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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 자신만의 리듬을 체득한 자유로운 광대 <베를린> 하정우
2013년 3월 4일 월요일 | 정시우 기자 이메일

이렇게 개봉일이 조금 흘러 하는 인터뷰는 개봉 일에 맞춰서 하는 인터뷰와는 사뭇 다르겠죠?
처음이에요. 개봉 4주차에 인터뷰를 하는 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뭔가 정리가 되는 느낌도 들고요. 그리고 도리어 얘기할 ‘꺼리’가 많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베를린> 얘기를 꼭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잖아요.

언젠가 <황해>를 두고 “나는 이 영화를 멜로드라마라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딸이 있고 부인은 한국에 돈 벌러 간 평범한 옌볜의 택시기사 이야기”라고요. 그 말은 <베를린>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베를린>은 멜로영화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맞아요. 사람들이 가장 흥미와 공감을 느끼는 부분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활하고 경험하는 이야기들이잖아요. 캐릭터를 이야기할 때, 그러한 부분을 잘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랬을 때 <베를린>이 셰익스피어 극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어디다가 갖다 붙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구조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베를린>이 액션 블록버스터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기는 하나, 결국 이야기 하는 건 부부간의 가정사니까요. 그래서 셰익스피어의 비극들이 재미있는 게 아닌가 싶고요.

셰익스피어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셰익스피어의 인물 중에 좋아하는 캐릭터가 있나요?
거의 다 좋아해요. 햄릿도 좋아하고, 리어나 맥베스의 심정도 이해가 가죠.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건 오셀로예요. 오셀로와 데스데모나, 이아고의 관계가 흥미롭죠. 그들이 형성하고 있는 관계는 우리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 않나 싶어요. 그랬을 때 (이아고의 교묘한 거짓말로 인해 자신의 아내 데스데모나를 의심하는)오셀로와 데스데모나의 관계가 어쩌면 표종성(하정우)과 련정희(전지현)와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 거고요.

최근에 직접 연출하신 <롤러코스터>는 비극이 아닌 희극인데, 어떠셨어요?
너무 재미있었어요. 지금 1차 편집까지 마친 상태인데, 촬영 할때는 주위의 그 무엇도 신경이 안 쓰이는 거예요. 뭔가에 몰두해서 작업할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어요. 물론 재미있는 만큼 부담스럽고 힘들고 캄캄한 부분도 있었지만요.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내 현주소가 이것밖에 안 되는 구나, 씁쓸함도 느꼈고요. 그리고 배우들 대부분이 신인이었는데, 너무나 뜨겁게 연기하는 그들을 보면서 뜨끔하기도 했어요. 나도 7-8년 전 신인 때는 저렇게 열정적이었는데, 싶어서요. 여러모로 느낀 게 많은 시간이었어요. 배우로서 작품에 임할 때 보지 못했던 다른 이면들을 본 시간이었고, 무엇보다 감독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는 시간이었죠.

후배들 연기를 보면서 뜨끔하셨다고 했는데, 반대로 ‘7년 전에 나는 저랬는데, 이젠 노하우가 생겼구나’ 라고 느낀 부분도 있었겠죠?
그런 부분도 분명히 있었죠. 그래서 캐릭터 접근 방식이라든지, 씬 분배 방법, 감정을 운용하는 방법 등 여러 가지 ‘영업비밀’을 배우들과 공유하면서 이야기 나눴어요.

귀한 ‘영업비밀’들을 많이 알려주셨겠네요?
네. 많이 알려줬어요.(웃음)
감독은 연기 뿐 아니라 총제적인 걸 통제해야 하잖아요. 감독으로서 어떤 게 가장 신경 쓰이던가요?
시나리오였던 것 같아요. 제가 직접 써서 그런지, ‘지금 얘기하고 있는 이 코드가 과연 관객들과 통할까’라는 의심이 계속 드는 거예요. ‘이게 맞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영화 끝날 때까지 저를 괴롭혔죠. 반응을 1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상대는 스태프들이었어요. 현장 편집본을 보면서 스태프들 반응을 살폈죠. 제가 예상한 부분에서 재미있어 하는 사람도 있고, ‘뜨악’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특히 코미디가 더 그렇잖아요. 관객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공개 전까지는 정말 모르는 게 코미디 같아요.
맞아요. 배우들도 코미디 연기라고하면 본능적으로 웃겨야겠다는 의식들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걸 없애주려고 트레이닝을 많이 시켰어요. “상황이 주는 코미디인거지, 개인기를 부리는 게 아니다. 정석으로 연기해라” 이러면서요.

