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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품은 배우 <퍼펙트 게임> 조승우
2011년 12월 24일 토요일 | 정시우 기자 이메일

영화 찍으면서 많이 야윈 것 같다.
아니다. 영화 찍으면서가 아니라, 오늘 급격히 야위었다.(좌중폭소) 오전 10시부터 와서 지금까지 계속 인터뷰 중이거든.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이 인터뷰는 밤 8시부터, 9시 30분까지 진행됐다.)

언론 시사회 끝나고 가진 기자 간담회 자리에서 약간 다운 돼 보였다. 영화에 대한 생각도 많아 보였고. 시사회 끝나고 시간이 조금 지났는데, 그 동안 영화에 대해서 찬찬히 돌아봤나?
-언론 시사회 때 영화를 처음 봤다. 밤새면서 후반작업 하는 스태프들에게 괜히 피해가 갈까봐, 편집본을 일부러 안 보러 갔었거든. 그래서 궁금하기도 했고, 기대도 컸다. 영화는 기대만큼 잘 나왔다. 다만, 연기적인 부분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조금 더 인간적인 최동원 감독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마운드에 선 냉철한 모습이 주를 이루더라고. 최동원 감독님의 따듯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장면들이 편집 되면서, 내가 상상한 밸런스와는 조금 다른 영화가 나왔다. 나쁜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 걸 생각하다 보니, 시사회 끝나고 약간 멍해있었다. 너무 정이 들었던 작품이라, 허탈감도 있었던 것 같다. 몇 달 동안 공연한 작품을 떠나보낼 때의 심정이랄까. 마지막 공연 끝나고 분장 지울 때, 굉장히 허탈한 느낌이 드는데 그것과 비슷했다. 고독한 느낌이 들었다.

편집된 게 아쉽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장면들이 편집됐나?
-일단 최동원 선수의 배짱. 그리고 유니폼을 입었을 때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자신감. 직구를 던져 홈런을 맞은 OB 선수에게 다시 같은 직구를 던지는 씬이 있었다. 보통 다른 투수들 같으면 ‘지난번에 직구를 던져서 홈런을 맞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다른 쪽으로 보내서 삼진을 잡아내자’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런데, 최동원 감독님은 ‘너, 내가 직구 던졌을 때 홈런 쳤어? 그래, 또 쳐봐’하면서 똑 같은 공을 던지셨다. 그런 배짱을 보여 줄 수 있는 장면이 날아갔다. 그리고 감독님은 마운드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승부사였지만, 사석에서는 굉장히 유머러스하고 쾌활한 분이셨다. 그런 걸 보여주는 부분이 있었다. 왜, 경남고 시절 회상씬에서, 선생님과 라면 먹으면서 대화 나누는 게 있잖나. 그 때 선생님이 원석이 다이아몬드가 되는 과정을 길게 설명하고선 “자, 알았지? 먹어라”하는데, 먹으려고 보니 라면이 퉁퉁 불어 있더라. 밝은 최동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서, “이거, 라면 맞습니까? 이거, 너구리 아닙니까” 이런 애드리브를 했는데, 하나도 안 들어갔다.(웃음) 후배들을 아끼는 마음을 표현한 것들도 많이 편집됐다. 최동원 감독님 이미지를 포털로 검색을 해 보면, 늘 후배들이 감독님 옆에 붙어 있다. 그만큼 후배들이 많이 따랐던 거지. 후배들이 기억하는 최동원 감독님은 정의파에 의리파셨다. 후배들의 권익을 위해서 선수협의회 회장도 맡으셨다. 그로인한 오해로, 자기 고향인 롯데를 떠나 삼성으로 맞트레이드 되면서까지 말이다. 2년 후엔 은퇴식도 없이 떠나게 되고. 그런 모습에서 최동원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가를 느꼈고, 그런 인간적인 모습을 더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영화화 과정에서 없어진 게, 아쉬운 이유다.
돌아가신 최동원 감독님이 영화를 보셨으면 뭐라고 하셨을 것 같나?(최동원 감독님은 지난 9월 암으로 타계했다.)
-스스로 위안을 삼는 게 있다. 박희곤 감독님과 제작진이 시나리오를 들고 감독님을 찾아갔었다고 한다. “선생님. 저, 박희곤이라고 하는 감독인데, 5월 16일 경기를 다룬 영화를 만들려고 합니다. 선생님과 선동렬 감독님을 주인공으로 해서 허구도 조금 넣어서 만들고 싶습니다” 했더니, 단칼에 “만들 거면 제대로 만들라”고 하셨단다. “이도 저도 아닌 영화 만들지 말고 프로야구선수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고 한국영화역사에도 남을 수 있는 야구영화를 만들어 달라”고. “그것만 약속하면, 허구를 넣어도 괜찮다”고. 그 약속을 받고, 선동렬 감독님을 찾아갔다. 선동렬 감독님 하시는 말씀이 “동원이 형은 하신대요?”, “네!”, “그럼 저도 하죠, 뭐.” 완전 쿨 한 거지. 이렇게 해서 영화화가 됐는데, 물론 부족한 부분이 많다. 내가 프로가 아니기 때문에 더 생생하게 담아내지 못한 것도 있고. 하지만 의미 있는 작품을 찍었다고는 자부할 수 있다. 그래서 만약 보셨다면, “고생했다”고 하지 않으셨을까 싶다.

