진 모양이다.
그렇다. 원년 멤버는 여러 사람 더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지금 CGV 아트하우스에 있다. 동숭아트센터에 있을 당시 내가 직접 뽑아서 6년 정도 같이 일하다가 진진까지 함께 왔는데 한 달 정도 일 하다가 외화보다는 한국영화를 하고 싶다고 나갔다. 또 진진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기 시작해서 7년간 함께 일한 분도 있는데 지금은 그린나래미디어에 몸 담고 있다. 그 분은 퇴직할 때 진진에서 총 2222일간 있었다고 말하더라.(웃음) 그걸 왜 셌냐고 물어보니까 “센 건 아니고 퇴직금 정산서에 써있던데요”라고 말하던 기억도 난다.(웃음) 또 그 사람의 사수였던, 지금은 아이 키우면서 드라마 작가를 하려는 분도 있었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서 10년차를 맞았다. 그간 몇 작품을 개봉했는지 궁금하다.
창립 이래 지금까지 126편을 개봉했다. 평균적으로는 연간 13, 14편을 개봉 한 셈이고, 통산 3주에 한 편씩 개봉 한 거다. 대개 영화 흥행이 잘 된다 싶은 해에는 7, 8편 개봉 하면 한 해가 간다. 그런데 계속 성적이 좋지 않고 작품이 극장에서 빠르게 하차하는 경우는 자꾸 새로운 것들을 개봉하게 돼서, 그러면 13, 14편씩 된다. 그런데 올 해는 16편으로 제일 많더라.(웃음) 물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2008)같은 재개봉작도 있었지만.

주로 외화를 중심으로 수입배급하지만 <야근 대신 뜨개질>이나 <물숨>같은 한국 영화도 눈에 띈다.
한국영화, 그 중에서도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장편이나 단편 작품은 동숭아트센터때부터 계속 개봉해왔다고 봐야 한다. 특히 송일곤 감독의 <간과 감자>(1997),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2>(1997)를 비롯해서 곧 <마스터>를 개봉하는 조의석 감독, 또 박찬욱 감독의 단편들을 개봉했다. 조의석 감독이 단편 <판타트로피칼>(1999)을 들고 왔을 때는 오, 이사람 나중에 대단하겠는데? 근데 감독이 왜 이렇게 잘 생겼어? 라고 말하곤 했는데.(웃음) 당시에는 극장을 가지고 있는 회사였기 때문에, 한국 영화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는 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동숭아트센터에서 그런 모토를 가지고 일하던 팀이 그대로 분사해서 진진으로 왔기 때문에 당연히 한국 영화에 대한 관심이 유지 됐다. 최근에는 초저예산으로 만들어진 한국 독립영화들이 개봉 할 수 있도록 우리가 투자하고 배급하는 형식을 취한다. <야근 대신 뜨개질>도 그런 맥락에서 개봉하게 된 거다. 그런데 당시 진진 멤버들은 영화의 스코어가 좀 낮을 것 같다고 걱정 하더라.(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진진이 배급을 맡아서 개봉시켰다.
<야근 대신 뜨개질>을 연출한 박소현감독은 일전에 우리가 개봉한 김명준 감독의 다큐멘터리 <우리학교>(2006)에서 조연출로 일했던 사람이다. 앞선 인연이 있었던 거다. 진진 입장에서 그 작품은 우리 멤버들의 생각을 알 수 있었던 계기를 준 측면이 있다. 재일조선인 학교를 다루는 영화다보니 당시 군부대 쪽에 오래 산 우리쪽 마케팅 담당자는 “이 영화 빨갱이 영화 같아서 홍보하기 싫다”고 할 정도로 솔직한 이야기가 많이 오갔으니까. 결과적으로 작품이 잘 됐고, 진진 멤버들이 다같이 홋카이도에 있는 재일조선인 학교의 여름 운동회에 찾아 간 적도 있다.
각별한 기억이 있는 작품을 함께 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그렇다. 그 당시에 참 울컥했던 기억이 있다. 운동회가 다 끝나고 모두 다같이 청소를 하는데, 교감선생님이 진진 멤버들에게 만국기 사이에 있는 인공기를 못 만지게 하더라.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혹시라도 인공기 만지는 사진이 찍혀서 한국에 돌아갔을 때 불편하고 이상한 상황에 휘말리지 않을까봐 그렇다고 하더라. 참 고마웠다. 그렇게까지 우리를 생각해 주다니.(웃음) 박소현 감독은 그 시절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사이였기 때문에 각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느 날 <야근 대신 뜨개질>을 들고 진진에 찾아왔다. 트래블러스맵이라는 회사에서 일하면서 이 영화를 완성해낸 것 자체가 긴 터널을 빠져 나오는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개인적인 아픈 사정도 있었고. 그 얘길 듣는데 ‘그래, 이건 해야겠다’ 싶었다. 사람 인연이라는 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웃음) 일부 멤버들은 다소 반대 했어도, <우리학교>를 같이 개봉하고 홋카이도까지 같이 다녀왔던 장선영 차장과 정태원 팀장에게 저간의 사정을 얘기했다. 그렇게 진행하게 된 거다.

