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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아프면 멋있어져요 <계춘할망> 윤여정
2016년 5월 16일 월요일 | 이지혜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이지혜 기자]
어떻게 그리 멋있어질 수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윤여정은 ‘너무 아파서 그렇다’고 답했다. 녹록지 않은 삶의 질곡을, 멋으로 승화시킨 사람만이 드러낼 수 있는 관록. 기자들이 자신에게 특정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도, 자신의 말을 엉뚱하게 비트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매 질문에, 삶에서 우러나오는 통찰로 답했다. 무심하게 툭툭 내놓는 통찰력 있는 답은 호되게 날카로웠다. 1947년에 태어나 만 68세, 배우경력 50년 차를 맞이한 윤여정을 만났다.

<계춘할망>에 대한 인터넷 반응이 좋습니다. 읽어 보셨나요?
아니요, 인터넷을 못해요.

인터넷을 안 하시나 봅니다(웃음).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지(웃음).

<계춘할망>에서 보이는 선생님의 모습은, 이전작에서 보던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전작에서는 도회적인 느낌이라면 <계춘할망>에서는 포근한 할머니의 느낌이랄까요? 시나리오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한데요.
하루는 <계춘할망> 제작자 임건중 씨가 나한테 전화를 걸어서는, 날 캐스팅하고 싶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난 도회적인 사람인데 왜 계춘할망 역으로 날 캐스팅하려고 하느냐고 물었죠.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내 도회적인 이미지가 소진됐다잖아요. “아, 소진됐어요?” 물으니까 “네, 소진됐습니다” 해서 재밌는 젊은이구나, 싶었어요. 그 사람에 점점 말려들어서 나도 도회적인 이미지를 벗어보려고 도전해 봤죠(웃음).

도회적인 이미지가 소진됐다는 말에 동의하시는 건가요?
많이 하면 소진될 수도 있죠. 이렇게 직언하는 게 좋은 거예요. 충고랍시고 돌려서 말하면 본인은 못 알아들어요. 진심으로 충고하려면 직언해야 돼요.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난 모를 수도 있잖아요. 임건중 씨한테 진심이 없었다면 나 없는 데서 내 뒷말을 했겠죠.

도회적인 이미지를 되찾고 싶진 않으신가요?
이미지는 누군가의 편견이에요. 내가 도발적이고 도회적인 역할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런 이미지로 보인 거겠죠. 내가 한 것 50%, 보는 사람의 시선 50%가 합쳐져서 만들어지는 게 이미지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난 그런 게 싫어요. 한 가지 역할을 맡으면 그 역할만 계속 들어와요. 감독도, 제작자도 모험하지 않고 편하게 일하고 싶어 하니까요. 그 심정도 이해는 되지만 난 한 가지 이미지만 고집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어요.
<계춘할망> 시나리오에 대한 첫 느낌은 어떠셨어요?
시나리오에서 아무런 감흥도 안 느껴졌다면 출연하지 않았겠죠. 관객의 시선에서 편안하게 시나리오를 보는데 계춘할망이 너무나 이해되더라고요. 그렇게 용서하고 이해하는 건 오직 할머니만이 해낼 수 있는 거거든. 손녀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건 오직 늙어서만, 노인만 할 수 있는 인간애라고 생각했어요. 울컥했다는 말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 안 쓰고 싶었지만 울컥하더라고요. 그런 게 참 좋았어요.