VIP 시사회 끝나고 나면, 동료들이 문자로 영화평을 보내주곤 하잖나? 인상 깊었던 동료의 평이 있던가?
-동료들 초대를 많이 안 했다. 동료가 별로 없어서.(웃음) (지)진희 형은 마침 세례식이 있어서 못 왔다. 우리 진희 형이 드디어 종교를 갖고, 세례를 받는다길래. “형,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말고 세례 받아!”이랬다. (황)정민이 형은 촬영 때문에 바쁘고, 류승범은 연락처를 모르고. 그리고 초대했으면 양동근을 불렀을 텐데, 같이 했고! 아, 시아 준수! 준수는 영화를 보고, “형, 영화 너무 재미있고 잘 봤다”고 말해줬다. 그리고 또 누가 왔었더라? 중학교 동창들이랑, 함께 공연 중인 <조로>팀들, 그리고 사회인 야구단 형들이 왔는데, 야구단 형들은 “수고했다”고! “너무 재미있다”고 하더라.

야구팬들은 최동원 감독의 투구 폼과 얼마나 비슷한가를 관심 있게 볼 것 같은데, 상당히 비슷하더라.
-최동원 감독님이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의식같이 하시는 게 있다. 우선 땅을 고른다. 발로 땅을 ‘탁! 탁!’ 골라내고 정리가 되면, 주변을 둘러본다. 그 다음에 모자를 두 번 고쳐 쓰고, 로진백을 툭 털어서 놓은 다음, 안경을 이렇게도 만지고 요렇게도 만진다. 바지도 치켜 올리는데, 글로브를 끼고 있으니까, 꼭 (왼쪽 바지를 올리며)요쪽부터 올린다. 요렇게. 그러고 나서 스타킹을 탁 두 번 털고, 사인을 받은 다음, 와인드업! 이걸 다 했는데, 영화에는 나오지 않더라. 이런 걸 매번 다 담다 보면, 영화가 세 시간 넘게 나오고 말테니 말이다. 그래도 한 번 정도는 제대로 살려주시지~(웃음) 나는 최선을 다 했다. 아주 디테일하게 봤다니까.(웃음)
카메오로 출연한 <YMCA 야구단>이 있기는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퍼펙트 게임>은 당신에게 두 번째 스포츠 영화인 동시에 두 번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스포츠 영화는 선수로서의 자태를 익히는 게 요구한다는 점에서 신체적으로 힘들고, 실화 영화는 그 인물에 대한 고찰이 있어야 하다는 점에서 심리적으로 부담이 있다. 그 두 가지가 섞인 영화를 또 선택했는데, 이런 경우 어느 쪽에 더 포커스를 두게 되는지 궁금하다.
-내가 아무리 흉내 낸다고 해도, 그들과 똑같을 수는 없을 거다. <말아톤>에서 초원이 캐릭터를 만들 때도, 실제 모델인 형진이의 모습만을 담지는 않았다. 캐릭터의 모사가 아닌 포인트와 특징을 뽑아내 나만의 캐릭터를 만들려고 했다. 왜 영화를 보면, 형진이라 손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이렇게 하는 거 있잖나. 그건 형진이가 한 게 아니다. 