철저하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본래 모든 일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다. 물론 회사는 손해 봤지.(웃음) 그래도 <야근 대신 뜨개질>로 박소현 감독이 입봉할 수 있었고, 앞으로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면 진진은 <우리학교>에 대한 빚을 갚은 거라고 생각한다. 비슷한 경우가 또 있다. 오멸 감독의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2012)(이하 ‘<지슬>’)이다. 애초에 우리가 배급하기로 미리 계약이 돼 있는 상태였는데 중간에 CGV가 개봉에 드는 모든 돈을 다 대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오멸 감독이 거절했다. 대기업이 예술 영화 배급을 맡는 건 맞지 않다는 게 명분이었는데, 어쩌면 그것도 진진이 그간 오멸 감독의 <어이그, 저 귓것,>(2009) <뽕돌>(2010)같은 초저예산 영화를 개봉해줬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CGV는 무비꼴라주라는 로고를 넣는 것으로 마무리 했고, <지슬>의 수익은 진진과 오멸 감독이 나눠 가질 수 있었지.

CGV라는 대기업이 아트하우스라는 이름으로 예술영화 배급과 상영에까지 발을 넓힌 지도 이미 한참이다.
아트하우스가 생기면서 독립, 예술영화 만드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훨씬 유통망이 큰 그 쪽으로 가게 된 건 맞다. 그래서 정윤석 감독의 <논픽션 다이어리>(2013)와 박경근 감독의 <철의 꿈>(2013)을 하고 나서 2015년에는 거의 한국 영화를 안 했다. 올해 들어서 아트하우스에서 거절 당한 영화들을 조금씩 배급한 정도다. 제주 해녀 이야기 다룬 <물숨>도 그런 경우고. 그런데 이런 상황에 대한 우려는 이미 <지슬>을 개봉할 당시부터 오멸 감독이 했던 거다. 앞으로 진진 못 먹고 살 것 같은데? 아트하우스가 다 할 것 같은데? 이제 진짜 어떻게 하실 거예요? 하고 말이다.(웃음)

뭐라고 대답했나.
뭘 어떻게 해요? 모르겠어요. 그랬다.(웃음) 감독 입장에서는 좀 더 많은 스크린에서 쾌적한 환경을 갖춘 상태로 자기 영화를 틀 수 있으니 좋은 것 아니냐고 되묻긴 했었지. 지금 우리 걱정 해 주는 거냐고 말이다.(웃음) 아트하우스가 만들어가는 영화 시장이 무조건 영화계에 해가 되거나 나쁜 건 아니니까. 다만 오멸 감독이 했던 말 중에 여전히 기억에 남는 건 이런 거다. 물론 영화를 개봉하게 된 건 좋지만, 이렇게 대기업이 투자 배급까지 다 나서는 상황이 지속되면 앞으로는 꼭 좋지만은 않을 것 같다고 말이다. 아마 대기업의 자본이 자기 콘텐츠에 영향을 미친다거나, 아니면 자기 스스로 창작 단계에서 검열을 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대기업 담론을 넘어서 넷플릭스라는 신인류(웃음)까지 등장했다.
사실 넷플릭스 같은 기업이 자리 잡으면 우리 같은 콘텐츠 중간 유통업자는 필요 없게 되는 거다.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가지 않아도 자기들만의 플랫폼을 통해 스트리밍 서비스로 콘텐츠를 전달하니까. 게다가 넷플릭스라는 곳이 제작자에게 너무나 많은 돈을 주는 곳이라서, 앞으로는 그들이 만들(만든) 영화와 그들 밖에서 만들어질 영화로 구분되는 새로운 기준이 생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본에서 찍은 <심야식당 2>도 넷플릭스가 돈을 대 제작했다. 우리 입장에서도 당장 그들이 투자한 <옥자>가 어떤 방식으로 개봉할지가 관건인 상황이다.

