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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레디 유산 전하려 혼신의 힘 다했다” <아이 엠 우먼> 문은주 감독
2021년 1월 4일 월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 I am woman, hear me roar “ (나는 여자, 내 포효를 들어라)

1971년 공개돼 페미니즘 운동의 상징적인 곡으로 자리 잡은 ‘ I am woman ‘. 그 곡을 쓰고 부른 호주 출신 가수 헬렌 레디의 삶이 음악 영화 <아이 엠 우먼>으로 2021년 1월 국내 관객을 만난다.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이 작품의 연출을 맡은 건 5살 호주로 가족 이민을 떠난 뒤 영화를 배우며 성장해 할리우드로 진출한 문은주 감독이다.

문은주 감독은 ‘Leave Me Alone‘, ‘Angie Baby’ 등 수많은 대표곡을 내놓은 뛰어난 개인 헬렌 레디의 삶을 단독으로 전개하는 대신, 지난 수십 년 간 끝없는 진통을 겪어온 미국 ‘성평등 헌법수정안’(E.R.A.)이라는 사회적인 소재에 맞물려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방식을 택한다. 훌륭한 매니저였지만 때로 곤란한 남편이었던 제프 왈드와의 관계, 같은 호주 출신인 록 저널리스트 릴리언 과의 연대에도 비중을 뒀다.

코로나19로 서면 진행된 이번 인터뷰에서는 미국 LA에서 열린 한 시상식에서 우연히 헬렌 레디를 만난 문은주 감독의 회고부터 2017년 워싱턴에서 열린 여성 행진(Woman March)에 함께했던 이야기, 그의 남편이자 <게이샤의 추억> <엣지 오브 투모로우> <아이 엠 우먼> 등을 촬영한 디온 비브 촬영 감독과의 인연 등 문은주 감독과 <아이 엠 우먼>에 관한 크고 작은 이야기를 가득 담았다.




헬렌 레디와 LA의 한 시상식장에서 처음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첫 만남부터 그의 삶을 영화화하게 된 과정을 좀 더 자세히 들려주세요.

G’day 라는 시상식에서 헬렌을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미국 LA에서 호주인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열리는 행사예요. 그날 같은 테이블에 누가 앉아 있는지 알게 된 순간, 디온(기자 주: <아이 엠 우먼>의 촬영감독 ‘디온 비브’. 문은주 감독의 남편이다.)과 자리를 바꾸었습니다. 전설적인 헬렌 레디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거든요.

헬렌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호주 시드니의 북쪽 해변에 살던 어린 소녀였습니다. 그의 노래 ‘아이 엠 우먼’이 흘러나올 때마다 제 어머니와 친구분들은 차창을 열고 머리를 흩날리며 노래를 들었어요. 가끔은 허공에 주먹을 날리기도 하셨죠. 부모님의 볼보 스테이션 왜건 뒷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봤어요. 저는 헬렌 레디의 노래가 여성을 더욱 강인하고 담대하게 만든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래서 너무 궁금했어요. 당시 여성들에게 활력을 준 노래를 쓰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사실 그의 경력이 이렇게 국제적이고 대단한지는 몰랐습니다. 호주 미디어는 그의 이야기를 잘 다루지 않았거든요. 헬렌의 삶이 벌써 영화로 만들어졌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날 밤 인터넷을 검색했습니다. 덕분에 미드나잇 스페셜(기자 주: 미국 NBC 방송국이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방영한 음악 프로그램.)이나 캐롤 버넷 쇼 등 그의 모습이 담긴 멋진 영상을 많이 봤어요. 제인 폰다나 글로리아 스타이넘과 같이 엄청난 게스트들을 초대한 헬렌 레디쇼도 봤고요. 그런데 밤을 꼬박 새웠는데도, 그녀에 대한 영화는 없었습니다. 완전히 충격을 받았어요. 다큐멘터리도 한편 없었답니다!

저는 그의 이야기가 잊히는 것을 원치 않아요. 헬렌을 알아갈수록 그의 이야기가 ‘여성의 힘’에 관한 것이란 걸 깨달았고, 그게 모든 여성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이게 <아이 엠 우먼>을 만든 가장 큰 이유입니다. 헬렌은 너무나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어요. 이 영화는 헬렌의 유산을 이어갈 겁니다. 헬렌이 이 영화를 봤고, 전 세계 열광적인 팬들의 반응을 알게 됐다는 사실도 기쁩니다.


