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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효율을 버리고 돌아오다 <밀정> 김지운 감독
2016년 9월 6일 화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성에 찰 때까지 계속 찍던 김지운 감독이 변했다. ‘합리적’이란 말을 듣는다.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감정과 느낌만 전달되면 배우를 더 밀어붙이지 않고 오케이 사인을 냈다. 영화적 열망이 식었다고 느낄 때 할리우드로 향했고, 보다 효율적인 작업 방식을 접했다. 자기 작업 방식을 반성하면서 만든 영화가 <밀정>이다.

상당히 피곤해 보인다.
영화를 두 편 개봉한 것 같다.(웃음) 오랜만에 영화를 개봉하니까 행사가 정말 많아졌다. 매체도 많아졌고. 대체 왜 이렇게 된 건가?(웃음) <밀정> 전에는 제작발표회도 안했다. 이런 행사를 좋아하고 즐기는 감독도 있겠지만 나는 영화를 만드는 일 말고는 다 너무 힘들다. 그런데 이제는 감독에게도 연기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똑같은 얘기를 마치 지금 처음 하는 것처럼 해야 하니까.(웃음) 그런 게 대중영화를 만드는 감독에게 필요한 덕목이자 재능 중 하나이긴 하다. 영화를 만들 때도 어디서 듣고 본 것 같지만 마치 새로운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니까.(웃음)

모처럼 한국에서 개봉한 장편영화다. 주변 반응이 어떤가.
대체로 평이 좋다. 그래서 나도 제작진도 고무 받은 상태다. 물론 내가 영화적으로 도달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뼈저리게 잘 알고 있다. 찍으면서 내 한계에 봉착한 느낌 때문에 절망했고, 상대적으로 계속 전진해 나가는 송강호를 보면서 ‘저 괴물 같은 인간의 한계는 도대체 어딜까’하는 생각도 끊임없이 되뇌었다.(웃음) 그럼에도 이제는 다 나온 결과니까.

<밀정>을 만들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영화를 ‘영화적’으로 만들어주는 요소들이 있다. 미세하게 의도된 소리들, 그 소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뿐만 아니라 카메라를 어떤 위치에 위치시킬까, 인물과 도구는 어떻게 배치할까, 공간의 색감은 어떻게 가져갈까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것들을 잘 조화시키는 게 ‘시네마틱’이다. 그 걸 형성하는데 가장 주안점을 뒀다. 특히 인물이 세 발자국 걸어갈 때부터 에코를 넣어달라든지, 편집을 하다가 두 프레임을 더 잘라 달라고 했다가 다시 세 프레임을 집어넣어 달라고 한다던가 하는 상당히 섬세한 작업에도 신경을 썼다. 남들이 봤을 때는 큰 영향이 없어 보이는 것도 나에겐 소중한 작업이다. 그것들이 다 갖춰졌느냐 아니냐가 내 영화를 결정짓는다.
‘시네마틱’을 구성하는 요소 중에서도 이번에는 서사가 강했다. 그 점이 전작과 가장 다르게 느껴진다.
이전까지는 나의 ‘영화적 자의식’이 중요했다. 영상미와 미장센을 중시해온 나만의 스타일 말이다. <장화, 홍련>(2003)때도 누가 들으면 황당할 수 있겠지만 나는 “벽지가 말을 한다”고 말 할 정도로 미장센을 통해 관객에게 말을 건네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다. 내 다른 작품들에도 그런 인장이 분명하다. 사실 내가 ‘씨네필’까진 몰라도(웃음) 씨네 매니아 출신이다. 영화광이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특유의 미장센들로 인해 받았던 감동을 다른 사람들에게 되돌려주고 싶은 열망이 크다. 나처럼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도 좋은 영화를 많이 보면 감독으로서 잘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근데 잠깐, 무슨 얘길 하려다가 지금 이런 말까지 하고 있는 거지?(웃음)