형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누가 나를 보더니, 손을 치켜세우면서 “잘 생겼다, 잘생겼어!” 이러더라.(웃음)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캐릭터에 반영했다. 초원이가 뛰기 전에 팔을 앞뒤로 휘젓는 특유의 동작도 다른 친구가 하던 거다. 그런 것들을 다 기억해 뒀다가, 캐릭터에 섞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실제 야구 선수들을 데려다가 최동원 감독님과 똑같은 폼으로 던져 보라고 했는데, 다 못하더라. 그런데 선수가 아닌 나는 어떻겠나. 100% 따라 하지 못한다. 감독님이 돌아가시기 전에도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 투구 폼은 어렵기 때문에 따라 하기 힘들 거다. 다칠 수 있으니, 조심해라”라고. 그래서 투구 폼에 대한 부담은 접어두고 갔다. 최동원 감독님의 말투도 똑같이 하려고 하지 않았다. 감독님은 부산 사투리를 쓰셨지만, 방송에서 인터뷰 하실 때는 격하지 않은 부산 말을 구사하려고 하셨다. “뭐뭐 했고요~” 이런 식으로.(웃음) 그걸 그대로 따라 하고 싶지 않아서 (김)윤석이 형에게 예스러운 부산 토박이 사투리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윤석이 형이 버전별로 녹음해 준 파일을 들고 다니면서, 그걸 내 거화 시켰다.

박희곤 감독에게, 어머 어마한 분량의 자료를 받았었다고.
-박희곤 감독님이 나를 처음 만났을 때, 500~600페이지에 달하는 파일을 건네주셨다. 고교 시절 노 히트 노런의 주인공 최동원. 우리나라 최초로 팔 보험을 든 투수 최동원. 누구나 탐내는 괴물 투수 최동원. 눈이 나쁜 아들을 위해 안경 공장에 찾아가 무테안경을 직접 제작하셨던 최동원 아버지의 부정. 그리고 맞트레이드와 선수협 이야기까지 감독님에 대한 히스토리들이 다 나와 있는데, 거의 자서전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걸 보고 아까 얘기했던 것들, 투수 최동원이 아니라 인간 최동원에 대한 것들을 더 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거다. 마운드를 내려오면 그냥 평범한 동네 형 같은 느낌의 최동원을 말이다.

영화 하면서 취미가 하나씩 생기는 것 같다. <고고 70>하면서 기타가 취미가 된 걸로 알고 있다.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사회인 야구 투수로 뛰게 됐고. 다음 작품에 따라서 취미생활이 또 생기지 않을까 싶다.(웃음)
-그러게. 다음 작품이 뭘까? 차기작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백수다. 일이 생길 때까진 사회인 야구단 투수로 활동해야지, 뭐. <조로> 끝나면, 동계훈련도 갈까 봐~(웃음)

