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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작품의 근간이자, 영화의 일원 <남산의 부장들> 이지민 작가
2020년 2월 17일 월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유신 정권 말기를 차분히 응시하는 <남산의 부장들>(2019)은 ‘김규평’(이병헌)과 ‘박통’(이성민) 주변으로 얽히고설킨 감정의 타래를 세밀하게 드러낸다. “햄릿처럼 고뇌하고, 로미오처럼 사랑하고, 오셀로처럼 질투하는” 인물의 심경 앞에서 관객은 자질구레한 진영 논리와 상관없이, 그 시절 어떤 인물의 감정적 촉발 혹은 회한을 이해할 수 있다. 입을 앙다물고 서로를 향한 끓는 심정을 쌓아 올리는 이들의 면면을 설득력 있게 묘사한 이지민 작가는 영화 이상으로 영화적인 10.26의 당도를, 그럴싸하게 납득시킨다.

이지민 작가는 최근 <밀정>(2016) <마약왕>(2017) <천문: 하늘에 묻는다>(2018) <남산의 부장들>로 이어지는 굵직한 상업 영화 시나리오를 연달아 세상에 내놓았다. 역동적인 시대를 배경 삼아, 비범한 인물을 동력 삼아, 절묘한 관계성을 무기 삼아, 실제와 가상의 선을 적당히 넘나드는 균형감을 지렛대 삼아 써낸 글은 영화로 완성돼 많은 관객의 발길을 붙잡았다. 시나리오 집필의 정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남산의 부장들>이 400만 관객을 넘긴 즈음, 그를 만났다. 걸출한 작품의 든든한 비호 속에서도 마냥 낙관하기는 어려운 시나리오 작가의 삶을 슬며시 들여다본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이 각본상을 받자 봉준호 감독과 함께 한진원 작가가 무대에 올랐다. 완성된 영화를 접하는 대중은 주로 감독의 이름을 기억하지만, 한 편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시나리오 작가의 역할을 결코 제쳐놓을 수 없다.
작가도 영화 팀의 일원이라는 걸 잘 보여준 모습이다. 촬영, 미술 다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어쨌거나 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태도는 작가가 작성하는 글에서 나온다. 투자사와 배우에게 백지를 내밀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세팅’ 단계를 지나 캐스팅을 끝내고 나면 작가의 존재가 지워지는 경우도 많다. 어쩌면 그런 과정에 익숙해지는 게 이 작업을 끝까지 해낼 수 있는 힘 아닐까. 자신이 지워지는 걸 감내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 일은 작가라는 자아를 지닌 사람에게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아마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한국 축구에서 공격수가 사라지게 된 것처럼 영화계에도 시나리오 작가가 없어지게 될 거다.(웃음)

드라마와 달리 영화에서는 유독 작가가 누군지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감독이 작가를 언급해주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김지운 감독과 작업하면서 가장 좋았던 게 작가를 호명해준다는 거였다. 어떤 작가가 쓴 글이 참 좋아서 영화를 하기로 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밀정> 때는 작가의 권리를 찾겠다는 마음으로 소위 ‘반항’을 한 적도 많은데 그는 혹 섭섭한 게 있더라도 오해하지 말라며 나를 잘 챙겨줬다. 배우들이 촬영 전 대본을 읽어보는 자리에도 와보겠냐고 물었다. 아마 감독으로서 자신감이 있어서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것 같다. 이게 가능한 감독은 소위 ‘박봉김’(기자 주: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정도일 거다.(웃음)




당신의 경우는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일 것 같다. <밀정> <마약왕> <천문: 하늘에 묻는다> <남산의 부장들>까지 최근 5년간 굵직한 작품의 시나리오를 연이어 집필했다.
업계에서는 나를 알지만, 일반인은 나를 모른다. 아마 사람들은 시나리오를 전담하는 작가군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잘 모를 수도 있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강하다. 감독 본인도 입봉이 어렵고 몇 년 만에 한 편을 힘들게 찍다 보니 모든 걸 자신이 했다고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신인 작가는 이런 현실에 충격을 많이 받는다. 솔직한 심정은, 후배들을 아끼는 마음에서 빨리 드라마 대본을 쓰라고 말하고 싶다.(웃음) 드라마를 제작하는 매체가 많아졌고 이미 많은 작가가 그쪽으로 갔다. 아마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을 거다. 그만큼 처우가 다르다.

시나리오 작가에 대한 회의적인 인식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써내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자리는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당신 말처럼 기존 방송 채널뿐만 아니라 넷플릭스 같은 플랫폼도 드라마(오리지널)를 제작한다.
그래서 너무나 다행이다. 영화에 목맬 필요 없이 다른 OTT와의 작업을 하면서 시대와 호흡할 수 있다. 작가는 경험이 많아야 한다. 많은 양을 내놓아야 자기 필력과 개성을 드러낼 수 있으니까. 흥행이나 성공 여부를 떠나서 (글이 영상화되는) 경험 자체도 큰 도움이 된다. 그건 마치 수영을 물에 들어가서 배웠느냐, 글로만 배웠느냐와 같은 거다. 그런데 영화는 그럴 기회가 너무 적다. 한 편이 완성되는데 기본적으로 3~4년의 시간이 걸린다.