주연 배우 틸다 코햄 허비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지만, 주인공 역으로 낙점한 결정적인 계기가 있을 것 같아요. 노래 부르는 장면에서 그의 당당하고 결연한 표정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감독님은 그의 어떤 면모가 헬렌 레디를 표현하는데 적합할 거라고 판단하셨나요?

헬렌 역할에 맞는 배우를 찾기 위해 5개국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러다가 잡지에서 호주 배우 틸다 코브햄 허비의 사진을 봤어요. 누군지는 몰랐지만 서 있는 모습이 헬렌을 연상시키더군요. 찾아보니, 호주에서 이미 여러 편의 독립영화에 출연한 배우였어요. 그런데 나이가 22살이라는 걸 알고는 조금 실망했죠. 25세부터 48세까지, 헬렌의 폭 넓은 영화 속 나이대를 소화하기엔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도 틸다를 만나보기로 했어요.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이었는데, 이야기가 끝나고 보니 네 시간이나 흘렀더라고요. 틸다는 헬렌과 비슷한 성장 배경을 지녔습니다. 둘 다 쇼 비즈니스에 종사하던 가정에서 자랐고 어릴 때부터 무대에 섰거든요. 그래서인지 틸다는 자기 나이를 뛰어넘어 스크린을 꽉 채울 수 있다는 엄청난 자신감이 있어 보였습니다.

전기영화를 만들 때 사람들은 으레 겉모습이 닮은 배우를 찾아요. 하지만 사실 그보다 더 많은 게 필요해요. 그 사람의 정신을 담아내야 하니까요. 그런 면에서 틸다는 타고난 것 같습니다. 실제 헬렌의 모습을 담은 비디오를 산더미만큼 보냈는데 그걸 전부 봤더라고요. 이후 거의 6주 동안 리허설을 진행했는데 노래 연습, 목소리 훈련, 몸동작 수업, 심지어는 ‘헬렌처럼 숨쉬기’까지도 했어요. 그가 공연하던 방식을 재현하기 위해서요.

사실 캐스팅 확정까지 쉽지는 않았어요. 투자자를 찾는 게 무척 어려웠죠. 하지만 이 캐스팅이야말로 영화의 성공을 결정짓는 열쇠라고 생각했어요. 결론적으로 잘 한 선택이었습니다. 틸다는 역할에 녹아들기 위한 준비가 돼 있었어요.

훌륭한 스태프의 도움도 받았어요. 헤어, 메이크업 디자이너 니키 굴리(Nikki Gooley)는 머리 모양과 분장을 끝없이 테스트했어요. 소위 밑바닥부터 시작해 수많은 의상을 만들어온 의상 디자이너 에밀리(Emily Seresin)는 엄청난 수의 의상 피팅 작업을 치러냈죠. 재능이 넘치는 촬영감독 디온 비브(Dion Beebe)는 거장의 눈으로 헬렌을 커다란 스크린에 재현해냈어요.

덕분에 영화 속 틸다의 공연에 찬사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스페셜 프레젠테이션 부문 개막작으로 초대받았던 토론토영화제에서 미국 잡지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로부터 브레이크쓰루 어워드를, WIN(Women’s Image Network Award)에서는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ACTAA Award(Australian Academy Cinema Television Atrs)에서도 후보에 올랐습니다.




헬렌 레디의 삶은 미국에서 ‘성평등 헌법수정안’이 통과되지 못한 현실과 맞물려 흘러갑니다. 워싱턴 여성 행진 무대에서 ‘아이 엠 우먼’을 부르는 공연 장면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데요. 여성주의 사건과 맞물리는 헬렌 레디의 인생을 통해 보여주려던 것은 무엇인지요.