<말아톤> 끝나고는 마라톤에도 빠졌던 건가?
-그건, 아니다. <말아톤> 하기 전에 제일 싫어했던 게, 뛰는 거였다. <말아톤>은 하나의 산이었던 셈이지. 마라톤 하신 분들 보면, 중독인 분들이 많다. 그래서 건강이 좋은 분도 있지만, 나쁜 분도 많단다. 폐를 너무 많이 쓰니까, 이게 빨리 산화 되는 거지. 그런데도 그 분들은 하루라도 안 뛰면 몸에 노폐물이 쌓이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계속 뛰신다. 자기만족을 위해 뛰는 거지. 내 경우에는 <말아톤> 찍을 때 뛴 것보다, 연습할 때 뛴 게 20배는 더 많았다. 하루에 7킬로씩, 벌레까지 먹어가며 양재천을 뛰었다. 영화 끝난 후로는 러닝머신 뛰는 것도…군대 가서야 다시 많이 뛰었지만.(웃음)
기타나 공 던지는 거나, 쉽게 몸에 익힐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게 취미가 될 정도라는 건, 엄청난 연습량이 있었다는 건데. 아닌 게 아니라 당신은 연습벌레로 통한다. 혹시 어떤 역할을 준비할 때, 본인 스스로를 혹사시키지 않으면 일을 했다고 느끼지 못하는 유형인가?
-혹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도 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작품이니까 당연히 할 만큼은 해야지. 그런 의미에서 내가 제일 못했던 연기가 <타짜>다. 이건 뭐, 해 본적이 있어야지. 그건 동근이가 살면서 처음 공을 던져봤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였다. 나 역시 살면서 처음 화투짝을 잡아봤으니까. 손에 물집 잡힐 정도로 하긴 했다. <지킬 앤 하이드> 일본 공연 가서도 화투를 들고 다닐 정도로 했지만, 결국은 허당이었다.

듣기로는 상당히 잘 했다고 하던데.
-아니다. 밑장 빼기 이런 거, 다 최동훈 감독님이 하신 거다. 영화에 비춰진 손의 정체는 최동훈 감독님이셨던 거지. 그런데 그 영화에서 취미가 생겼어봐. 거기에 빠졌으면, 그건 정말 큰일 나는 거 아닌가?(웃음)

아까, 최동원 감독님은 마운드에 서면 누구보다도 자신감이 넘치는 선수라고 했는데, 그런 게 당신에게도 느껴진다. 무대에 오른 조승우의 카리스마도 엄청나지 않나.
-예전에는 무대 공포증이 굉장히 심했다. <렌트>때까지만 해도, 바들바들 떨었었다. 그때는 완벽주의자 기질이 있었거든. 조금의 실수도 스스로 용납 못하는 강박이 있었다. 그러다가 <지킬 앤 하이드> 일본공연에서 성대 결절로 보름 공연을 망치고 왔는데, 그 때 배우로서 굉장히 창피하고 외로웠고 고독했다. 나를 보려고 몇 달을 기다려 준 사람들인데, 내가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말도 안 되는 연기를 보여 줬다는 사실이 너무 죄스럽더라. 그런 걸 겪으면서 조금씩 성장했는데, 지금도 무대에 서면 긴장은 된다. 그건 최동원 감독님도 마찬가지셨을 거다. 마운드를 무대라고 쳤을 때, 그 곳은 두려움이 없는 곳일 수 없다. 두려움이 있지만 그걸 숨기고, 배짱으로 던지는 거지.

