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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괴물은 인간이다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 | 2003년 6월 21일 토요일 | 임지은 이메일

"가장 무서운 게 뭐야?" 누군가 필자에게 그렇게 묻는다면 "나찌"라고 대답하겠다. 물론 "내 가족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이라든지 생각도 하기 싫을 만큼 두려운 일들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남들이 귀신이나 바퀴벌레와 같은 어떤 대상을 끄집어낸다면 나는 주저 없이 나찌즘―그 중에서도 홀로코스트―을 고를 것이다. 여름밤이면 으레 스물스물 흘러나오는 괴담들도, 도끼를 든 살인마가 나오는 스플래터 무비도, 볼펜 쥐고 "귀신님아, 대답해주셔여" 어쩌구 운운하는 분신사바 놀이도 전혀 무섭지 않지만, 1930년대를 붉게 물들인 저 대학살극 앞에서만큼은 도저히 오금을 펴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소수의 미치광이들이 활개를 치던 시대로 보아야 할 것인가, 혹은 담합에 의해 이루어진 역사적인 집단일탈로 간주하는 게 옳은가. 앞의 질문에 따라 나찌독일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쪽이 좀더 공정한 시각인지에 대한 논의 이전에 나는 양쪽 모두에 극심한 생리적 거부감과 두려움을 느낀다. 누군가가 유태인이라든가 혹은 집시, 장애인, 동성애자와 같은 사회 소수 계층이라는 이유로 조직적으로 살상하는 것이 용인되는 시대. 물론 "잔학행위는 나쁘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왜 나쁜지에 대한 논리와 근거를 필요로 하겠으나, 어쩌면 생리적 거부감이면 충분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공공의 적>의 강철중 형사가 씹어뱉는 대사 그대로, 사람이 어떻게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가. 지나치게 단순한 논리긴 하지만 어쨌든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일은 없을 것이므로.

사설이 길었는데,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은 정체를 숨기고 미국에 숨어 지내던 나찌 전범과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소년간의 대결구도를 그려낸 영화. 장르상으로는 스릴러지만 영화가 환기하는 감흥은 공포영화의 그것과 가깝다. 주인공 토드(브래드 렌프로)는 학교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해 배운 후 나찌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비오는 날 버스를 탔다가 분명 도서관의 낡은 사진에서 본 기억이 있는 한 남자의 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남자를 미행해 집 우편함에서 지문을 채취하고, 각종 자료들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토드는 그 남자가 나찌 전범인 쿠르트 두샌더(이안 맥켈런)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영화의 원제 < Apt Pupil >이 "총명한, 공부 잘하는 학생"이라는 뜻을 담고 있듯, 유달리 앎에 대한 욕구가 강한 토드는 그만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리고 만다. 사실을 모른 체 덮어두거나 경찰로 달려가는 방향을 선택하는 대신 두샌더와 거래를 시작했던 것. 토드는 "당신을 경찰에 고발하지 않을 테니 나에게 당시의 상황들을 자세히 들려달라"고 제안한다. 그런 한편 "내가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 감춰둔 서류들이 세상에 알려져 결국 당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영악한 협박을 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두샌더는 어쩔 수 없이 소년과 엮여들게 된다.

그러나 얼굴에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소년과 악명 높은 학살자는 애초에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쉽게 말해 소년은 제 무덤을 파고 만 것. 두샌더의 내부에 읍습하게 도사리고 있던 살인자의 본능은 한 사건을 계기로 다시금 몸밖으로 뛰쳐나오게 된다. 나찌 제복을 구한 토드는 그것을 두샌더에게 건네며 "입어 보라"고 명령한다. 처음에는 거부하던 두샌더는, 소년이 "고통스럽냐?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해봐라"는 식으로 으르렁대자 할 수 없이 제복을 받아든다. 차렷, 우향우, 행진! 소년의 구령에 천천히 발을 구르던 노인의 눈은 갑작스럽게 빛나기 시작하고, 그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팔을 치켜들 때―하일 히틀러를 외치는 나찌 특유의 경례동작을 가리킨다―공포에 질린 소년은 그제서야 후회하기 시작한다. 내 상대가 아니구나. 길을 잘못 들어도 한참 잘못 들었구나.

그러나 소년의 후회와는 상관없이 한번 눈을 뜬 폭력적인 본능은 발산될 곳을 향해 마구 들끓기 시작한다. 두샌더는 수용소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웃집 고양이를 오븐에 집어넣으려 하고, 이 행위는 그에게 동화되기 시작하는 토드가 카나리아를 농구공으로 내리쳐 으스러뜨리는 장면과 대구를 이룬다. 사실 이 대목은 잔학한 본성에 눈을 뜬 인간과 그에 동화되는 다른 인간의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내 보이기 위한 선택이었겠으나, 너무 노골적이어서 유치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 어쨌든 토드는 뒤늦게 도망치려 하지만, 이번에는 노인의 손이 늪에서 기어 나온 망령의 그것처럼 소년의 어깨를 단단히 그러쥔다.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은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학살극을 인간의 악한 본능에서 유래된 것으로 간주한다. 물론 틀린 가정은 아니나 역사적인 견지에서 볼 때 나찌독일의 만행을 괴물 같은 몇몇 인간의 횡포로만 규정짓는 것은 다소 순진한 발상일 것. 그러나 100퍼센트는 아니더라도 홀로코스트, 그리고 전쟁을 비롯한 지금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학살극들의 이면에 인간의 악한 본성이 도사리고 있으리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영화에서 두샌더는 토드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들려준다. "누군가를 완벽히 통제하려면, 그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 내가 그를 죽이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줄 필요가 있다." 폭력은 공포고, 지배욕은 무시무시한 망령이다. 그것이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이 여느 공포영화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이유다. 어쩌면 내 주위도 억울하게 죽어간 원혼들로 가득할지도 모른다고 진심으로 느끼게 되는 순간은 귀신영화를 볼 때보다는, 허구보다 더 잔혹한 실화를 접하게 되는 순간이니까.

참고로 감독과 캐스트 정보를 미리 알아둔다면 영화에 좀더 흥미를 가지게 될 것. <유주얼 서스펙트>와 <엑스맨>의 재주꾼 브라이언 싱어가 메가폰을 잡았고―이 영화는 싱어의 다른 작품에 비해서는 구조상 느슨한 편이다―, <굿바이 마이 프렌드>, <판타스틱 소녀백서>의 브래드 렌프로가 토드를 연기했다. 누군가 벽에 낙서해 놓은 하겐 크로이츠(우리나라의 사찰 표시와 비슷한 나찌 독일의 철십자 문양)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장면을 비롯, 렌프로의 연기도 좋은 편이지만 나찌 전범 두샌더로 분한 이안 맥켈런은 그야말로 소름끼칠 정도. 그 혐오스러움이 어느 정도냐면, 영화를 보고 나면 <반지의 제왕>의 현숙한 마법사 간달프 옹을 사심 없이 사랑하기 힘들어질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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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jin4rang
괴물은 인간이더라   
2008-10-16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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