<계춘할망> 시나리오가 좋으셨군요.
잘 읽었어요. 이야기가 대단하거나 극적이지 않은데도 끝까지 잘 읽히더라고요.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지루하거나, 잘 읽히지 않으면 나와 안 맞는다 생각하고 빨리 거절해요. 그런데 <계춘할망>은 잘 읽혔고 누군가 진심으로 쓴 이야기 같았어요. 다만 이야기가 드라마틱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아서 누가 여기에 투자할까, 싶었죠. 상업영화라는 게 다들 그렇다 하잖아요. 그러고 보면 서로 편견을 만들고 만들어낸 편견에 나도 말려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독립영화냐고 물었더니 독립영화는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독립영화는 싫으신가요?
내가 편당 몇십 억 받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 연세에 노동의 대가는 받아야 한다는 게 내 기본 정신이거든요. 독립 영화는 잘 안 해요. 돈을 안 주거든. 이게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극적이고 화려한 스토리에 손님이 드는 것뿐이니까요. 누구든지 안전하게 가려고 하잖아요. 아무튼 상업영화라고 해서 ‘신기하네, 투자자가 참 고마운 사람이네요, 잘 만들어 보세요. 그런데 나는 계춘할망에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라고 거절했어요. 그때 내가 지방에 갈만한 상황이 아니었거든요. 엄마도 교통사고를 당하셨고. 그래서 제 친구까지 추천해 줬는데도 꼭 내가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더라고요.

창감독이 왜 선생님을 고집한 걸까요?
처음엔 몰랐다가 나중에 알았죠. <계춘할망> 투자자가, 내가 아니면 투자하지 않겠다고 했던 거에요. 보통 배우들이 투자자를 만날 일은 거의 없는데, 온갖 고생을 하면서 내가 툴툴대니까 만나게 된 거지. 만약에 그래서 내가 캐스팅됐다는 걸 진작 알았으면 돈을 더 불렀을 텐데. 인생은 역시 타이밍이 중요한 거죠(웃음). 다 끝나고 나서야 내막을 알게 됐어요.
윤여정 선생님만이 표현해낼 수 있는 계춘할망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요?
그런 한 방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웃음). 연기는 맨날 하면서도 잘 모르겠어요.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소통이란 단어가 진부하긴 하지만, 관객의 마음을 건드리고 공감하는 연기를 했다면 성공한 거겠죠. 이를 위해 배우들이 노력하는 거고. 계춘할망을 연기하면서 가장 많이 떠올린 사람은 제 증조할머니예요. 살아 계실 때는 내가 너무 어려서 증조할머니의 사랑의 깨닫지 못했어요. 할머니가 비위생적이라서 싫었죠. 50대가 넘어서야 내가 잘못했다는 걸 알았어요. 할머니는 엄마와는 다른 존재에요. 엄마는 사랑이란 명목으로 자식을 자꾸 가르치려 들잖아요. 하지만 할머니가 되면 그저 손주를 예뻐해요. 내 피를 이어받고 자란 생명, 그 자체가 예쁜 거예요. 똥 누는 거, 오줌 싸는 것조차 예쁠 정도로 무한한 사랑을 베풀죠. 할머니가 키운 애들이 다른 건 이런 사랑을 받고 자라서겠죠. 그 마음을 이제야 뼈아프게 느꼈어요. 그래서 지금도 할머니께 잘못했다고 기도를 해요. 할머니는 좋은 분이니까 천국에 계실 텐데, 다음 생에 만나면 제가 꼭 무릎 꿇고 빈다고 하죠. 증조할머니한테서 받은 느낌을 떠올리면서 계춘할망을 연기했어요.

증조할머니와 관련한 추억이 있으신가요?
증조할머니가 끓여준 찌개요. 그건 아무도 못 끓여요.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굴비가 정말 귀한 음식이었어요. 부잣집이나 지붕에 매달아 말리는 거였죠. 굴비 몸통은 아버지, 할아버지가 잡수시는 거고요. 증조할머니가 굴비 대가리를 조그만 뚝배기에 끓여서 절 주곤 하셨어요. 어릴 적에 밥을 잘 못 먹었는데 그럴 때면 그 찌개 국물을 제 입에 넣어 주셨죠. 그 맛이 눈물겹도록 그리워요. 지금 다시 먹어보면 별맛도 아닐 거예요. 굴비 대가리 위에 그래 봐야 파, 마늘 정도 넣었겠죠. 그런데도 그 국물을 먹으면 비위가 가라앉아서 밥도, 죽도 먹을 수 있게 되더라고요. 뚝배기에 끓은 그 굴비 대가리 찌개가 지금도 먹고 싶어요.