최동원 감독님께는 87년 5월 16일이 역사적인 순간인데, 당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나?
-음. 일단 87년 5월 16일이 감독님 스스로에게 역사적인 순간이셨을지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한국시리즈 4승하셨을 때가 더 역사적인 순간이지 않았을까. 사실 5월 16일 경기는 당시에 그리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은 뉴스였다. 손석희 아나운서가 20초도 안 되는 짧은 멘트로 이 경기를 소개하고 끝낼 정도였으니까. 그걸 엄청난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가 재조명한 거지. ‘퍼펙트 게임’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말이다. 어쨌든 나에게 역사적인 순간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어떠한 한 순간을 뽑긴 어렵다. 대신 기회가 온 순간들은 많았다. 중학교 때 뮤지컬 한 편을 보면서 배우의 꿈을 꾸게 되고. 그 작품으로 인해 계원예고 들어가서 내성적인 성격이 확 바뀌면서 연극과 뮤지컬에 빠지고. 그러면서 첫 스승인 남경읍 선생님을 만나게 되고. 그리고 뮤지컬에 더 빠지게 되고. 단대 대학교에 들어가서 전공을 하다가 말도 안 되게 영화 오디션을 봐서, 말도 안 되게 영화배우가 되고. 말도 안 되게 무명 생활을 겪고. 소극장으로 들어가서 월급 30만원씩 받아가면서 4개월간 지하에서 공연하다가, 그걸 보고 간 관계자들이 캐스팅을 해 주고. 안 할 것 같던 영화를 또 말도 안 되게 하게 되고. 영화를 했기 때문에 또 말도 안 되게 어린 나이에 뮤지컬 주연이 되고. 그렇게 1년에 뮤지컬 하나 영화 하나씩 하면서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다가 떨어질 것 같지 않던 군대라는 혹을 때고 와서 이제 30대 인생이 펼쳐진 거다. 군대 제대하고 와서, 처음으로 1년 동안 4편을 했다. <지킬 앤 하이드>부터, <복숭아나무> <퍼펙트 게임> <조로>까지. 이젠 다작배우네.(웃음) 4편 하면서, ‘나는 왜 1년에 2개씩 밖에 안 했었지? 이렇게 재미있는데?’ 싶더라. ‘내가 영원히 이렇게 활동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밑천이 드러나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겠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순간들이 다 나에겐 포인트가 된 것 같다. 군대마저도.
함께 연기 해보고 싶었다는 양동근씨와 이 영화를 통해 만났다. 많이 친해진 걸로 아는데, 양동근씨가 원채 말이 없는 편이잖나. 만나면 서로 수다도 잘 떨고 하나?
-홍보 때만 바짝 볼 텐데, 뭐.(좌중폭소) 우리가 스타일이 많이 다르다. 동근이는 워낙 자기 세계가 분명한 애라, “빠파퐈” 이런 힙합 하는 친구들이랑 놀 거고, 나는 뮤지컬이나 밴드하는 친구들이랑 어울릴 테고 말이다.(웃음) 촬영 때 우리는 신앙 애기를 많이 했다. 처음 고사 지낼 때도 “왜 고사 지낼 때마다, 항상 돼지 머리 앞에서 절을 해야 하지? 우린, 기도하자.” 이랬다. 그러면서 친해졌는데, 촬영 때 동근이는 주로 연습을 하거나, 성경책을 읽었다. 일요일에는 신앙 있는 친구들끼리 동근이 방에 모여서 가정 예배도 드리고 말이다.

모태신앙인가?
-아니.

그럼 신앙은 언제?
-초등학교 때 누나 따라 교회 갔다가. 가니까 맛있는 것도 주고 하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그런 재미로 가다가, 서서히 신앙을 갖게 됐다. 나는 아버지 없이 자랐기 때문에, 아빠라고 부를 존재가 없었다. 그런 내게 아버지라고 부를 존재가 생긴 거지. 지금은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그 분의 은혜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동근이와 그런 걸 공유하며, 많이 가까워 졌다.

많은 남자 스타들이 군대를 가면서, ‘다녀오면 내 인기가 돌아올 수 있을까’ 긴장을 많이 한다. 당신도 그랬나?
-이런 건 있었다. “작품이 안 들어오면 어쩌지?”하는 거. 제대할 때쯤 됐는데 말이지, 회사에서 시나리오를 주는데 예전 같았으면 (손으로 두꺼운 양을 그리며)이 정도? 가지고 오는데, 그때는 두어 권 이더라. ‘아~ 이제 나를 잊었구나’ 했다.(웃음) 대본을 봤는데, 내용은 또 말이 안 되고.(웃음) ‘지킬 하면서, 푹 좀 쉬어야겠구나’ 했다.(웃음) 그렇다고 위기감 같은 걸 느끼는 건 아니다. 군대 가기 전에 내 인기가 톱 배우 같았던 것도 아니고. 뮤지컬은 물론, 흥행을 시켰지만 내가 한류는 아니잖나. 몇 대 천왕 이런 거 말이다.