헬렌이 ‘아이 엠 우먼’ 가사를 쓴 건 1970년대 여성운동이 일어날 때였어요. 당시 ‘여성 행진’(Woman March)과 페미니즘의 부상은 헬렌과 릴리안(기자 주: 헬렌 레디를 지지한 친구이자 유명 록 저널리스트로 극 중 다니엘 맥도널드가 연기했다.)에도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영화 배경으로 삼고 싶었습니다. 미국의 역사적 맥락 안에서 헬렌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죠. 영화 안에서 특히 E.R.A.(Equal Rights Amendment, 성평등 헌법수정안)를 강조했는데, 그 내용이 특정한 시대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나리오를 개발하던 2017년 전 세계적으로 여성 행진(Woman’s March) 물결이 (다시) 일어났어요. 1989년 헬렌이 여성 행진의 마지막 공연을 했던 바로 그 링컨 기념관에서 말이에요. 그게 <아이 엠 우먼>의 마지막 장면이기도 해서, 저도 그 자리에 직접 서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워싱턴으로 갔고 거기에서 분홍색 모자로 뒤덮인 물결을 바라봤습니다.(기자 주: 2017년 여성 행진은 트럼프 대통령 취임 다음 날인 1월 21일 미국 워싱턴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열렸다. 당시 참석자들은 행진의 상징 격으로 분홍 모자를 썼다.)

어떤 여인이 ‘내 외침을 들어봐’(hear me roar)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있더군요. 헬렌의 곡 ‘아이 엠 우먼’의 상징과도 같은 이 가사를 사진으로 찍어두었고, 결국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실제로 등장합니다. 그때 생각했죠. 그동안 여성들이 많은 걸 이뤘지만 성평등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걸요. 언젠가는 성평등 헌법수정안이 마침내 미국 헌법에 포함됐다고 자랑스럽게 선언하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끝내보고 싶네요. (기자 주: ‘미국 헌법은 성별에 상관없이 모든 미국 시민에게 동등한 법적 권리를 보장한다’는 등의 내용을 포함한 E.R.A는 1920년대 초 처음 도입돼 지금까지 30여 차례 비준됐으나 헌법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Leave Me Alone‘ ‘You And Me Against The World’ ‘Angie Baby’ ‘Ain’t No Way To Treat A Lady’ 등 삽입곡이 매우 풍부합니다. 그런데 원곡이 아니라 다른 가수가 부른 버전에 헬렌 레디의 원곡을 일부 합쳤다고 들었어요.

헬렌 레디는 공연을 그만두고 수년 동안 호주에서 살다가,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싶어서 미국 LA으로 돌아왔어요. 그때 저를 처음 만났고 곧 노래를 다시 하기로 결심했죠. 저는 운이 좋게도 그가 LA와 라스베이거스에서 열었던 리바이벌 투어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 콘서트에서 헬렌 레디의 팬을 많이 만났는데 그중에는 1970년대부터 그의 콘서트에 모두 참석한 사람도 있더군요. 그런 팬과 만나는 일이 참 즐거웠습니다.

그들에게 헬렌 레디의 어떤 곡을 가장 좋아하냐고 매번 물었는데, 그때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곡 대부분이 영화에 삽입됐습니다.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면 헬렌의 노래가 어느 지점에 삽입돼야 할지 작가(Emma Jensen)와 함께 고심했죠. 노래와 헬렌의 감정 흐름이 잘 들어맞는 게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재녹음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노래가 이야기 안에서 감성적인 울림을 주어야만 했는데 헬렌의 원곡들은 앨범용으로 녹음된 완벽한 느낌을 줬거든요. 재녹음은 참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헬렌의 목소리와 최대한 비슷한 사람을 찾아야 했고, 동시에 정말 틸다가 부르는 것처럼 느껴져야 했거든요. 음악 프로듀서인 브리 존스(Bry Jones)와 많은 나라를 뒤졌습니다. 내슈빌과 캐나다까지 가서 오디션을 치렀고 꼭 맞는 목소리를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호주 퍼스에서 ‘첼시’라는 가수를 찾았죠. 오디션을 그를 보고 저는 너무 흥분했고 동시에 안도했습니다. 그는 훌륭한 가수였고, 모두가 기억하고 있는 헬렌 레디의 노래 스타일을 재현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작업 방식은 그리 간단하지는 않았습니다. 대개 녹음한 것을 영상에 맞게 붙이는데 우리는 그 반대로 작업했어요. 먼저 완벽하게 공연 장면을 촬영하고 편집한 후, 브리와 녹음 스튜디오로 돌아가서 첼시의 노래를 다시 다듬었습니다. 관객이 스크린에서 보는 틸다의 공연 장면과 꼭 들어맞을 수 있도록이요. 저는 틸다의 노래 장면을 너무나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진짜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가수의 목소리가 틸다라는 배우의 감성에 꼭 들어맞을 수 있도록 예전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의 방식도 많이 참고했어요.