이런 상황을 대처해 나갈 방법을 찾는 게 난제다.
내가 역행할 수 없는 구조상의 변화들에 대해서 너무 많은 고민을 하진 않는다. 지금 할 수 있는 것들 안에서 그냥 최선을 다 하는 게 전부다. 돈도 없고.(웃음) 전략도 없다. 요즘 모든 수입배급사가 인터뷰 하는 내용들이 다 똑같다. 나도 다 읽어 보는 편인데, 다들 전략 없는 것이 전략이다.(웃음) 다만, 과거에 TV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할리우드 스튜디오들도 관객이 극장을 찾지 않으면 어쩌나 우려하던 때가 있다. 그런데 그런 우려가 오히려 그들에게 TV에서는 보여줄 수 없는 영화적인 가치가 도대체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 좀 더 영화적인 스펙타클을 완성해 낸 거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자기혁신을 하지 못한다면, 사라져야 하는 거다. 그런 시류를 거부할 수는 없다. 다만 여전히 극장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창작자든 배우든 관객이든 그 사람들이 대안을 만들어 나갈 거라고 본다.

현재 상황에서 수입 배급사 대표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GV를 꼭 가는 거다. 창작자와 관객이 어떤 피드백을 주고 받는지를 보면 공부가 많이 된다. 감독이 저 얘기 때문에 기분이 되게 좋겠는데? 혹은 상처받겠는데? 이런 것들을 가늠하면서 앞으로 선택할 작품들을 선택해 나가는 셈이다.

최근 시작한 수입배급사협의회도 ‘할 수 있는 일’중에 하나였다고 본다.
아 그거, 사실 진짜 하고싶지 않았던 건데.(웃음) 처음에는 똑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경쟁자들끼리 모여서 무엇을 할 수 있겠냐, 잘 안 될 것 같다는 말을 제일 먼저 했을 정도다. 그런데, 적어도 그 경쟁자들이 모여서 이야기 하는 것 말고는 별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영화를 한 번 광고하는 데도 CGV페이스북에 돈을 내야 된다. 개봉작을 한 번 노출할 때, 두 번 노출 할 때마다 가격이 뛴다. 대체 이런 상황은 뭐지?(웃음) 이 구조 안에서는 경쟁자라는 개념이 무의미할 만큼 다들 너무 힘들어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러면 어떻게 할 건가?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구나. 그러려면 모여서 얘길 해야 하는 거고. 수입배급사협의회는 딱 그 정도 수준이다. 지금 까지는.
부산국제영화제때 발족을 알린 이후로 조금 더 진척된 상황이 있다면.
모여서 얘기할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가입비 50만원을 내고 월 5만원씩 회비를 납부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나는 그런 제안이 나왔을 때 진짜 돈을 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했는데, 부산국제영화제 당시에 수입배급사협의회 출범에 ‘동의’한다는 회사가 28개였다면 진짜 가입비와 회비까지 낸 회사는 10개 정도다. 얼핏 보면 적어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오히려 예상보다 훨씬 많이들 참여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 10개 회사가 지금 굉장히 열심히 활약하는 곳이라는 점이 고무적이다. 우리를 포함해 찬란, 그린나래미디어, 엣나인은 물론이고 최근 그룹 오아시스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슈퍼소닉>을 개봉한 씨네룩스, <더 랍스터>를 개봉한 콘텐츠게이트 등등이다. 예술 영화를 계속 수입 배급 하고싶어 하는 이 작은 회사들이, 이렇게나 생존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최소한 이런 집단이 협의회라는 이름으로 모였으니, 그 전보다는 한 번이라도 상대에게 상처를 덜 입히는 방법으로 일을 하려고 고민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이다. 시작이 반이다. 그럼에도 당분간은 대기업이 투자 배급은 물론 홍보까지 잠식해 나가는 공고한 구조에 큰 균열이 생기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겠지. 어찌 보면 그들 대기업은 지난 수년간 우리 같은 중소규모의 수입배급사들이 발로 뛰어가면서 만들어낸 정보, 예를 들면 관객층에 따른 영화 선호 경향 같은 것들을 빅데이터 기술을 통해 홀로 독식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들의 힘은 앞으로 더욱 밀도 있고 탄탄하게 구축될 것 같다. 특히나 앞서 언급한 CGV의 페이스북 영화 홍보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이제는 온라인 홍보쪽에서도 대기업의 힘이 상당히 세졌다. 때문에 영화를 홍보하려면 그쪽에서 원하는 내용의 기사와 마케팅 포인트를 맞춰야 하는 고충이 생겼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개봉을 앞두고 진진 내부에서도 반드시 CGV 페이스북에 노출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노출 효과가 상당히 크다고 말이다. 그런데 클릭수가 너무 낮을 것 같다며 거절 당했다. 결국 그 돈으로 핫 팩 2만개 정도를 샀다. 거기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 스티커를 하나하나 붙여서 촛불 시위가 벌어지는 광장에 뿌려버렸다.(웃음) 멤버들이 아침마다 시간을 내서 500개씩, 1000개씩 스티커를 붙였는데 아마 다들 ‘이게 뭐 하는 짓이지’하고 생각했지.(웃음) 살아남는 방법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나가야 하는 과정이라는 건 분명한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작년에는 극장 씨네코드 선재를 문 닫기도 했다.
그랬지. 하지만 극장에 대한 계획을 아예 접은 건 아니다. 프로그래머든 큐레이터든 영화와 관련된 전문직을 창출해내는 극장을 세우자는 장기적인 비전을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중이다. 다만 필요한 돈은 개개인의 주머니에서 나와야 한다고 본다. 그게 쉽지 않은 문제다. 정부 지원금을 받기 시작하면 정부 비판적 영화를 상영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전에 이미 다 겪어봐서 알고 있으니까.(웃음) 씨네코드 선재에서 이상호 감독의 <다이빙벨>을 상영한 적이 있는데 그 후로 이상하게 영진위의 지원금을 못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 같은?(웃음) 그렇다고 대기업 돈으로 극장을 세우고 운영하는 것도 안 될 일인 게, 대기업만큼 정부 눈치를 보는 곳이 또 어딨나.(웃음) 이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결국 독립예술영화 전용 극장을 세우는 건 불가능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지만.(웃음) 난 이렇게 말해버린다. 어차피 지금 안 되는 거 서로 다 아는데, 굳이 불가능하다고 콕 짚어서 얘기 하지 말자고 말이다. 또 1, 2년 안에 해결해야 된단 생각도 하지 말자고 그런다. 5년 뒤, 10년 뒤에 그런 극장이 생기면 또 어떤가. 자체적으로 고용을 창출하고 수익도 발생하게끔 만들고, 그런 바탕에 힘입어 어떤 영화든 자유롭게 틀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장기적인 계획을 생각 할 시점이라고 본다. 다만 이제는 꼭 내가 운영하지 않아도 후배들이 맡아서 더 잘 해줄 수 있다면 그쪽이 좋을 것 같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면서 지낸다.(웃음)
당분간은 구체적인 계획이 없는 모양이다.
씨네코드 선재를 문 닫고 지난 1년 동안 극장을 해보자는 제안을 꽤 많이 받았다. 홍대 부근 건물 1층에서 본인은 레스토랑을 할 테니 나더러 그 외 공간에서 극장을 운영하라는 분도 있었고. 이미 두 세 군데에서 극장을 운영하고 있는 건물주에게서도 연락이 왔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시작하면 씨네코드 선재를 폐관할 때와 비슷한 일이 반복될 것 같더라. 수익의 선순환 구조를 확보하지 못 한 상태에서 건물주 마음먹기에 따라 극장의 존폐여부가 좌우되는 것 말이다. 시작 단계에서는 다들 돈 못 벌어도 상관 없다고 하지만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다.(웃음)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극장에 관한 생각은 늘 하고 있다. 35mm영사기와 16mm영사기도 아직 그대로 갖고 있으니까.(웃음)