당신의 출연작품을 살펴보면, 어떤 추억에 대한 환기라는 생각도 든다. 현대사를 그린 <하류인생>, 60-70년대의 <클래식>, 억눌린 청춘을 그려낸 70년대의 <고고 70>. 그리고 80년대의 <퍼펙트 게임>까지 가까운 과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다. 그래서 궁금하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분들의 과거를 연기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어릴 때 집 사정이 안 좋아서, 단칸방에 살았다. 상습침수 지역이었던 망원동에 있는 단칸방이었는데, 둑이 터지면 누군가 “물이 밀려와요~”이런 소리를 질러. 그러면 나는 자다가 엄마 손 잡고 이모 집으로 도망가고, 그럴 때였다.(웃음) 그때 문방구가 있었는데, 그 문방구에서 나는 냄새를, 아직도 기억한다. 먼지 섞인 축축한 냄새. 꿉꿉한 냄새. 그런데 그 냄새가 너무 좋더라, 나는. 그런 냄새를 예기치 못한 곳에서, 가끔 맡을 때가 있다. 1초도 안 되는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그 냄새가 스쳐 가면 나는 어느 순간 과거의 그 때로 가곤 한다. 그건 굉장히 신기한 경험이다. 나에게는 추억의 냄새인 거지. 그래서 그럴까. 내가 과거의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아무리 80년대가 지역감정 조장으로 더러웠고, 70년대가 독재정권 아래 억압받던 시기였어도, 지금보다는 더 순수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그 시대는 지금보다 분명히 더 낭만적이었을 거라는 느낌도 들고. 나는 낭만적인 게, 너무 좋다. 사진도 칼라 사진보다 흑백 사진을 더 좋다. 왜, 칼라와 흑백의 중간에 있는 색 있잖나. 그게 뭐였더라~

세피아?
-아, 세피아! 그 세피아 톤이 너무 좋다. 요즘에 빠져 있는 것도 빈티지 오디오다. 그것들의 나이가 나보다 더 많다. 누군가는 그걸 고물 기계라고 하겠지만, 나에겐 보물이다. “네가 나보다 나이가 더 많단 말이야?” 이러면서 냄새도 맡아보곤 하는데, 너무 좋다. 기타도 옛날 것들에 정이 더 간다. 손 편지 쓰는 게, 편리한 메일보다 더 좋고. 대학 때 처음 PC방이 생겼는데, 나 때만 해도 손으로 리포트 쓰고 그랬다. 그게 불과 10년 밖에 안 지났는데도, 너무 그립다. 그때가 지금보다는 분명 더 낭만적이었으니까. 지금이야 아이폰이다 뭐다 많이 있지만, 나는 삐삐 세대다.(웃음) 삐삐에 ‘1004’ 이런 게 오면, ‘누구지?’ 이러면서 공중전화로 가서 듣곤 했다.(웃음) ‘486!’이 오면, 가서 확인하고. 모르지? 486!
‘사랑해!'
-어?(좌중폭소) 그럼, 5454는?

‘오빠, 사랑해!’(웃음)
-맞다. 55102! ‘보고 싶어’ 이런 것도 있었고.

그런데, 주로 그런 메시지만 받았나 봐~
-아… 나야 뭐~(좌중폭소) 고등학교 때, 인기가 조금~(웃음) 내가 중학교 때 삐삐가 나왔는데, 중학교 졸업선물로 엄마에서 삐삐를 선물 받았다. 나는 015! 서울이동통신.(웃음) 그걸 또 자랑하려고 팔에 끈 묶어서, 달고 다니고. 하하하하. 이런 과거 얘기가 참 재미있다. 그리고 내가 ‘차도남’처럼 생긴 것도 아니잖나. 서글서글한 옛날 사람같이 생겨서, 스스로 생각해도 내가 과거 얘기를 하는 게 더 매력 있다고 생각한다.