계춘할망의 표정들이 참 포근하더라고요. 나에게만 포근한 고향 같은 느낌이었어요. 특히 뒷짐 지고 걷는 장면이 좋았어요. 고향이란 느낌을 주기 위해 준비를 많이 하신 것 같은데요.
아마 모든 배우가 그럴 텐데, 할머니들을 많이 관찰했어요. 특히 ‘인생극장’ 같은 다큐멘터리요. 할머니들이 대체로 뒷짐을 지고 걷더라고요.

의상도 좋았습니다(웃음).
의상에 신경 쓴 거 알아줘서 고마워요. 우리 엄마는 항상 모자를 쓰세요. 머리가 빠지니까 두피가 시리대요. 그 모습을 보고 겨울 신에서 털모자를 쓰기로 했어요. 그런데 여름이라서 털모자 구할 데가 마땅치 않더라고요. 또 제주도 후배의 도움을 받았죠(웃음).
영화에서 뱀장어를 잡아 앞치마에 넣는 장면을 보고 많이 웃었습니다. 살아있는 뱀장어를 잡은 소감은요?
그 뱀장어한테 내가 물렸어요. 뱀장어를 앞치마에 집어넣으면서 허벅지 윗부분, 사타구니를 물렸죠. 그래서 1년이 된 지금까지도 그 부위가 까맣게 남아 있어요. 내가 비명을 지르니까 촬영이 중단됐어요. 여자제작진들과 상처 부위를 보니까 피가 올라오고 있더라고요. 기분이 나빴죠. 그래도 촬영을 중단시킬 수는 없어서 병원에 가진 못했어요. 그저 서울에 있는 의사에게 전화해 뱀장어가 독이 있는지, 항생제나 연고를 처방받아올 수 있는지 알아봤어요. 제주도에서 제 수발을 들어주는 고등학교 후배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이대 불문과인 친구인데, 그래서 그런지 영특하더라고(웃음). 참 융통성 있게 도와줬죠.

김고은 씨의 첫인상은 어땠어요?
난 그 친구의 눈이 참 좋아요. 날 처음 만났을 때 긴장을 많이 한 게 느껴졌어요. 그 모습이 참 자연스럽더라고요. 작은 아들이 겹쳐 보이기도 했고. 지나치게 정돈된 여배우 같은 느낌이 아니었어요. 사실 김고은이 전형적인 미인상은 아니잖아요. <은교> 때 처음 김고은을 보고서 미인의 새로운 트렌드가 나오고 있단 걸 직감했죠. 난 참 김고은의 눈이 예쁘던데 남자들은 쌍꺼풀이 진한 눈을 좋아하더라고. 남자하고 여자하고 좀 다른가 봐. 그래서 남자하고 여자하고는 같이 살기도 힘든 거고.

직접 연기를 하며 호흡을 맞춰보니 어땠나요?
노인네가 최선을 다 해서 연기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 친구가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바보가 아닌 이상(웃음). <계춘할망> 엔딩 신에서 제가 그 아이를 위해 희생을 좀 했어요. 촬영할 때 두 배우의 감정을 모두 살리기는 힘들어요. 제 감정 위주로 촬영할 때가 있고 상대배우 감정 위주로 찍을 때가 있죠. 엔딩신에서 김고은의 감정 위주로 찍었어요. 난 좀 망했지만요. 그런데 그 아이가 그걸 알았는지 감사하다고 문자를 보냈더라고요. 내가 자기를 위해 양보했다는 걸 알았나 보다, 센스가 있는 친구구나, 했어요. 그걸 몰랐다면 왜 그 날 감사하다고 문자를 보냈을까요?

