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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 신화로 남은 이름, 오우삼
감독열전 - 오우삼 | 2000년 5월 15일 월요일 | 이지선 기자 이메일

십 수년 전 한때, 수많은 남자들이 입에 성냥개비를 물고, 라이터 불을 입으로 들이마시며, '의리'를 운운하며 다닌 적이 있었다. 이들은 프렌치 코트와 검정색 레이밴 선글라스, 그리고 흰 스카프를 무슨 제복처럼 입고 다니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했는데, 내 기억 속의 누군가는 지폐로 담뱃불 붙여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사회에서 일종의 신드롬처럼 번져나간 이 현상의 뒤에는 <영웅본색>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영화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이 보여주었던 모든 것들, 그 안에서 표현된 주윤발의 정체성과 자신을 동일시하고자 하는 소년기적 욕망이 발현된 것이었다.

유독 한국사회에서 특출나게 형성되었던 이러한 신드롬의 원인분석은 여러 가지 사회적 맥락을 고려해야 하겠지만(예를 들면, 일본에서의 전공투 운동과 '내일의 조'라는 만화가 맞물려 있는 것처럼, 한국사회에서의 학생운동과 사회적 암울함 등이 '영웅본색 신드롬'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있다), 우리가 여기서 보려는 것은 이런 사회학적 분석이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신드롬의 뒤에서, 그 스타일을 창조해낸 이가 누구인가일 것이다. 그리고 이미 다들 알다시피 그렇게 영웅본색과 주윤발, 그리고 오우삼은 우리에게 신화로 남았다.

<영웅본색>을 필두로 속속 개봉된 수많은 홍콩식 갱영화들은 한국평단에 의해 '홍콩 느와르'라는 장르명을 부여받았고(실제로 이 단어는 영화 홍보사에서 처음 붙인 것이었지만, 이후 평자들에 의해 하나의 장르명으로 자리잡았다), 한동안 그렇게 한국의 관객을 휘어잡았다. <영웅본색>으로 '홍콩느와르'의 시작을 알린 오우삼은 <첩혈쌍웅>으로 장르를 완성시키고, <첩혈가두>, <첩혈속집>으로 장르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러한 장르형성 상의 특색으로 인해 오우삼은 곧 홍콩느와르의 다른 이름으로 통했다.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그러나 오늘 여기서 오우삼을 다시 논하는 것은 그가 한국 사회에서 끼친 영향 하나만이 이유가 된 것은 아니다. 하나의 장르와 동일시되는 이름은 세계영화사를 뒤져도 그리 흔지 않다. 오우삼이 가치 있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리라. 오죽하면 젊은 영화 천재 쿠엔틴 타란티노는 '펄프픽션'의 깐느 수상소감을 "오우삼에게 경배를!"이라는 말로 시작했을까.

이제 우리는 타란티노의 도움으로 할리우드로 건너간 뒤 승승장구하고 있는 오우삼을 털어보려 한다. 그의 출생에서 맥빠진 영화를 만들던 초창기, 그리고 홍콩과 할리우드에서의 활동을 뒤져봄으로써 그에게서 얼마나 많은 먼지가 나올지 기대가 된다.

오우삼, 그를 알기 위한 몇 가지 기본 지식들
본명吳宇森 (John Woo)
직업감독, 극작가, 영화배우
생년월일1946년 5월 1일
출생지중국 광둥성(廣東省) 광저우(廣州)
학력홍콩 마테오리치 학교(Matteo-Ricci-College)
가족관계아내 앤 우(Ann Woo)와의 사이에 1남 2녀
팬레터 c/o Lion Rock Productions MGM Studios 2500 Broadway Building F, Suite 370 Santa Monica, CA 90404 U.S.A.