뮤지컬과 영화를 오가고 있는데, 뭐가 좋냐고 물어보는 건 우문인 것 같고. 뮤지컬 얘기도 조금 해 주면 좋겠다.
-내 원래 꿈은 뮤지컬 배우다. 뭐가 더 좋냐고 물으면 말할 수 있다. 무대가 더 좋다. 열심히 공연 연습해서, 오랜 기간 즐기면서 공연하는 게 나에겐 더 맞는다. 대본은 매번 똑같지만, 공기의 흐름은 매번 다르기 때문에 매번 새로운 공연을 하는 것 같아서 좋다, 뮤지컬은 지겹지가 않은 거지. 사실, 영화는 아직도 촬영할 때 불편하다. 그 검은 카메라가 내 눈을 거슬리게 할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많이 활동 하는 편이 아닌데, 영화를 찍으려면 이동을 많이 해야 한다. 부산 갔다 인천 갔다, 그러는 게 싫어. 영화에서 많이 기다리는 것도 힘들고, 뒤죽박죽 찍는 것도 힘들다. 집중이 안 되니까. 카메라 앞에서 우는 거? 그것도 정말 힘들다. 무대에서는 울든 안 울든 내 감정이 나오는 대로 하면 되는데, 영화에서는 “레디~”하는 순간, 전구 필라멘트가 퍽 나가버린다. 그러면 뭔가 부자연스러워져. 오케이 사인을 받아도 늘 아쉬움이 남고, 내 베스트를 못한 느낌이 들고. 영화는 아마, 앞으로도 10년쯤은 더 해야 적응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아! 무엇 보다 영화 홍보 하는 게 제일 힘들다.(웃음) 인터뷰 하는 거, 포스터 찍을 때 눈에 힘주고 카메라 째려봐야 하는 거, 이런 거. 특히 슬픈 영화는 포스터 찍을 때 카메라 보고 울어야 하는데, 그땐 포스터를 찢어 버리고 싶다.(웃음) 어쩔 수 없는 배우의 숙명이긴 한데, 그럴 때마다 ‘아, 옛날 배우들은 정말 편했겠구나’ 싶어진다. 왜, 옛날에는 배우들을 그림으로 그렸잖나. 사진으로 찍지 않고.

아닌데. 간판만 그렸지, 포스터는 그때도 찍었다.
-아! 그럼 그건 없던 걸로~(좌중폭소) 아무튼 그런 게, 괴롭고. (주변을 살피며) 지금 홍보팀 없지? 홍보를 위해 방송출연 하는 것도 괴로워. “방송에 나가면 말을 잘 못해서, 출연 안 하겠습니다”이럴 때 받는, (홍보팀의) 그 눈치들은…(좌중폭소)

지금 이 넉살로 얘기 하면, 방송 나가서도 엄청날 것 같은데?
-아니~ 싫어, 싫어.(웃음) 그런 곳에 나가면 내 기량을 발휘 못한다, 나는.

본인이 찍힌 모습을 모니터하는 걸, 부끄러워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후시 녹음할 때도 입모양만 보고 연기 하는 걸로 아는데, 아니 왜 그렇게 부끄러워하나?
-내가 나를 보고 있으니까. 그리고 피부가 안 좋아서, 자꾸 여드름만 보여. 아우~ 보기 싫어!(웃음) 사실, 그건 <춘향전>때 생긴 버릇이다. 그때 임권택 감독님과 정일성 촬영감독님이 눈을 깜빡 거리지 못하게 했거든. 영화인으로서 제대로 된 트레이닝을 받은 건데, 카메라가 클로즈업 들어갈 때 판소리가 흐른다. “(노래 부르기 시작)청산~~~”이러다가, “강을 휘돌아아아아~” 하면, 눈 시선으로 이게 정말 휘돌아야 해.(좌중폭소) “휘돌아~ 내려가니~~~” 그게 10몇 초 정도 되는데, 그 때 눈을 깜빡였더니, 감독님이 “컷! 눈을 왜 깜박이냐, 임마!” 혼내시면서 “큰 스크린에 너 눈이 꽉 차는데, 그 때 눈이 (손바닥을 위 아래로 치며)‘깜빡’, ‘깜빡’거린다고 생각해봐!” 하시더라. 그러면 나는 “아, 눈을 깜빡이면 안 되는 구나” 그러면서 다시 촬영에 들어가. 다시 “청산이~~”가는데, 또 “컷! 왜 화를 내냐! 굽이굽이 흘러가는 그걸 봐야지. 왜 째려 봐!” 이렇게 혼나고.(웃음) 나중에 촬영된 영상을 보니까, 내가 울고 있더라. 눈을 깜빡 거리면 안 되니까, 참느라 경련이 일어난 거지. 주룩주룩 울고 있더라니까. 그 뒤로는 내가 한 걸, 못 본다.
(웃음)그런 임권택 감독님, 정일성 촬영감독님과 <하류인생>으로 다시 만났는데, 그땐 어땠나?
-그때? 그때는, “아이구~ 우리 승우. 아이구~ 우리 승우, 승우” 이러면서, “좋아, 좋아” 해 주셨다. 신인에서 어느 정도 되니까, 이제 예쁜 거지.(웃음) 그 때 예쁨 많이 받았다. “아이구~ 우리 승우, 발차기도 잘하네?” 이런 소리도 듣고.(좌중 폭소)

