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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우주의 지구 지킴이 병구
지구를 지켜라 | 2003년 4월 3일 목요일 | 박우진 이메일

“혹시 고향이 안드로메다 아니세요?” 지하 주차장에 나타난 괴이한 복장의 청년은 술에 얼큰하게 취해 막 귀가하려는 한 중년 사내에게 다짜고짜 이렇게 묻는다. 곧이어 어리둥절한 사내에게 정체불명의 스프레이를 사정없이 뿌려대는 청년. 방금까지의 공손한 눈빛은 찾아볼 수 없다. 어느새 매서운 눈빛을 번뜩이며 이 청년, 기절한 중년 사내를 직직 끌고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내가 아니면 누가 이 지구를 지키리오! 사명감에 활활 불타는 우리의 병(든지)구. 왕년 지구 지킴이 독수리 오형제의 이상한 복장에 자극 받았는지 우리의 병구도 특이함으로 따지자면 결코 뒤지지 않는 공식 복장을 손수 제작한다. 도무지 어디에 쓰이는 지 알 수 없는 오색 전선이 찬란히 바깥에 하늘거리는 단단 헬멧과 기후 변화나 입는 이의 체형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까망 비닐 옷을 갖춰 입은 병구, 드디어 외계인을 잡으러 나간다.

산기슭, 외따로 떨어진 장소에 기거하는 병구의 특기는 수공업. 자급자족으로 생활을 영위한다. 옷뿐만 아니라 직접 지은 집, 직접 만든 외계인 고문용 기계 등등의 배경은 엉성하고 조악하지만 어딘가 으스스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병구의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구성한다. 병구는 그렇게 엉뚱하고 한심해 보이지만 어떨 땐 섬뜩하고 망상에 사로잡힌, 사실은 처절하게 외로운 복잡 다단 인물인 것이다. 이런 인물이 끌어가는 영화니 역시 단순할 리 없고, 도저히 말 몇 마디로 압축이 안 되는 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는 판타스틱한 공간을 만나 물 만난 물고기처럼 발랄하게 뛰논다.

이 영화, 단순한 코미디라고 하기엔 좀 세다. 외계인을 물리치려는 병구의 신념은 너무 진지해서 잔혹하다. 물파스의 흡수를 돕기 위해 (외계인으로 추정되는)강 사장의 발등을 때수건으로 피가 맺힐 때까지 문지르는가 하면 벌겋게 달군 다리미로 맨 가슴을 누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끔찍한 광경은 의도적으로 진지하고 엉뚱한 맥락 속에서 정말 웃긴다. 코믹과 잔혹의 절묘한 조합을 우리는 이미 피터 잭슨의 초기작들에서 경험한 바 있다. ‘가짜’임을 당당하게 선언하며 ‘진짜같이’의 정교한 속임수를 뒤집어 버리는 재기가 그 영화들의 힘이다. 그리고 <지구를 지켜라> 역시 관객을 당황하고 즐겁게 만드는 ‘코믹잔혹극’의 대열에 서 있다.

영화는 재치 있게 관객의 예측을 요리조리 피해 간다. 기대를 벗어나는 엇박자 유머는 불규칙한 리듬을 만들고, 이 리듬이 영화를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끌어간다. 관습은 깨지고, 장르는 얽힌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길>등 많은 고전 작품들이 부분부분 비틀린 채 뒤죽박죽 섞여 있다. 이런 만만찮은 요소들을 유연하게 반죽해 그럴 듯한 모양새로 구워낸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인다.

<지구를 지켜라>는 정말 이상하고 괴상한 영화지만 마음에 내려앉는 묵직한 무게 역시 지니고 있다. 카메라는 병구의 일기를 들여다보며, 그의 기행을 구경하기보다는 함께 체험한다. 그가 왜 지구를 지키는 작업에 몰두하게 되었는지, 왜 약의 힘을 빌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지 파고들면 들수록 아픈 사연이 절절하다. 병구의 사연은 운이 나쁘고 특이한 사례의 개인사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기억은 우리 사회의, 나아가 인간 역사의 환부와 겹쳐지며 설득력을 얻는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이 어울려 살아오면서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타자’에게 가해 온 폭력의 역사가 병구를 매개로 들춰질 때 인간은 부끄럽고 숙연해진다. 그리하여 외계인의 일목요연한 ‘지구인사(史)’와 장난스럽지만 해피하지 못한 엔딩이 지독하게 ‘진짜처럼’ 느껴지는 지경에 이른다.

감독은 스스로의 영화 작업에 대한 생각도 은근슬쩍 끼워 넣는다. 상상을 하고, 행동에 옮기고, 카메라를 들이댄다는 점에서 병구는 어쩌면 감독 자신의 페르소나처럼 보인다. 그는 감시 카메라로 침입자를 발견하고, 강 사장의 고통을 찍는다. 이것은 마치 감독의, 영화에 세상을 향한 시선을 담아내려 했다는 주장처럼 보인다. 병구를 기억할 때, 병구의 고군분투를 기억할 때 <지구를 지켜라>가 단순히 재미있었네 보다는 어딘가 뭉클하네, 로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이런 점에서이리라.

이 주간 공황 상태다. 아무리 봄이라지만 볕이 저렇게 화사해도 되는 걸까 바람이 이렇게 포근해도 되는 걸까 싶고, 배불리 먹어서도 다리 뻗고 자서도 마음껏 웃어서도 안 될 것만 같다. 지구 한 편이 저렇게 아픈데 내 일상은 너무 멀쩡히 굴러가서 미안하다. 바그다드까지는 못 가더라도 당장 거리에 뛰쳐나가 피켓 들고 목쉬도록 소리를 지르거나 미 대사관 담이라도 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그러나 전 세계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분연히 떨쳐 일어섰는데도 아랑곳없이 전쟁이 일어난 판에 나 하나 어쩐다고 뭐 달라질까 소심한 생각에까지 이르면 결론은 늘 한숨이다. 이런 시절이라 그런지 지구를 지키겠다는 병구의 다짐이 더 새삼스럽다. 순이의 결연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아무도 없어. 우리가 지구를 지켜야 해.”

4 )
ooyyrr1004
지구는 이제 누가 지키나?   
2009-02-25 23:19
gaeddorai
당시 처참한 눈길을 받았던 현 수작!   
2009-02-22 20:45
ejin4rang
과연 지구를 지킬까?   
2008-10-16 14:56
pyrope7557
의외의 반전 ㅎㅎㅎㅎ
잼났어용...   
2007-07-19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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