하정우 씨 본인의 연출스타일이 나홍진 감독님과 윤종빈 감독님 두 분의 연출스타일 중 어느 쪽에 조금 더 가까운 것 같나요? 제가 알기로는 윤종빈 감독님이 배우에게 보다 많은 자유를 허용하는 걸로 아는데요.
안 그래요. 두 분과는 달라요. 물론, 닮았다고 느껴지는 구석이 조금은 있을 거예요. 어떤 식으로든 제가 영향을 받았을 테니까요. 그리고 두 분 뿐이겠어요. 최근 함께 한 <더 테러 라이브>의 김병호 감독님, <베를린>의 류승완 감독님 영향도 받았겠죠. 캐릭터나 대사에서는 <러브픽션>의 전계수 감독님과 <멋진 하루> 이윤기 감독님의 느낌도 있을 테고요.

그 중에서 ‘이건 나만의 스타일이야’ 싶은 게 있지 않던가요?
그건, 아직 모르겠어요.(웃음) 나중에 보시면 꼭 얘기해 주세요.

그럼, 그 확인은 언제 할 수 있나요?
<롤러코스터>는 윤종빈 감독과 함께 하는 <군도> 촬영이 끝나는 가을쯤 개봉할 것 같아요. <군도>가 4월 3째 주부터 9월까지 진행될 예정이거든요. <더 테러 라이브>는 하반기 쯤 개봉하지 않을까 싶고요.

하정우 씨 작품을 보면, 시간의 제약에 갇힌 영화들이 많습니다. 하루의 사건이 담긴 <추격자>와 한나절을 담아낸 <멋진 하루>가 그렇고, <더 테러 라이브>는 아예 90분 동안 TV로 생중계되는 상황이잖아요. <롤러코스터> 역시 도쿄발 비행기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고요.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 끌리는 게 있으신가요?
아, 그렇네요. 음… 의도적으로 고른 건 아닌데, 그런 것들이 흥미로웠나 봐요. <롤러코스터>의 경우엔 코미디이다 보니까 웃음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설정들을 선택했던 것 같고요. 한정된 시간이라든지, 밀폐된 공간 같은 것들을 말이죠. 원안 제공이 류승범인데, 승범이가 비행기에서 겪은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영화로 발전시켰죠.

영화로 만들겠다고 하니까, 류승범 씨가 뭐라고 하던가요?(웃음)
“나한테 돈 좀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알았다. 기다려 봐라~”했죠. 결과가 나와야 뭘 주든 하잖아요.(웃음)
방은진 감독님의 <집으로 가는 길> 출연 불발 소식을 듣고 개인적으로는 아쉬웠어요. 2007년에 이진아 감독님의 <두번째 사랑>을 찍은 이후 여자 감독과 만날 기회가 없으셨잖아요. 그래서 여감독이 바라보는 하정우를 다시 보고 싶었거든요. <두번째 사랑>의 지하는 지금껏 당신이 연기한 캐릭터 중에 가장 섬세했던 남자로 기억해요. “담요에 보풀이 일기 시작했다”는 여자(베라 파미가)의 말조차 허투루 듣지 않는 남자였죠.
이번은 운 때가 아니었나 봐요. 여자 감독님과는 좋은 기회에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한편으로는 여성 감성의 영화들에 꾸준히 출연해 온 느낌이 있어요. 전계수 감독님의 <러브픽션>이나, 이윤기 감독님의 <멋진 하루>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죠.
<러브픽션>과 <멋진 하루>의 남성캐릭터들이 지닌 정서와 감성이 제게도 있는 것 같아요. 공감 가는 부분이 있기에 그런 작품들을 선택한 게 아닌가 싶고요. 그들은 <베를린> <황해> <추격자> <범죄와의 전쟁: 나쁜남자 전성시대>에서 보여준 마초적인, 소위 얘기하는 ‘상남자’ 캐릭터들과는 다르죠. 흥미로워요.