‘서사’가 강해졌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웃음)
아. 그런데 아무튼 <밀정>에서는 태도가 좀 바뀌었다. 기존의 내 스타일은 좀 덜어냈다. 그간 비주얼을 보여주는 일에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이 장면에서 무엇이 필요한가’부터 생각했다. 그래서 배우에게 디렉션을 줄 때도 여기에서는 이런 감정이 필요하다고 정확하게 말해줬다. 아무래도 의열단원을 소재로 한 영화다 보니 그들의 생각을 자꾸 그려보고 따라가게 됐던 것 같다. 그 꽃다운 나이에, 타협과 처세 없이 잃었던 무언가(조국)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던지니 말이다. 내가 배우들에게 그 인물의 감정이 왜 그런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해 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자연스럽게 그 감정들에 의해 서사가 구축 되더라. 물론 이렇게 내 기존 스타일을 많이 포기했다고 생각하는데도 불구하고 <밀정>은 여전히 김지운표 영화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웃음)

본인 스타일을 많이 포기했다는 건 어떤 뜻인가.
처음에는 <밀정>을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스파이물로 규정짓고 찍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콜드느와르’였다. 그런데 의열단이 작전을 실패하게 되면서 단원들의 생존이 위협받는 대목으로 가니까, 영화 전반의 분위기가 뜨거워지더라. 그 인물의 심정에 이입하게 되는 거지. 작전에 실패했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을지도 상상하게 되고. 그들 삶의 진정성과 치열함이 나에게 작용된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감독의 자의식을 너무 많이 넣어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뜨거운 쪽으로 흘러가는 영화의 흐름을 훼손하면 안 되겠다 싶더라. 그런 마음가짐이 티 나는 곳이 기차씬 이후부터다. 의열단원들의 이야기를 정직하게 그려 보자는 태도로 변해버렸다.(웃음)
어느 정도는 ‘기꺼이’ 포기한 것 같다. 영화의 대중성을 고민한 결과인가.
일단 이 영화가 100억짜리 프로젝트로 결정됐을 때 이건 대중성 있게 가야겠구나 하고 이미 생각했다.(웃음) 농담이다. 그보다 중요했던 건, <밀정>이 일제강점기를 다루는, 어느 정도는 ‘메시지 있는’ 영화라는 거다. 그런데 이게 강요처럼 느껴지는 순간 ‘국뽕’영화가 된다. 그건 싫었다. 강요하는 느낌을 절제하면서도 가장 대중적인 화법을 통해 관객들이 이 이야기에 설득 당하게끔 만드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계몽적이지 않게, 메시지가 지나치거나 반대로 모자라지 않도록, 여러 가지 요소들을 끊임없이 조율하고 안배했다. 그런 과정 자체가 내가 대중성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는 지점이다. 특히 관객들의 만족도가 가장 높다고 하는 서사의 자기 완결성, 그걸 제대로 구현해보고자 했다. 그 시대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따라갔다. 다만 그러면서도 아주 나의 것을 버리지는 않았기에,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시도했다.

덕분에 작품이 전반적으로 세련된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아마 내 노력을 좋게 봐줬기 때문일 거다.(웃음)

출연한 배우들의 매력이 잘 살았다.
좋은 연기자들을 캐스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마음이 편했다.(웃음) 역시 영화는 배우를, 즉 인물을 따라가는 예술이다.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도 정말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그간 나의 영화적 스타일 못지않게 배우가 잘 드러나는 작업 방식을 추구해왔다. 내가 미처 표현하지 못한 것들은 배우가 연기의 영역으로 보여줄 수 있고, 텍스트로 다 전달하지 못한 이야기를 형성해 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배우의 연기력 뿐만 아니라 카리스마나 개인적 매력 같은 것들이 골고루 다 필요하다. 그것이 어떻게 하면 잘 드러날까를 고민하면서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내가 어릴 때 영화를 좋아하게 된 것도 제임스 딘이니, 스티브 맥퀸이니, 로버트 드니로니 하는 배우들이 보여주는 표정이나 매혹적인 순간들 덕분이니까. 당시엔 연출이 뭔지 카메라가 뭔지도 몰랐다.(웃음) 특히 이번에는 그런 배우들이 모여 있을 때 어떤 연기 앙상블을 만들어 낼 것인지 까지 고민했다. 그래서 공유와 엄태구라는 배우를 캐스팅하는 모험을 한 거다. 그 위치에 집어넣었을 때 상당히 새롭고, 생소한 느낌을 주는 인물을 찾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송강호, 이병헌, 박희순처럼 익히 알고 있는 배우들과 붙어서도 그 나름의 조화를 이뤄낼 수 있는지가 중요했고. 그런 부분에서 <밀정>은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지 않았나 자평한다.