오우삼은 1946년 중국 광저우에서 태어났지만 공산화에 반대한 가족들과 함께 1951년 홍콩으로 이주한다. 아버지는 중국문화를 연구하는 철학자였고, 어머니는 영화를 좋아하는 평범한 주부였다. 이주민의 생활이 그렇듯, 그들 가족은 매우 가난했고, 낡은 오두막에서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나마도 1953년 대화재로 전소되자 그들은 몇 년간 집없는 생활을 하다가 빈민가에서 다시 가족을 꾸린다. 10여년간 결핵으로 투병중이던 오우삼의 아버지에게는 생활능력이 없었고, 당연히 가족의 생계는 그의 어머니 몫이었다. 어린 오우삼은 상당히 방치된 어린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폭력, 마약, 매춘 등을 가까이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밑바닥 생활의 경험은 이후 그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의 정체성(대개는 밑바닥 인생들이다)과 교회 및 성당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바탕이 된 것으로 보인다.

교회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학교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데, 이 때문에 한때 신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단다. 그는 미국인에 의해 운영되는 신학교를 다녔고, 덕분에 서구문물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8년여의 학교생활을 하면서 오우삼은 많은 영화를 보았는데, 이는 그의 어머니가 대단한 영화광이었다는 데에도 그 이유가 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영화와 접하게된 그는 15세 경부터는 학교생활을 소홀히 할 정도로 영화에 빠져들었고, 아버지의 반대가 있었으나 결국 영화의 길을 걷게 된다.

1960년대 홍콩에는 영화학교가 없었던 관계로 실질적인 영화공부를 할 수 없었으나 생계를 위해 취직한 "Chineses Student Weekly" 신문사를 통해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시작한다. 그는 신문사에서 마련해준 공간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영화에 대한 토론과 분석으로 지식을 늘려갔다.

그는 특히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의 예술영화 실험영화를 좋아했는데, 1970년대 이후 샘페킨파, 프란시스 F. 코폴라 등의 감독을 접하면서 취향의 변화를 맞는다. 특히 이 시기 접한 샘 페킨파의 영화들은 이후 오우삼 영화에서 나타나는 폭력미학의 근원이 된다. 오우삼과 그의 친구들은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홍콩영화계에 대한 애정 어린 비판의 글을 여러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는데, 오우삼은 뒤에 이러한 평론들이 영화사 입사에 애로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고 회고한다.

1968년부터 1970년 사이 몇 편의 8mm, 16mm 단편영화를 찍었던 그는 독립영화사들이 찍는 영화에도 참여하였고, 이로써 본격적인 영화감독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우삼은 이 시기에도 뚜렷하게 영화감독이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 다. 그는 최근의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장철(호금전과 함께 1960~70년대 홍콩무협영화의 창시자로 불린다)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감독으로서의 길을 잡아 준 것이 오로지 그의 영향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장철은 적룡등과 함께 배우로 캐스팅되었던 오우삼에게 감독재목이라 지목하며 그의 배우활동을 막았다.

23세 때 대본 검토인으로 캐세이 스튜디오에 취직해 홍콩의 주류영화계에 진입한 오우삼은 1971년 쇼브라더스로 이직한다. 이곳에서 당시의 명감독 장철을 만나고, <수호전: 水滸傳>(1971), <마영정: 馬永貞>, <사기사: 四騎士>(이상 1972), <자마: 刺馬>(1973) 등의 영화에 조감독으로 참여한다. 이 기간 동안 촬영, 편집, 사운드 더빙 등의 작업을 직접 하면서 영화제작의 실질적 기술을 습득한 그는 1973년 <철한유정>으로 공식 데뷔한다.

그는 장철과의 작업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늘 이야기하는데, 특히 자신의 영화를 "총을 든 무협영화"라고 부를 정도로 그에 대한 애정을 표하곤 한다. 실제로 오우삼의 갱영화에서 보여지는 여러 가지 설정은 1960~70년대 홍콩의 무협영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남성간의 유대나 약자에 대한 지극한 보호, 넘치는 허무주의 등이 바로 그것인데, 땅에 떨어진 강호의 의리를 칼이 아닌 총으로 되찾으려 한다는 점이 다른 점이랄까.

2 )
soaring2
앞으로 많은 작품을 더 기대합니다^^   
2005-02-13 23:06
cko27
불행히도 최근작들에선 그의 냄새가 풍기질 않죠..   
2005-02-06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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