남자가 바라보는 하정우와 여자가 바라보는 하정우는 다른 것 같나요?
남녀를 구분지어서 얘기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각자의 성향에 맞춰서 저를 바라보시는 것 같거든요. 가령, <멋진 하루> 이윤기 감독님은 “정우, 너는 멜로를 해야 하는데~”라는 말씀을 종종 하세요. 윤종빈 감독님이 바라보는 저는 또 다르죠. 사적인 자리에서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았기 때문인지, 아무래도 제 캐릭터를 조금은 더 입체적으로 바라봐 주는 게 있어요. 그래서 윤종빈 감독이 만든 캐릭터를 연기할 때는 조금 더 밀착돼 있다는 생각이 들죠. 제가 작품을 함께 한 감독님을 계속 선호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진 않을 거예요. 그럴수록 제 캐릭터는 조금 더 잘 다듬어질 수밖에 없고, 보다 유리한 상황에서 출발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베를린> 속편이 나오면 좋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고요 .

그림 작품은 지금도 계속 하시죠?
그럼요. 3월 한 달 간 뉴욕 첼시에서 전시회가 있어요. 핀란드 작가와 2인전을 열어요. 그래서 조만간 뉴욕에 갈 예정이에요.

그림을 첫 공개 하는 건, 영화를 첫 공개 하는 것과 비교해 어떤 기분인가요? 감독과 작가가 창조한 인물을 보여주는 영화와 달리, 그림은 온전히 하정우라는 사람의 감정을 보여줘야 한다는 점에서 훨씬 더 맨 몸으로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 것 같은데요.
맞아요, 맞아요! 영화는 묻어갈 수 있잖아요. 주인공으로서 책임감이 있기는 하지만 감독님이나 다른 배우들이 있기에 묻어갈 수 있죠. 그런데 그림은 말씀하신대로 온전히 저만을 보여주는 작업이기 때문에 도망 갈 구멍이 없어요. 실제로 첫 개인전을 열 때 잠을 못 잤어요. 너무 긴장되고 민망해서 말이에요.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지?’ 하는 후회도 밀려왔던 것 같아요. 전시는 제 인생의 계획에서 없었거든요. 그림은 그냥 혼자 즐기고 쌓아둔 걸 보면서 뿌듯해하는 수준이었거든요. 그런데 어떤 작가가 제 그림을 보고는 전시를 해 보자는 이야기를 꺼냈고, 이후 ‘닥터박 갤러리’ 사람들이 몰려와서 전시 일정을 구체적으로 잡아갔어요. 그러다가 김종근 선생님(하정우에게 “화가가 될 사람이 배우가 됐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는 평론가)을 만나게 됐는데, 칭찬을 너무 많이 해 주시는 거예요. 거기에 제가 살짝 착각을 했던 거죠. ‘내가 정말 느낌이 있나?’ 이러면서요. 그렇게 해서 2010년도에 첫 개인전을 가지게 됐는데, 어마어마한 공포와 예상치도 못한 긴장감과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몰려왔어요. 아마, 전시회 내내 제 얼굴이 빨개져 있었을 거예요. 그림의 의미를 설명해 달라고 하는데, 제대로 설명도 못 했어요. “그냥 솔직히 그렸다. 내 무의식의 흐름이었다.” 이랬죠.(웃음) 그런데 첫 번째 전시회를 하고 나니까 책임감이 생기는 거예요. 그건 자신감과는 달랐어요. ‘이미 엎질러졌다. 시작을 했으니, 그리고 내게 소질이 있다고 하니, 그러면 이 부분을 파 봐야겠다’ 그러면서 더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그때부터는 영화 찍는 거 아니면, 집에서 그림 그리는 거, 두개 밖에 안 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화가 하정우에게 터닝 포닝트였던 ‘피에로 시리즈’
화가 하정우에게 터닝 포닝트였던 ‘피에로 시리즈’
피에로(Pierrot)를 테마로 2011년에 가졌던 세 번째 전시회는 특히나 관심을 뜨겁게 받았던 걸로 알아요.
그 ‘피에로 시리즈’가 저에겐 터닝 포인트였어요. 또 한 번의 터닝 포인트는 <베를린> 찍으러 베를린과 라트비아를 갔을 때 찾아왔어요. 베를린에서 새로운 스타일을 찾았다고 할까요? 2012년에 그린 그림들은 한 번도 전시를 안 했어요. 작년에 ‘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기는 했는데, 그건 전작의 연장선이었죠. 이번 뉴욕에서 열리는 전시회에서 그게 첫 공개 되는데, 베를린에서 작업할 때 정말 묘한 뜨거움을 느꼈어요. 내가 그린 그림을 벽에 붙여놓고 자는데, ‘우와’ 너무 좋은 거예요.