공유와 엄태구의 캐스팅을 ‘모험’이라고 했다.
그렇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그 친구들은 송강호, 이병헌, 박희순과 연기로 경합해야 한다. 그런데 동시에 그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감동 받았던 세대이기도 하다. 선배와 함께 연기 하는 게 로망이자 두려움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밀정> 이전에 공유와 송강호의 조합을 누가 상상 했겠는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거다. 이런 걸 모험이라고 표현 한 거다. ‘하시모토’역의 엄태구도 마찬가지다. 사실 극의 긴장감을 유지시킬 수 있는 기능을 해줄 인물은 많다. 그런데도 스크린에서 좀 생소해 보일 수는 있는 엄태구를 택한 것, 그게 모험이다. 결국 엄태구는 자기만 보여줄 수 있는 이상하고 기이한 에너지를 잘 표현했다. 공유와 엄태구 같은 친구들이 <밀정>에 출연한 다른 선배들의 연기수준에 맞게끔 앙상블을 이뤄냈다.
공유를 ‘김우진’역할에 캐스팅한 이유는 뭔가.
‘김우진’은 그리 영웅적인 캐릭터는 아니다. 전위적이고 공격적인 항일단체에 속해있는 것 치고는 다소 연약해 보이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이뤄내야 할 임무 앞에서 자기의 의지와 용기를 끊임없이 끌어 올리려고 하는 인물이다. 공유가 그 느낌을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 곳곳에 그런 그의 색깔이 묻어난다. ‘연계순’(한지민)을 처음 만났을 때 ‘츤데레’처럼 까칠하게 굴면서도 카메라 포를 뒤집어 쓰고 그녀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어준다. 측은지심과 연민의 정서를 갖고 있는 거다. 기차 안에서도 거사를 끝내고 위풍당당하게 자리에 앉는 게 아니라, 다소 지치고 근심 어린 표정을 짓는다. 자신이 죽인 ‘조회령’(신성록)이 앉았던 자리에서 창밖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경성역에서 잡혀가는 연계순을 바라보는 애달픈 시선도 마찬가지다. 이런 느낌을 잘 살릴 수 있는 배우를 찾았고, 그러면서도 그 배역에 들어가기에는 좀 신선한 느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조건들을 다 공유할 수 있는 배우(웃음)가 공유였다. 실제로도 소화를 잘 했다. 아마 <밀정>이 공유에게는 연기 인생에 전기를 제공할만한 영화가 되지 않을까. 관객 입장에서도 ‘공유의 재발견’이라고 받아들여 주셨으면 한다. 뿐만 아니라 ‘엄태구의 발견’으로도 자리매김 했으면. (웃음)

‘연계순’ 역의 한지민이 기차에서 ‘하시모토’의 검문을 피하기 위해 가슴을 노출하고 담배를 무는 장면이 있다.
기억을 돌이켜보면 연계순은 약국에서 이미 하시모토와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당시에는 그녀가 상당히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 이미지와 정반대되는 느낌을 주기 위해 그런 설정을 넣은 거다. 결코 다른 목적이 있어서는 아니다. 두 사람이 과거에 만났다는 걸 좀 더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플래시 컷을 넣을까 하다가, 그건 좀 너무 촌스럽고, 그렇잖아.(웃음) 관객도 이들이 약국에서 만났던 사이라는 걸 떠올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설명이 부족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아예 안 나온 건 아니니까.