이 방식은 꽤 성공적이었던 것 같아요. 진짜 제프 왈드(기자 주: 헬렌 레디의 매니저이자 전 남편. 극 중 비중 있게 등장한다.)가 영화를 봤을 때 모든 노래를 실제 헬렌이 한 줄 알았다고 했으니까요.

제가 정말 좋아하지만 영화에 삽입하지 못한 곡들도 있습니다. ‘피스풀’(Peaceful), ‘이모션’(Emotion), ‘아이 캔트 세이 굿 바이 투 유’(I can’t say Goodbye to You)도 플레이리스트에 담고 들어보세요!


남편 제프 왈드는 마약 중독, 가산 탕진으로 헬렌 레디의 삶을 고달프게 만들지만, 한편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매니저로서 헬렌 레디의 미국 데뷔를 가능하게 한 주역이기도 합니다. 휘트니 휴스턴과 남편의 관계가 떠오르기도 했어요. 마냥 나쁘지도 그렇다고 행복하지도 않은 헬렌 레디와 제프 왈드의 관계를 드러내는 데 있어서 가장 고심한 부분은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헬렌이 제프와 왜 사랑에 빠졌는지 관객이 이해돼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처음 제프를 만났을 때 저는 카리스마가 넘치고 호감 가는, 여전히 매력적인 그의 모습에 깜짝 놀랐거든요. 헬렌이 왜 제프에게 이끌렸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관객은 왜 헬렌이가 제프와 그렇게 오랜 시간 함께 했는지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제프 역을 제대로 소화해 낼 배우를 찾는 게 더 어려웠어요. 불안하고 어두우면서도 대단히 끌림이 있는 배우를 찾아야 했으니까요. 처음 에반 피터스를 만났을 때 그는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에 출연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격적일 정도로 창백한 모습이었죠. 머리는 완전한 은발이었고 피부도 투명할 정도로 하얬어요. 늘 태닝이 된 아주 어두운 피부를 유지했던 제프 왈드와는 반대의 모습이었죠. 다만 대화를 나누면서, 에반이 어떻게 시나리오를 읽고 분석해 왔는지를 알게 됐어요. 그의 깊은 지성에 반했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동반자가 될지도 알수 있었고요.

한편 제프와 휘트니 휴스턴의 남편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제프는 코카인 중독일 때를 반성하고 33년째인 지금까지 약을 끊은 상태라는 거에요. 제프는 헬렌의 곡 ‘아이 엠 우먼’을 알리던 것과 똑같이 이 영화를 지원해주었고, 단 한 번도 영화의 수정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헬렌과 마찬가지로 호주 출신인 록저널리스트 릴리언은 자신의 글로서 헬렌을 든든하게 지지하는 인물입니다. 지금 사회를 살아가는 한 명의 관객으로서, 여성과 여성의 연대를 이야기하는 점이 마음에 와닿았어요. 한국에서 태어나 호주에서 사셨고, 또 할리우드에 진출해 영화 일을 하게 되면서 감독님도 많은 여성 동료를 만나셨을 텐데요. 연대를 나누고 서로 지지했던 이야기가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아이 엠 우먼>의 편집을 하고 있을 때, 전설적인 호주 출신 감독 질리안 암스트롱(기자 주: <작은 아씨들>(1994)을 연출했다.)이 가편집본을 보고 정말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 주셨습니다.

중학생 때 <나의 화려한 인생>(My Brilliant Career, 1979)을 본 후 제가 질리안의 큰 팬이 되었거든요. 엄격한 사립 여중학교에 다니던 저에게 그 영화는 깊은 울림을 주었고, 주인공인 시빌라의 고집불통인 이야기도 좋아했습니다.

수년이 지난 후 제가 영화 학교에 진학했을 때, 질리안이 1930년대 당시 27살이던 맥도나 자매 이후 호주에서 처음으로 영화를 연출한 여성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호주에서 칸 경쟁 부문에 처음으로 초대받은 여성이라는 사실도요. <나의 화려한 인생>을 계기로 질리안은 여성 감독이 거의 없던 할리우드에도 진출해 스튜디오(제작사) 작품을 연출했죠. 영화계에서 그가 이룬 업적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지금도 훌륭한 친구로 지내고 있어요.