베를린에서도 영화와 그림 활동을 병행한 건가요?
네. 캔버스 천을 가지고 갔었거든요. 해외 생활이 지루하고 고되리라는 걸 예상하고, 아파트를 얻어 달라고 했죠. 호텔과 비교해서 아파트가 값도 싸고 공간도 훨씬 넓었어요. 벽에다가 테이블을 붙여놓고 작업을 했죠. 150호와 200호짜리 두 점, 10호짜리 이하 작품들 10점을 하고 왔는데, 작업을 하면서 전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작업한 걸 보면 너무 뿌듯한 거예요. 굉장히 새로운 느낌이었죠. 150호짜리 한 작품 하는데 4주가 걸렸는데, 그 작품을 본 사람들은 저에게 “정신분열이 있니? 너는 생각하는 게, 뭐가 이리 집요하냐?”이러더라고요.(웃음)

당시의 어떤 상황이 당신을 그렇게 집요하게 한 것 같나요?
제대로 된 액션 장르는 <베를린>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있었나 봐요. 두려움을 어떻게든 풀어야 하는데, 그리고 아닌 척 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런 불안한 감정들이 화폭에 고스란히 드러난 거죠. 그때 선과 면을 쪼개는 패턴이 전보다 더 심화돼서 표현됐어요. 그리고 그런 작업을 하면서 제가 오히려 위안을 받는 듯한 든든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때 ‘이러한 패턴의 작업들을 더 해 나가야겠다’는 확신을 했죠.

하정우만의 스타일을 찾아간 거군요.
네. 저는 미술전문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수많은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어요. 그런데 영향을 받는 작가들이 또 시간마다 달라져요. 처음에는 장 미셸 바스키아였다가 잭슨 폴록으로 넘어갔다가, 피카소의 후기 작품 같은 느낌이 들다가, 그것이 파울 클레로 넘어간 후에 조금 더 단순화 돼서 장 뒤뷔페로 갔어요. 그러다가 최근에 넘어온 게 베르나르 뷔페죠. 베르나드 뷔페의 그 느낌과 그 선들이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제 ‘피에로 시리즈’를 보면 베르나드 뷔페의 잔상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남아있어요. 그랬을 때 이제 또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베르나드 뷔페에서 빨리 나와야 하는데 이걸 내 식대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하는 생각이요. 그래서 더 많이 해체를 한 것 같아요. 선들을 말이에요. 결국 내 것을 계속 찾아나가고 있는 거죠.

