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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
사려 깊은 처연한 슬픈 블록버스터 | 2004년 12월 7일 화요일 | 서대원 기자 이메일

웬만해서는 기자시사에 나가지 않는 인간들마저 끼니를 거르며 한 달음에 극장으로 향할 만큼 하반기 최고의 기대작으로 충무로 안팎을 사정없이 술렁이게 한 <역도산>이 드디어 오늘 그 실체를 드러냈다.

물경, 100억 원이 넘는 대규모 제작비, 한.일 최고의 배우와 스탭이 어우러져 엮어낸 공동 프로젝트, 가공할 만한 몸집 불리기와 눈이 뒤집힐 정도로 살 떨리는 연기를 펼쳤다는 설경구. 별 볼일 없는 인생 강재를 통해 울컥거리는 진한 페이소스를 무자비하게 끌어냈던 <파이란>의 송해성 감독. 그리고 패전 후 실의에 빠져 있던 일본인들에게 긍지와 희망을 와락 안겨주며 열도를 뒤흔든 역도산의 흥미진진한 삶을 스크린으로 불러냈다는 점 등등. 관객 300~400만 명은 이미 먹고 들어간 셈이라며 일찌감치 호사가들은 <역도산>을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의 초대박 블록버스터의 계보를 이을 영화로 예약해 둔 상태다.

그래서 봤더만........

분명, 나름의 성과를 길어 올린 수작이라는 단상이 강하게 파고들면서도 왠지 모르게 뭔가 허전한 아쉬움이 남는다는 게 본 필자의 허심탄회한 관람 소견이다. 따라서 당 영화를 보시기 전, 주최측의 말이긴 하다만 다음과 같은 감독의 변을 한번쯤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역도산>은 슬픈 블록버스터다”
“떼돈 들어간 대작이구나 하는 기대의 시선보다는 영웅 역도산이 아닌 어두운 시대를 맨 몸으로 관통하며 치열한 삶을 살다 간 한 사내의 삶으로 봐달라!"

그러니까 당 영화는, 소재와 상관없이. 재미와 신파를 퍽이나 비중 있게 다룬 기왕의 블록버스터와는 적잖이 노선을 달리 하는 영화라는 사실이다. 격변하는 시대의 자장 안에 놓인 역도산의 거대 신화보다는 갈 곳 없는 비루한 신분으로 끊임없이 덧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 역도산의 비애를 쫓는다. 부침 심한 인생의 굴레 속에서 환희와 절망을 지독하게 경험한 한 사내의 이야기를 진정성 그득한 시선으로 바라보기에 송해성 감독의 말마따나 <역도산>은 슬픈 블록버스터다. 때문에 당 영화에 따라 붙는 앞서 얘기한 화려한 수식어는 맞는 말이긴 하지만 온전한 감상에 독이 될 수도 있다.

조센징 출신으로 숱한 수모와 모진 시련을 온 몸으로 겪으며 일본 땅에 우뚝 선 위대한 프로레슬러의 전설적 무용담이 아닌 그 이면에 무겁게 자리했을 법한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울분 가득한 구슬픈 심정과 자신의 안위를 위해 비열한 술수를 펼치는 그의 심리를 영화는 거리를 둔 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는 보는 이가 사치스러운 감정에 몰입될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하고자 충분히 갖가지 영화적 장치를 활용해 울컥한 감동을 줄 수 있음에도 이 희대의 인물의 과장됨을 자제하며 담담하게 지켜보는 세심한 배려를 기울인다.

시각과 청각을 압도할 만한 덩치들의 역동적인 레스링 경기를 통해 흥미로운 긴장감은 물론이고 역도산이 일삼는 얄팍한 처세술과 곤경에 내몰린 인간의 본능적 심리마저 드러내는 이 롱테이크 장면은, 영화가 무엇을 담으려고 하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흔들림 없는 자세가 여타 블록버스터와는 포개지지 않는 <역도산>의 미덕이다.

허나,
오바스런 신파를 꾹꾹 누르며 시종일관 무겁고 진중함으로 일관한 영화의 미덕은, 자칫 필(feel) 확 꽂히는 정서적 울림이 없는 밋밋함으로 본의 아니게 복무할 수도 있다. 또한, 이런 저런 일들을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의 얼개는 역도산의 속물적 야심을 들춰내긴 하지만 설정과 사건을 나열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기댈 곳 없는 쓸쓸한 이방인의 절절함을 묵직하게 끄집어내지는 못한다. 치열한 삶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역도산의 애잔함이 가슴팍을 가격하지 못하고 잡힐 듯 말 듯 어정쩡하게 머릿속을 맴도는 아쉬운 부분이다.

물론, 박수무당의 신기가 떡하니 그의 몸에 들어앉은 듯 눈을 확 잡아채는 설경구의 소름끼치는 열연만으로도 <역도산>의 가치는 회자될 만하다. 한국배우 중 가장 억울한 표정을 잘 짓고, 이 영화로 비열한 실룩거림마저 궁극의 경지를 보여준 설경구는 90% 이상이 일본어로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도 전혀 뻘줌함 없이 그네들의 언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며 영화를 힘 있게 끌고 간다. 나카타니 미키 등 일본 배우들의 호연과 세세하게 되살린 일본의 모습 그리고 영화의 맥락에 따라 탈색되고 뽀샤시하게 처리된 때깔 좋은 화면도 눈여겨볼 만하다.

송해성 감독의 의연한 결기와 설경구의 악착같은 고집의 발군의 연기로 어렵사리 결실을 맺은 <역도산>은 세상을 삼킨 거인 역도산이 아닌 눈물과 진심과 울분을 꾸역꾸역 집어삼킨 한 남자의 처연한 초상을 사려 깊게 그린 슬픈 블록버스터다.

● 조오또 맛떼(ちょっと まって) = 잠깐만......
<역도산>의 자막은 오른쪽 세로 자막이 아니라 전면 하단 가로 자막으로 상영될 예정이라 한다. 관람에 앞서 극장의 환경을 한번 살펴보는 것이 여러 모로 명랑관람을 위해 좋을 것으로 사료된다. 뭐, 대갈장군께서 본의 아니게 당신의 앞자리에 위풍당당 착석하시면 빼도 박도 못하고 명랑관람, 말장 도루묵이니 알아서들 유의하시고....

9 )
yutogirl
기자님이 말씀하신대로 뭔가 허전하긴 하지만 나름의 성취를 한 영화인 건 맞는 말인 거 같아요.......   
2004-12-11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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