석호 역의 김희원 씨와의 호흡도 좋았어요.
김희원 씨는 드라마 ‘미생’에서 처음 봤어요. 처음에는 저렇게 야비하게 연기하는 배우도 있구나, 싶었죠. ‘별에서 온 그대’를 봤을 때는 그 남자가 김희원이었구나, 연기를 참 잘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창감독이 김희원 씨한테 착하게 연기하라고 자꾸 디렉션 할 때 저 사람 이미 연기 잘하는 사람이니까 디렉션 하지 말라고도 했어요. 원래 배우들이 악역을 한 다음엔 착한 역을 하고 싶어 하거든요. 김희원 씨는 혼자서도 알아서 잘하는 배우이기도 하고요.
모니터링을 자주 하시는 편인가요? 모니터를 통해 평상시와는 다른 선생님 모습을 접해보니 어떠셨나요?
모니터는 절대 보지 않았어요. 한 번도요. 모니터링을 한 후로 내 연기를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얼굴 각도에만 신경을 쓰더라고요. 제가 얼굴 한 쪽에 흉터가 있거든요. 명색이 여배우라 그런지 자꾸 흉터가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얼굴 각도를 자꾸 틀더군요. 그러다 보니 연기가 잘 안 돼서 아예 모니터를 보지 않았어요. 어차피 감독을 믿으니까 영화를 촬영하는 거기도 하고.

요즘 남남케미의 영화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계춘할망>은 여여케미의 영화라는 점에서도 주목받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러분이 반성하세요. 기자들이 호도하는 거잖아요.

그런가요(웃음). 여배우들의 입지가 영화계에서 줄어들고 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습니다. 여배우로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가 여배우라 생각하지 않아요. 노(老)배우죠. 여배우의 입지에 대한 것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저 노배우로서, 순서에 맞으면 일을 할 뿐이에요. 내가 좋으면 일을 하는 거라서 주장하는 건 잘 하지 못해요.

남궁원 선생님은 “충무로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던 노배우들이 설 자리가 없다. 나도 무대에 서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정작 젊은 감독들은 그 분들을 어떻게 찾아봬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고요.
남궁원 선생님은 <화녀>에서 내 주인님이었죠(웃음). 지금 계신 노배우들은 예전에 다 주인공이었어요. 그런 분들이 손자뻘 되는 제작진이나 배우 앞에서 디렉션 받기는 참 어려운 일이죠. 마음 열기가 힘든 거예요. 마음을 연다는 건 내가 나를 버리는 일이에요. 어떤 단역이라도 좋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지만 그렇게까지 마음을 여시는 게 굉장히 힘드시겠죠. 그래서 어쩌면, 배우가 제일 절실하게 연기할 때는 돈이 필요한 순간인지도 몰라요. 취미생활로 연기할 때는 나를 버리는 게 불가능하잖아요.
<화녀> <하녀>에서부터 <계춘할망>에 이르기까지 필모그래피가 참 다양합니다.
기준은 하나였어요. 전에 맡았던 역은 다시 맡지 않는다! 같은 얼굴에, 같은 목소리를 가진 내가 연기할 수 있는 캐릭터는 한정적이니까요. 그러다 60살이 넘어서는 남은 인생을 즐기기로 결심했어요. 보너스로 사는 거라고 생각하고 돈이나 명예 상관없이, 내가 좋아하는 감독과 작가가 원하면 출연했어요. 그래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단역도 많이 맡았죠. 만일 40대라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이 영화를 하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주인공을 맡아야 하는 건 아닌가, 고민했을 테니까요. 지금은 그런 게 상관없어진 지 오래 됐어요. 자유로워진 내가 너무 좋아요. 여배우란 단어를 들으면 이제는 무안해요. 난 여배우가 아니라 노배우로서,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남은 생을 살고 싶어요.

여성 누리꾼들에게서 패션 감각으로 많은 지지를 많고 계십니다. 의상을 준비하는 비결이 있으신가요?
코디 도움은 받지 않아요. 코디들은 협찬 받을 수 있는 폭이 좁아서, 그 안에서만 선택하거든요. 나 같은 경우는 체구가 작아서 다 직접 옷을 손질해야 해요. 손품이 많이 들어요(웃음).