확실히 그림도 스타일이 변하는군요. 그건 연기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정우 씨 연기만 봐도 연극을 하다가 영화로 넘어 온 초반의 연기와 지금의 연기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연기 패턴이 바뀌는 것과 그림 패턴이 바뀌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사와 얼마나 가깝게 그렸느냐’로 그림을 ‘잘 그렸다/못 그렸다’ 얘기 하는 것 같아요. ‘데생을 잘해야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하는 우리나라 입시미술의 문제점과 같은 맥락이죠. 저 역시 그런 편견에 빠져 있었는데, 그걸 깨 준 사람이 바스키아였어요. 바스키아 그림을 보면서 ‘내가 그은 선들이 뭔가와 비슷하게 그리려고 애를 쓴 결과물이지, 한 번이라도 내 선을 솔직하게 표현한 적이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거죠. 그때부터 ‘그래, 그림이라는 게 꼭 그렇진 않지!’를 느끼면서 솔직하게 내가 그릴 수 있는 만큼만 그리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이 연기에도 자연스럽게 접목이 됐고요. 잘 아는 척, 단점을 가리는데 에너지를 쓰지 말고, 내가 잘 하는 것에 힘을 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흥미롭네요.
그죠? 어떤 느낌인지 아시겠죠? 그런데 여기에 또 부작용이 있더라고요. 그러다보니, 자꾸 심플해 지는 거예요. 자꾸 꾸미고 싶지가 않은 거예요. 연기도 그림도. 그러다보니 감독님들이 “정우씨, 연기를 조금 더 해 주면 안 되겠냐”고, “조금 더 친절하게 해 주면 안 되겠냐”고 그러고.(웃음) 한번은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를 본 어떤 감독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너에게 할 말이 없어. 그런데 그게… 그게, 위험한 것일 수도 있어, 정우야”, “뭔데요?”, “그냥 너는… 너는 뭔가가 너무 딱 떨어져. 그게 과연 좋은 것일까… 인간미가 보일까… 아, 나도 잘 모르겠네.” 이러면서 대화를 이어 나갔죠.

예상치 못한 지적을 받고 고민이 되겠군요.
네. 고민이 됐죠. ‘아, 그래… 친절하게 연기해 줘야 하는 포인트들이 분명이 있는데, 어느 순간 내가 너무 심플해졌구나.’ 느꼈죠. 그러니까 점점 진화하고 있는 게 아니라, 점점 백지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때부터 다시 ‘연기를 해야지!’라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갖게 됐어요.

그런 마음을 가진 후 촬영한 <베를린>에선 어땠던 것 같나요?
왜, 영화에서 표종성이 “전향하겄소!” 하는 장면이 있잖아요. 처음엔 그 대사를 굉장히 차갑게 했어요. 그랬더니 류승완 감독님이 “(애절하게)아~~ 정우씨! 하배우! 연기를 조금만, 더… 어떻게 여기서, 조금 더…”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연기가 작위적으로 된다는 느낌이 들면 너무 싫은 거예요. 긴 논의 끝에 감독님 의견을 받아들이고서야 “저저저전전… 전향하겠소!” 이렇게 나온 거예요.(좌중폭소) 그런데 사실 대부분의 관객입장에서는 그게 맞거든요.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거거든요. 뒤늦게 다시 반성했죠. ‘내가 또, 너무 척을 했구나’ 라고요. 이제는 계산을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연기를 친절하게 해야 하는 부분과 심플하게 흘러가도록 두는 부분을 잘 배치시켜야겠다, 싶어요.

미술이 연기에 도움이 된다는 말씀을 종종하셨는데, 지금은 그림과 연기를 분리해서 바라보는 시간을 갖는 중인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얼마 전에 친구가 제 그림을 보더니 “조금 더 솔직해져야 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이건 계속 안고 가야 하는 고민인 것 같아요. 어떻게 해결되는 부분도 아니고, 완성되는 부분도 아닌 거예요. 그냥 시행착오를 겪어 나가면서 그때 이슈가 되고, 그때 불안해하고, 그때 뭔가 내세우고 싶은 부분들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나이가 먹고 성장하고 경험을 쌓고 시간을 보내는데 있어서 맞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림뿐 아니라 연기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면에서 ‘다작’을 하는 것이 이미지 소비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고요. 다작을 하는 게, 과연 이미지 소비일까? 내 미래를 봤을 때? 아닌 것 같아요. 이것이 오늘 하루 내가 표현하고 싶은 삶의 단면이 될 수도 있는 거고, 그것이 성숙해져서 어느 날은 그 깊이가 확 보여 질수도 있는 게 아닌가 싶은 거죠.