극장에 대한 장기적인 계획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할 영화 매니아들이 많을 것 같다.(웃음) 마지막 질문이다. 요즘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들이 있다면.
6학년짜리 딸이 있는데 요즘은 그 애랑 있는 시간들이 가장 재밌다. 아직은 그렇다.(웃음) 주변 친구들은 곧 중학생이 되면 집에서 정신병자를 하나 만나게 될 거라고(웃음) 하던데. 아무튼 요즘에 들어서야 딸한테 점수를 좀 받은 느낌이다. 내가 6년동안 녹색 어머니 활동을 했거든. 늘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해서 딸의 등교길은 잘 못 보지만, 녹색 어머니 활동을 하면 내 딸 친구들이 등교하는 건 볼 수 있더라. 그 애들과 인사하게 된 게 참 좋았다. 딸이 초등학교 1학년때 시작한 일인데, 처음에는 지원자가 모자라다고 해서 자원 했다가 딸이 3학년 되던 해에는 아예 2만 5천원 주고 유니폼을 샀고(웃음) 결국 6년간 개근했다. 딸이 그걸 보고는 이제야 좀 인정해주는 것 같다. 그래, 김난숙이 자기랑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아니어도, 적어도 자기에 대한 마음은 있구나 싶었던 거지.(웃음) 언젠가 본인도 결혼을 하겠지만 그 때 다시 돌이켜본다고 해도 아, 그 여자, 적어도 자기에게 노력 하려는 태도는 가진 사람이었다는 정도는 보여준 것 같다.(웃음)

마지막으로, 대표님에게 영화사 진진의 10주년이란?
(웃으며) 잘, 버텼다!

관련인터뷰: [간단인터뷰] 대박 날 때까지! 영화사 진진 장선영, 정태원
http://www.movist.com/star3d/read.asp?type=32&id=24893


2016년 12월 16일 금요일 | 글_박꽃 기자(pgot@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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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김재윤 실장(Z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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