그런 선생님을 많은 사람이 멋지다고 말합니다(웃음). 멋짐의 비결은요?
고마워요. 그런데 많이 아프면 그렇게 돼요. 찰리 채플린이 그렇게 멋있고 코미디 연기를 잘할 수 있었던 건 너무너무 아파서 그런 거예요. 남들이 멋있다 그러는 건 정말로 별개의 문제죠. 전 천경자 선생님이 참 멋있다고 생각해요. 천경자 선생님이 50대일 때 뵌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일 얘기는 전혀 안 하고 본인의 실패한 사랑 얘기를 해 주시더라고요.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게, 감독이랑 배우가 영화 얘기만 늘어놓는 거예요. 그런데 대가가 그런 얘기를 해 주시니까 얼마나 멋있고 감동이었겠어요. 담배 피우는 모습도 정말 멋있어서 “선생님, 저도 담배 좀…….” 했더니, “피소. 혼자 담배 피우는데 동무해준다니 얼마나 고맙소, 피소” 하시더라고요. 70년대만 해도 서울에서 전라도 사투리를 쓰면 안 됐어요. 전라도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들로 매도될 때였거든요. 그런데 천경자 선생님은 사투리를 그냥 다 쓰셨어요. 심지어 홍익대 교수로 강의하시면서도요. “전라도 사람 가락 있소, 왜 숨기는지 모르겠소” 하셨죠. 전 그 말이 참 소신 있고 멋있다고 생각해요. 그분도 얼마나 아픈 인생을 사셨는데요. 93세까지 사시면서 이혼 경험이 있으셨어요. 그래서 나중에는 자기 그림 이외에는 아무 상관도 없었던 거겠죠. 저한테 멋있다고 한 사람들한테 전해주세요. 많이 아파서 그렇다고, 실제로 만나 보니 안 멋있더라고.

그 아픔이나 고독을 어떻게 견뎌내셨어요?
좌우명이나 극복 계기를 묻는 것 같은데, 그런 건 없어요. 작심하고 살진 않잖아요. 인생이 그런 것 같아요.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을 뿐이에요. 내가 배우를 이렇게 오래 할 줄 몰랐어요. 내가 70살인데, 반세기 전만 해도 어느 정도 배우 활동을 하다가 결혼적령기가 되면 시집을 가야 했죠. 그런 시절이었기에 시집을 갔어요. 그러다 다시 나와서 배우로 살게 될 줄은 몰랐죠. 이런 걸 보면 인생은 한 번 살아볼 만 하고, 그러면서도 힘든 거예요.
작가 노희경 씨와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새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도 함께 작업하실 예정이고요.
노희경 작가와 직접 만나진 않아요. 우리가 친하다 그러면 사람들이 자꾸 물어서 골치 아프더라고(웃음). 얼마 전에 노희경 작가가 전화를 걸어서 내년에 뭐하냐면서 자기랑 드라마 하자더라고요. 그 친구는 목소리가 나보다 더 남자 같아. 와인 마시고 있다니까, 자긴 술 취한 사람과 이야기 안 한다면서 딴소리하고. 김혜자 선생님 어때, 해서 좋다니까 알았다면서 끊더라고요. 그렇게 드라마에 출연하게 됐어요.

작품을 선택할 때 사람을 많이 보시는 것 같습니다(웃음).
우선 그 사람의 일을 보고, 인정하고 신뢰하게 되면요.

사람의 자연스러움을 좋아하시는 것 같고요.
난 노배우니까.

최근에 가장 즐거웠던 일은 뭔가요?
어릴 때 알던 언니들과 만나서 얘기하는 거요.

주로 어떤 얘길 나누시나요?
예전에 내가 어땠었다, 네가 어땠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이런 거요. 그러고 보면 사람은 참 안 변해.

2016년 5월 16일 월요일 | 글_이지혜 기자 (wisdom@movist.com 무비스트)
무비스트 페이스북(www.imovist.com)
사진_㈜콘텐츠 난다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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