어떤 배우는 10년 후의 모습이 어느 정도 짐작이 되는데, 어떤 배우는 도무지 상상이 안 가는 경우가 있어요. 제 개인적인 생각에 당신은 후자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이 배우가 10년 후에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그림에 더 열중하고 있지 않을까? 연기를 한다면, 할리우드에 있지 않을까? 등등 너무나 많은 경우의 수가 있는 것 같아요. 미래에 대한 그림들은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나요?
많이 있어요.(웃음) 바람이 있다면, 배우든 감독이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든 10년 후에도 꾸준히 하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걸 어느 동네에서 하느냐는 잘 모르겠지만요. 할리우드에 가 있을 수도 있겠죠. 오스카 상 트로피를 받는 건, 어렸을 때 지녔던 꿈 중 하나니까요. (이)병헌이 형이나 박찬욱 감독님, 봉준호 감독님, 김지운 감독님이 할리우드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걸 보면 너무 좋아요. 병헌이 형하고도 얼마 전에 사석에서 만났는데, 형이 에이전시 등 여러 가지를 구체적으로 알아봐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든든하죠. 그래서 “나는 형이 너무 자랑스럽다. 형이 할리우드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덕분에 내가 그곳에 더 가까워지는 것 같다”는 마음을 전했어요.
제가 한미합작영화 <두번째 사랑>에서의 당신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 중 하나가, 우리나라 배우가 할리우드에 가면 대부분이 액션을 연기하는데 하정우 씨는 정극 연기를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궁금한데, 혹시 그런 생각 안 해보셨나요? 할리우드에 조금 더 빨리 진출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 말이에요. 그때 진출했어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데 그땐 한국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인배우였잖아요. 일단 국내에서 배우로서 자리매김을 하는 게 선결과제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한국 시청자들에게 내가 어떤 배우인지를 먼저 알려야, 나중에 어딜 가든 돌아올 곳이 있을 거란 생각도 했죠. 그래서 당시 어떤 구체적인 제의들이 오고가긴 했지만, 할리우드 대신 드라마 <히트>를 선택한 거고요. 그리고 사실 중간에 몇 번 더 제의가 들어왔었어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요. 그런데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굉장히 한정된 캐릭터들이었고, 자칫하면 한국 정서에 위배될 수 있는 캐릭터들이었죠. 그랬을 때 저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지라, 고려를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조금 더 자부심을 가지고 만들어 갈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더라고요. 현재로서는 할리우드에 진출한다고 해도 여기 있는 모든 걸 정리할 생각은 없어요. 프로젝트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요.

언젠가 인터뷰에서 “조용히 열심히 일하다가 40대 초반쯤 영향력을 가지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30대 중반에 벌써 그 영향력을 가지셨어요.
아니에요. 아직 멀었어요.

아직 아닌가요? 아니, 당신이 생각하는 영향력이라는 건 어떤 건가요?(웃음)
글쎄요. 나이를 잘 먹어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하는 거. 관객들과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거. 그리고 관객들이 가려워하는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면서 작업할 수 있는 거. 그런 부분인 것 같아요.

지금도 어느 정도 하고 있지 않으신가요? 원하는 시나리오를 고를 수 있는 위치에 있고, 그걸 또 많은 사람들이 높이 평가 해 주고 있잖아요.
아직 할 일이 많아요. 음… 다빈치를 좋아해요. (미술, 건축, 토목, 조각, 수학, 과학, 음악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뽐낸)레오나르도 다빈치를요. 그때 그 시대가 그 사람에게 많을 일을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그가 한 일들은 다 연결고리가 있었던 것뿐이죠. 각 분야의 작업들이 상호보완 되면서 그를 풍부하게 한 것인데, 저 역시 그런 꿈을 품고 있어요. 그림을 그리는 것, 영화를 만드는 것, 영화에서 연기를 하는 것, 이 모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거니까요. 그걸 기반으로 제가 제작을 할 수도 있는 거고, 남다른 시선을 가지고 후배들을 양성할 수도 있는 거고, 팀을 꾸릴 수도 있는 거죠. 그러니까 조금 더 성숙된 영화인이고 싶은 생각, 문화를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조각을 완성해 나가고 있으신 거군요.
그렇죠. 지금은 목표한 지점에 가기 위한 과정일 뿐이에요.