미국 활동을 한 이후로 합리적이어 졌다는 평가를 듣는다.(웃음)
일단 미국을 간 것 자체가, 한국에서 영화로 모든 걸 다 해봤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이하 ‘놈놈놈’)을 찍고 나서부터 영화적 열망이 조금씩 식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악마를 보았다>(2010)를 만들었는데, 물론 한국 관객들은 싫어하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웃음) 영화적 기교로 봤을 땐 내 후기 영화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것까지 다 찍고 나서는 그 영화의 소재와 주제 때문에 정말 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놈놈놈’때부터 이어져온 침체기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할리우드에서는 <장화, 홍련>(2003) 이전부터 리메이크 오퍼가 들어왔다. 한창 미국에 호러 영화 붐이 일 때라서 비슷한 시나리오들이 많이 들어왔고, <달콤한 인생>을 만들고 나서는 느와르 시나리오가 밀려들었다. 당시에는 내가 한국에서도 충분히 재미있고 의미 있게 영화를 만들 수 있는데 굳이 미국을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또 전작과는 다른 영화를 하고 싶어서 계속 활동을 하는 건데 비슷한 작품만 들어오니 그 역시 의미가 없었고. 그런데 영화에 대한 에너지가 생기지 않는 순간이 오니까, 되레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내가 한국에서 영화를 편안하게 찍을 수 있다는 걸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이런가? 나태해진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저예산 영화를 해봐야 되는 건가 고민도 들고. 할리우드에서도 꾸준하고 강력하게 제안이 들어와서 일단 한 번 가보자고 맘먹게 된 거다. 나를 가장 열악한 상태로 밀어 넣어 본 거지. 그곳에서도 여태껏 내가 만들었던 영화에 대한 리스펙트는 있었겠지만, 어쨌든 그들 시스템 상에서는 거의 ‘듣보잡’ 감독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웃음) 아무튼, 결론적으로 미국 영화 제작 시스템을 거치면서 내가 그동안 방만하고 비효율적으로 일해 왔단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영화적 성취를 위해 너무 비합리적인 작업을 해왔던 거다. 덕분에 나의 작업 방식에 대해서 재고 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 반성의 결과가 <밀정>을 만들 때 묻어나온 것 같다.(웃음)
이전에는 무엇이 가장 비효율적이었나.
원래는 원하는 테이크가 나올 때까지 배우에게 계속 연기를 시키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그 중간에서 해결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았다. 과거에도 사실 그런 타이밍을 알고는 있었지만 괜히 불안하니까 한 번 더 찍어보고, 또 찍어보고 이런 게 있었거든. 이제는 그런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안다. 이 영화에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확고하게 결정하고 나니까, 그걸 얻으면 더 갈 필요가 없는 거다.

자신의 작품을 만들면서 이건 필요하고, 이건 필요치 않다는 걸 냉정하게 분간하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
어렵다. 사실 뭐가 필요하고 필요치 않은 건지 알 수가 없는 거다. 그래도 어쨌든 당시에 필요하다고 생각한 순간 까지만 찍고 딱 철수를 하는데, 계속 등골이 서늘하더라. 꺼림칙하더라. 정말 이게 끝일까? 하는 생각 때문에(웃음) 그래서 아, 가만 있어보자 그 장면을 다시 찍어야 되나? 하고 돌아보면 스텝들은 이미 철수하고 있고.(웃음)

<밀정>으로 토론토국제영화제에 세 번째 초청됐다.
토론토국제영화제는 이른바 4대영화제로 불리는 곳들 중에서 가장 ‘산업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칸이나 베니스나 베를린 영화제가 영화의 미학적 성취나 창의성을 존중한다면, 토론토는 그런 창의적인 영화들이 계속 나올 수 있는 토대를 강조한다고 본다. 영화가 ‘시장성’을 담보하라는 걸 알려 주기 때문이다. 잘 팔려야만, 그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거니까. 그런 의미에서 토론토영화제에 초청되는 건 영화계에서 가장 큰 북미시장을 선점하고, 그곳에 어필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거기서 일정 이상의 평가를 얻는다면 북미시장에 연착륙할 수 있다고 본다. 북미관객에게 소개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셈이다.
‘When you’re smiling’ 등 영화 곳곳에 깔린 배경음악이 상당히 좋다. 선곡에 평소 본인의 취향이 반영된 건가.
그렇다. 영화의 무드를 어떻게 잡아갈지 생각하면서 그에 어울리는 여러 음악을 핸드폰에 저장하고 다닌다. 그리고 반복해서 듣는다. 그러면서 영화의 분위기와 리듬감을 찾아나가는 편이다. <밀정>도 거의 다 미리 준비했던 음악을 썼다. 특히 ‘When you’re smiling’같은 스윙재즈는 영화의 시대적 배경과 비슷한 때 나온 음악들이다. ‘볼레로’도 비슷하다. ‘슬라브 무곡’이 그보다 조금 이전이고. 이런 음악들을 쓰면서 때로는 탐미적인 느낌을, 때로는 반어적인 느낌을 줬다. 안 그래도 이번에 음악 얘기가 많더라.