영화 홍보가 가장 힘들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반대로 여러 영화 단계에서 가장 떨리거나 즐거운 순간은 언제인가.
-예전에는 영화 첫 촬영할 때와 리딩할 때, 굉장히 창피해 했다. 스태프들이 나를 보면서 ‘그래! 너 얼마나 잘 하나 보자’ 이러는 것 같아서 말이지. 그래서 주눅이 들곤 했는데, 군대를 다녀오면서 달라졌다. 군대가 도움이 된 게, 그곳에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무수히 많은 무대에 섰다. 할머니 앞에도 서보고, 경찰 앞에도 서보고, 국회의원 앞에도 서보고. 그 사람들은 나를 잘 모르잖나. 그러니, 반응이 없는 거다. 팬심이 없는 무대, 굉장히 객관적인 무대인 거지. 나를 모르는 유치원생들을 웃기려고 “방구?” 그래보고, 안 웃으면 “똥고!” 이러기도 했다.(웃음) 실제로 사심 없는 유치원생들을 위해, 극을 만들어서 보여도 줬고. 그러다보니, 창피한 게 없어졌다. 이제는 스태프들은 내 편,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크다. 그렇다면 관객? 관객도 나와 맞춰 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그들 앞에서 실수하거나, 버벅거려도 이젠 창피하지 않다.

뮤지컬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서, 제작이나 연출에 욕심이 있지 않을까도 싶다.
-연출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건 정말 타고나야 한다. 타고난 철학도 있어야 하고. 그래서 그런 꿈은 안 꾼다. 대신 어떤 창작 뮤지컬에서 내가 크리에이티브한 일의 한 일원이고는 싶다. 배우든 아이디어 제공자든, 그런 창작에 일조하고 싶은 생각은 있다.

아! 공, 몇 km로 던지나?
-어깨 아파서 던졌을 때, 104km. 대단한 거, 아니다. 왜, 투수들은 4번 타자 나올 때 볼을 밖으로 빼잖나. 그 볼 뺄 때도, 투수들은 130km씩 나온다. 일반 사람은, 70-80km 정도 던지는 걸로 알고 있다. 투구 폼? 나는 오버, 언더, 사이드 다 던진다. 어떻게 하면 타자를 안 맞출 수 있을까. 그게 내가 공을 던지는 기준이다.(웃음)

연말도 다가오는데, 마지막 밤 특별한 계획이 있나?
-뮤지컬 공연 끝내고, 교회 가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릴 생각이다. 그때 아마 감사기도 많이 드릴 텐데, ‘영화 잘 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려면, 기자님들 몫이 크다. 아니, 왜 갑자기 시선을 돌리고, 그래~(웃음)

2011년 12월 24일 토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2011년 12월 24일 토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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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dcksaltnr
조승우씨 클래식&마라톤때부터 팬이였는데 그다음 구르믈버서난달 부터해서 왜이렇게 멋있으신지 모르겠어요 이번 영화 평도 좋고 입소문타서 대박났으면 좋겠네요~~ 연기도 잘하시고 멋있어용!!   
2011-12-26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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