연출과 제작은 어릴 적부터 가지고 계셨던 꿈인가요? 아니면, 연기를 하면서 커진 건가요?
감독의 꿈도 어렸을 때부터 있었어요. 연기와 다른 게 있다면, 배우의 꿈은 양지에서 구체적으로 생각했다면, 감독의 꿈은 그 안에서 조용히 발전시켜 나갔다는 거죠.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저는 그냥 영화가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인지, 저는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영화 현장에 참여하는 것 같고요. 다른 태도, 다른 마음가짐으로요.

가령 어떤 거요?
현장 전반에 관심이 많아요. 촬영장에서 연기만 하고 빠지는 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의문을 가지고 많은 걸 물어봐요. 컷은 어떻게 나누는지, 콘티를 왜 이렇게 짰는지, 극 중 이름은 어떻게 나온 것이며, 조명은 왜 이렇게 치고, 카메라 렌즈는 몇 미리를 쓰는지 하는 것들을요. 예산이 궁금해서 제작파트에게 “예산서 좀 보여줄 수 없냐”고 묻기도 해요.(웃음) 심지어 밥차 단가가 얼마냐 하는 시시콜콜한 것까지도 물어보죠. <황해> 찍을 땐 황순욱 기사님에게 조명 치는 방법을 강의해 달라고 조르기도 했어요.
언젠가 써 먹을 기회가 있다는 생각이 있었을까요?
그랬었나 봐요.(웃음)

실제로 <롤러코스터>할 때 굉장한 도움이 됐겠군요.
어마어마하게 됐죠. 류승완 감독님이 현장에 놀러 와서는 “다섯 작품 연출한 사람 같다”고 하더라고요. 스태프들도 제가 하는 것들이 흥미로웠나 봐요. 물론 처음엔 “배우가 무슨 감독을 한다고~” 식의 눈초리로 쳐다봤죠. 그런데 제가 콘티를 그릴 때부터 조금씩 놀래더라고요. 그러니까 영화가 재미 ‘있고/없고’, 퀄리티가 ‘높고/낮고’를 떠나서, 제가 현장 진행하는 걸 보고서 장편영화 열 작품쯤 찍은 사람 같다고, 다들 그랬어요.(웃음)

하정우 같은 친구를 가까이 두면, 삶이 지루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해프닝이 끊임없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랄까.
맞아요. 그래서 제 주변 사람들은 바빠요.(웃음) 최근에도 짬을 내서 OCN 채널 광고를 찍었는데요, <롤러코스터> 스태프와 배우들이 그대로 와서 찍었어요. 재미있었어요. 제가 연출도 하고 연기도 했는데, 찍다가 “컷!” 하고는 달려가서 카메라 확인하고 그랬어요.

<군도> 촬영 들어가기 전까지의 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설마, 또 작업을 하면서 휴식을 취할 생각인가요?
이번에는 여행을 갈까 해요. 따뜻한 나라에 가서 그림이나 그릴까, 싶기도 하고요.

진짜로 쉬시네요, 이번에는.
네. 진짜에요. 진짜 오랜만의 휴식이죠.

참, 국제갤러리에서 바스키아 전시회를 하고 있는데, 아세요?
아, 그래요? 이따 인터뷰 끝나고 들려봐야겠네요. ‘팀 버튼 전’도 너무 보고 싶은데.(웃음)

2013년 3월 4일 월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2013년 3월 4일 월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    

2 )
taehee3725
7번방의 선물을 그 인기로 흥행을 하고서도 티가 안나는 영화로 전럭해버려 속상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하정우의 연기는 물올랐다고 평이 좋은데 너무 안타값습니다. 좋은 영화와 좋은 배우의 조합은 정말 굿!!!
  
2013-03-05 23:22
v53324
하정우의 연기를 사랑하고 하정우의 존재는 한국영화의 축복이다. 하정우처럼 느낌있는 배우는 흔치 않고 그처럼 멋들어지게 연기하는 배우도 흔지 않다. 진심으로 멋진 영화배우다.   
2013-03-04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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