반어적인 느낌이란 무슨 뜻인가.
‘when you’re smiling’이 풍미하던 시대는 미국 문화가 르네상스로 불리던 때다. 그만큼 문화가 발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걸 풍미했는데 왜 우리 선조들은 그걸 즐길 수 없는 상황이었을까? 그때가 식민지 시절이 아니라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그 음악들을 함께 즐기지 않았을까? 가장 비극적인 현실 상황에 동시대를 풍미한 음악을 얹어 놨을 때 그 비극성이 더 강조될 것 같았다.

나머지 두 곡을 선택한 이유는.
‘볼레로’ 경우는 애초에 발레곡으로 만들어진 건데, 초연 당시 사람들이 발레보다도 음악 자체에 충격을 받았다고 하더라. 본래 클래식은 계속 주제가 변화되고 발전되는 구성인데 볼레로는 계속 반복만 된다. 그런 점에서 제의적인 성격이 강하다. ‘이정출’이 폭탄을 들고 연회장에 들어가기 위해 문을 촥 열 때도 일종의 제의적인 느낌을 풍긴다. 그때 마치 헬게이트가 열린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썼다.(웃음) ‘슬라브 무곡’은 기차씬과 엔딩씬에서 나오는데, ‘이정출’의 내면을 웅장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조금씩 성장한 면모를 전하고 싶어서 골랐다. 음악 자체가 감각적으로 들리는 부분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이런 의도들이 깔려있다.

그런 음악이 오히려 감정의 고조를 끊는다는 지적도 있더라.
반어적으로 썼으니 그럴 수도 있다. 이정출이 엄청난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는 순간에 아이러니한 음악이 나오니 뭔가 ‘깬다’고 생각 했을 수 있겠지. 그런데 만약 침울하고 울적한 감정으로 갔으면 진부한 시퀀스가 됐을 거다. 또 뒤에 닥쳐 올 감정의 파고가 엄청나기 때문에 리듬을 효과적으로 안배하기 위해서 앞부분을 냉정하고 차갑게 가져간 것도 있다. 그런데 반대로 그 음악이 나오는 순간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나 같은 취향을 갖고 있는 관객들은 분명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만들었다.
최근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되게 낯간지러워서 이런 말하기가 어려운데.(웃음) 난 모든 걸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다. 항상 최악의 상태를 먼저 생각한다. 그래서 좋을 때도 그리 좋아하지 않고 실패해도 크게 낙담하지 않는다. 감정이 쭉 유지되는 편이고 기복이 심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소소한 행복은 많다. 요즘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아침에 집에서 드립커피를 내릴 때다. 그때 내가 음악을 틀어 놓거든. 누군가는 이 얘기를 들으면 재수 없다고 할 수도 있는데(웃음) 그 때가 제일 행복하다. 아침을 좋게 만드는 나만의 시간이니까.

그럴 땐 주로 어떤 음악이 흘러나오나.
기분이 좋아지는 곡을 튼다. ‘밤에 듣는 음악’, ‘드라이브 할 때 듣는 음악’처럼 음악을 일일이 분류하는 편이다. 모든 생활에서 이렇게 체계적이진 않지만 내가 좋아하고,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에는 내 터치가 많이 들어가는 게 좋으니까. 아침에 커피 내릴 때 듣는 음악은 ‘모닝커피’ 폴더에 들어있는 곡이다. 다른 말로 할까 하다가 나만 알아보면 되니까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했는데. 음? 말하고 나니 이런 순간에 되게 창피하네.(웃음) 내가 만들었지만 모닝커피 진짜 웃긴다.(하하하) 대표적으로 이런 거다. (휴대폰을 꺼내 음악을 실제로 들려주며) 이병우 연주곡 ‘연서’다. 아침에 듣기 정말 좋잖아.(웃음)

2016년 9월 6일 화요일 | 글_박꽃 기자(pgot@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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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김재윤 실장(Z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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