한국 관객은 아직 문은주 감독님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 영화를 시작하게 된 시점의 이야기들, 촬영 감독인 디온 비브를 만나게 된 과정의 이야기 등을 전해주시면 관객이 감독님의 삶과 영화관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우리 가족은 제가 5살 때 호주에 이민을 왔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멜버른에서 석사학위를 받으셨고 한국과 무역을 하는 호주 회사에 스카우트 돼 일하셨고요. 어머니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셨고 저희가 악기를 연주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노래하고 춤추고 연극하는 걸 좋아했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TV 드라마 감독이었던 제일 친한 친구를 따라 방송국에 견학을 하러 갔는데 그게 제 삶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감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당시에는 호주에 아시아 출신 감독이 없었을 뿐 아니라 여성 감독 자체도 거의 없어서 롤 모델이 없었거든요. 부모님께서는 저희가 성공적인 삶을 살기 바라셨고, 그래서 예술가의 삶은 안정적이지 않다고 여기셨죠.

그래서 명망 높은 호주의 법대에 진학했습니다. 좋은 딸이 되고 싶기도 했고, 토론도 잘했으니까요. 아마도 영화 속 법정에 나오는 변호사처럼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정작 대학 내 훌륭한 연극 프로그램을 수행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후에) 호주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최초의 아시아 여성 중 하나가 됐어요. 그게 더 접근하기 쉬운 길처럼 보였거든요. 그런데 TV에서 일하면서 깨달았습니다. 진짜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감독이라는 사실을요.

관련 공부를 하기 위해 AFTRS(The Australian Film Television and Radio School)에 진학했고 그 뒤에 미국영화연구소 (American Film Institute)에서 연출전공 석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AFTRS 신입생 시절 같은 학교 3학년이던 디온을 만났어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영화를 함께 보러 다녔고 사랑에 빠졌죠. 디온이 처음으로 작업한 단편영화를 본 순간, 저는 그에게 엄청난 재능이 있고 언젠가 오스카 상을 수상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기자 주: 디온 비브는 <콜래트럴>(2004) <게이샤의 추억>(2005)으로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촬영상을 수상했다.)

이후 우리는 할리우드로 옮겨왔고 함께 꿈을 실현해왔습니다. 서로에게 일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훌륭한 동반자가 되었어요. 그리고 이제 막 16세가 된 엑슬이라는 아들이 있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늘 K팝 스타처럼 생겼다고 말하는데(웃음) 사실 우리 가족 중에서 가장 훌륭한 감독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D


데뷔작은 모든 감독에게 특별하다고 생각해요. 문은주 감독님께 <아이 엠 우먼>은 작업 과정은 어떤 의미를 남겼나요. 또 관객에게 어떤 영화로 받아들여지면 좋을까요.

제 첫 장편 영화가 멋진 여성 헬렌의 이야기라는 것, 이 영화를 통해 그녀가 기억되고 또 그녀의 유산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다는 게 기쁩니다. 정말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그 과정이 좋았고, 여전히 영화를 만들 당시 이야기를 하는 게 좋아요. 전 세계에서 이 영화를 만들어줘 고맙다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하는 수천 통의 메시지를 받았어요. 믿을 수 없을 만큼 기쁩니다.

마지막은 저와 인터뷰하는 모든 분께 드리는 공통질문입니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그건 언제일까요?

전 세계 영화관이 문을 닫았지만, 2020년 이 영화를 개봉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기자 주: <아이 엠 우먼>은 2020년 9월 미국에서, 10월 영국에서, 11월 뉴질랜드에서, 12월 스페인에서 개봉했다. 국내에서는 1월 중 개봉한다.) 모두가 팬데믹을 겪으며 힘든 한 해를 보냈고 저 역시 일과 여행에 제한이 있었지만 남편, 아들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점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가족끼리 많은 시간을 같이했던 올해를 기억할 것 같아요. 영화가 개봉될 때 한국에 갈 수 있다면 좋겠네요. 제가 태어난 나라에서 <아이 엠 우먼>을 상영하는 건 무척 뜻깊은 일일 겁니다. 많은 분이 봐주길 기대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사진 제공_ 문은주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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