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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평가! 재현과 연출 사이에서 흔들리는 균형
천일의 스캔들 | 2008년 3월 12일 수요일 | 민용준 기자 이메일

왕위다툼이 끊이지 않았던 15세기 영국에서 랭카스터 가문의 헨리 튜더는 왕위 계승권을 두고 30여 년간 지속된 장미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영국의 왕으로 즉위했다. 그 뒤를 이어 국왕의 자리에 앉은 헨리8세는 여섯 번 결혼했고 그 중 둘을 사형장으로 보냈다. 전세계 역사상 보기 드문 스캔들을 선사한 그의 일대기는 현대에 이르러 역사적 서사에 풍부한 상상을 덧입힌 다양한 문화적 개종을 이룬다. <천일의 스캔들>은 그 파란만장한 치정극 중에서 가장 뜨겁게 달아올랐던 헨리8세의 두 번째 왕비 앤 볼린의 서사를 골자로 변주된 이야기다.

헨리8세(에릭 바나)를 서사의 중심에 두지 않은 <천일의 스캔들>은 원제 ‘The other Boleyn girl’처럼 ‘볼린가의 다른 여인’ 즉 메리 볼린(스칼렛 요한슨)을 앤 볼린(나탈리 포트만)과 비등한 위치에 두고 나아간다. <천일의 스캔들>이 여인을 이야기의 축으로 둔 건 결국 헨리8세의 여성편력과 무관한 방향을 지향하고 있음을 명시하는 것과 같다. 동시에 ‘딸의 혼사가 가문의 영광을 좌우한다’는 대사가 반영하는 시대상처럼 결혼제도 속에서 매물로 발췌된 여성상을 조명하려는 여지의 가능성도 드러난다.

스칼렛 요한슨과 나탈리 포트만, 그리고 에릭 바나로 치장된 화려한 포스터만으로도 풍만한 기대를 품게 만드는 <천일의 스캔들>은 실제로 일정 이상의 기대에 보답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캐릭터의 비중을 안배하지 못하는 극적 흐름은 이야기의 중점적 의도마저 흐릴 정도로 애매모호한 구석이 있다. 가십의 일면을 차지하듯 앤 볼린을 내세워 가상의 역사를 추상하는 정형화된 방식과 달리 메리를 전면에 내건 <천일의 스캔들>은 그녀의 심리적 추이를 중시하되 그것을 외부로 전이하기 보단 내부적인 시선으로 장치함으로써 앤에 대한 독립적 시선을 보존하고 이를 통해 양립된 캐릭터의 선을 살린다. 진실한 마음을 원한다는 메리와 약혼했던 자와 결혼할 수 있다는 앤의 차별적인 캐릭터 성향은 독립적인 캐릭터의 동선을 평행적으로 진행시키려는 영화의 이야기 구조에서 절대적인 캐릭터 비중을 개별적으로 보존하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며 이런 선택은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적극적인 개입자로서 앤과 함께 영화의 한 축을 담당하던 메리의 비중은 후반부로 나아가는 이야기 속에서 점차 앤에게 귀속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캐릭터의 균형이 깨짐과 동시에 영화의 흐름은 편파적인 양식으로 변질되어 나가고 그와 동시에 팩트(fact)와 픽션의 균형도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팩트를 채우는 픽션의 허용량이 남발되는 양상은 곧 영화가 역사적 팩트에 초점을 맞춘 것인지 드라마틱한 픽션의 감수성에 매달린 것인 것 모호하다는 인상을 부여한다. 서사의 흐름에 편승하기엔 드라마가 격양되는 느낌이며 감정에 몰입하기엔 서사적 욕심이 과하다. 그 사이에서 캐릭터들은 시대적 사실과 허구적 연출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미아처럼 겉돌기 시작한다.

메리에게 사랑을 믿지 말라고 충고하는 앤은 그 순간, 시대에 비해 진보한 여성상에 가깝게 묘사된다. 그녀가 헨리8세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눈빛을 노출하는 순간에도 이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헨리8세에게 자신을 얻으려면 불임인 전 왕비와 이혼하라고 요구하는 굴절된 욕망을 드러내는 순간, 영화는 권태롭게 변한다. 이는 후자의 문제가 아니라 전자의 문제다. 역사적으로 완벽한 고증이 불가능한 서사를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중시되는 건 분명 재현이 아닌 연출이다. <천일의 스캔들>은 중반까지도 시대적 알력에 의해 욕망의 도구로 소진되던 여성성을 관찰하는 충돌적 시선을 드러냈으나 어느 순간, 충돌은 소진되고 권태로운 굴복의 상이 찾아온다.

또한 고증이 불확실한 메리를 전면에 내세우던 영화가 후반부에 이르러 과잉된 역사적 자의식을 끼워맞추며 그녀를 소품처럼 겉돌게 만드는 태도도 의아하다. 캐릭터의 심리적 변화라고 말하기엔 전후의 격차가 크고 시대상에 의한 자연스러운 도태라고 말하기엔 논리적 결함이 크다. 게다가 국교를 바꾸고 세간의 원성을 견뎌내게 만들 정도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의 매력이 일순간 사악한 마녀라는 증오의 탈로 변절되는 과정도 돌발적인 감정의 격양을 못이기듯 이뤄진다. 영화가 충실하지 못한 기록을 기반으로 둔 만큼 그에 덧씌운 허구적 포장이 설득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건 명백한 오역이다. 이는 사족과도 같이 과도하게 친절한 에필로그 형식의 결말부에서 예고하는 대로 헨리8세의 긴 여성편력이 끝난 뒤, 앤 볼린의 딸이자 영국의 첫 번째 여왕으로 기록되는 엘리자베스1세의 황금시대(golden age)가 시작된다는 역사적 아이러니만큼이나 아이러니한 영화의 태도다. 다만 고풍스럽고 전원적인 16세기 영국의 궁정 양식과 자연 풍광은 일정한 시각적 재미를 부여한다.

2008년 3월 12일 수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나탈리 포트만, 스칼렛 요한슨, 에릭 바나. 지름신을 부르는 할리웃 명품 배우 3종 세트.
-16세기 영국의 고풍스러운 궁정 양식과 수려한 전원 풍경이 조화롭다.
-여성을 욕망의 도구로 삼은 편력의 시대를 지나 여왕의 시대가 온다. 지독한 역사적 아이러니
-캐릭터 균형이 기우는 중반부의 틈새로 지나친 역사적 자의식이 끼어든다.
-고전적 역사를 배경으로 한 고풍적인 드라마에 매력을 느낄 수 없다면야.
-과거야 어쨌든 칙릿의 시대에서 구구절절한 여성편력 회상은 고리타분해.
19 )
naredfoxx
캐스팅만으로도 돈이 안 아까운 영화네요.   
2010-01-01 18:26
full2house
보고 싶었던 영환데.. 결국 못 봤네...   
2008-12-11 03:52
kyikyiyi
연기력 대단!! 너무 좋았어요   
2008-05-07 13:10
callyoungsin
18세면 더 흥행했을지도   
2008-05-06 12:49
bjmaximus
국내에서 그래도 망하진 않았다는..   
2008-04-30 16:02
wow517
왠지 재밌을것 같네요~^^   
2008-04-28 14:55
mckkw
18세로 만들지.   
2008-04-14 18:16
gt0110
천일의 앤...   
2008-04-12 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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