영화계도 분명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 영화진흥위원회는 시나리오 전문 작가를 양성, 지원하는 ‘씬 원’(S#1)을 개소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스템이 좋아지기는 하겠지만, 그게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내가 희생될 수는 없지 않은가.(웃음) 한국 영화는 시스템에 비해서는 좋은 성과를 내고 있지만 스타 배우, 스타 감독에 지나치게 휘둘린다. 제작자, 감독 개인의 야심에 따라 소위 ‘이너서클’로 일이 굴러가는 경우도 많다. 나는 각본, 각색, 윤색, 각색 지원까지 일을 많이 해봤기 때문에 괜찮지만 신인 작가라면 상황은 다를 것이다. 일을 기다리다 지쳐 포기하게 될 수도 있다.

당초 <모던보이>(2008)의 원작 소설인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2000)를 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인가.
아마 내가 <밀정>으로 영화 시나리오를 처음 쓴 줄 아는 분들도 있을 텐데 사실은 오래전 <품행제로>(2002) 각본을 담당했다. 한동안 영화계 일이 싫어져서 하지 않다가 다시 돌아왔고, 지금은 영화라는 매체를 사랑하는 팬심으로 일하는 측면도 있다. 말실수로 개봉하는 작품에 누가되는 게 걱정돼 그간 인터뷰를 꺼렸는데… “이제는 작가도 나서야 한다”는 유승희 작가(기자 주: <아이 캔 스피크>(2017) 시나리오를 썼다.)의 말을 듣고 나섰다.(웃음) <남산의 부장들> 상영이 끝나가는 타이밍이기도 했고.


‘코로나 19’가 아니었다면 좀 더 많은 관객과 만났을 작품이라고 본다. 10.26 발발 직전 상황의 박정희, 김재규, 차지철, 전두환 등 실존 인물을 다루면서 460만 관객을 동원했다.
대학원을 다닐 때 도서관에서 동아일보 초판 기사 ‘남산의 부장들’을 읽고 실습용 시나리오를 써본 적이 있다. <마약왕> 작업 이후 우민호 감독님이 ‘남산의 부장들’ 관련 저작권을 샀다고 하면서 내게 제안을 줬을 때 마치 운명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다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기사량이 너무 방대했고 그마저도 이미 MBC 드라마 <제5공화국>(2005)에서 거의 다 다뤘던 내용이었다. 그대로 영화를 만들면 장르적 즐거움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영화를 보기 전 비슷한 점을 우려했었다. 우리나라 관객이 이미 너무나 잘 아는 내용인데 과연 어떤 식으로 이야기의 매력을 살렸을지 궁금하더라.
우민호 감독은 처음부터 정확하게 누아르 장르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때 말하는 누아르는 겉멋 든 남자들의 이야기는 아니다. 감정의 골을 따라가는 이야기다. 권력을 쥔 자가 사소한 개인감정에 휩쓸릴 때 한 집단에 비극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제일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들의 욕망과 감정 그리고 분열을 세밀하게 드러내려고 했다. 박정희 정권뿐만 아니라 어느 정권에도 대입될 수 있는 이야기다. 주변에서 들어보니 평범한 회사원 아저씨들이 그렇게 이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하더라. 내가 왜 그동안 사회생활을 그렇게 못 했는지 알 수 있다면서.(웃음)

세밀한 감정 묘사에 중점을 뒀다는 데 동의한다. ‘김규평’(이병헌) 주변으로 얽히고설켜 있는 꿈틀대는 감정에 이입하며 영화를 따라가다 보니 10.26이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심정적으로 납득이 되더라.
내 작품을 관통하는 공통점 중 하나는 우리의 역사적인 콤플렉스를 좀 이겨내 보자는 것이다. <암살>(2015)을 보고 나서 기분이 좋았던 이유는 그 작품이 일제 강점기를 다루는 영화는 망한다는 징크스를 깼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를 매력적인 엔터테인먼트 소재로 활용하면서 그 시절에 대한 콤플렉스를 그만 느끼자고 대중에게 확실히 선언했다. 어쩌면 <밀정>은 그에 관한 심화학습이다. <남산의 부장들> 역시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다.

유신 정권 말기를 차분히 응시하고, 진영 논리와 상관없이 그 시절 어떤 인물의 감정적 촉발 혹은 회한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그럴 것이다.
<남산의 부장들>은 충분히 더 자극적으로 연출될 수도 있는 작품이었지만 우민호 감독은 관객에게 점잖게 말을 거는 작품의 격을 잘 유지해 줬다. 민감한 문제일수록 격을 놓치면 안 된다. ‘김규평’은 햄릿처럼 고뇌하고, 로미오처럼 사랑하고, 오셀로처럼 질투한다. 그런 격식 있는 사람(작품)을 비난하면, 비난하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해지는 것 아닌가.



시대적 배경을 둔 작품의 시나리오를 쓴 만큼 실제 역사도 꼼꼼히 참고했을 것 같다. ‘박통’을 향해 총을 겨누는 ‘김규평’의 “너도 죽어봐”라는 대사는 김재규가 실제로 박정희에게 했던 말로 알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차지철은 실제로 청와대 주변에 탱크를 돌아다니게 했다. 그걸 본 효자동 노인들이 기절했다는 영화 속 대사도 사실이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였다더라는 이야기도 실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상황이 그러니 미국에서는 부마 항쟁이 일었던 1979년을 심각하게 본 것 같다. 영화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시나리오에는 미국 쪽에서 “상황이 4.19 때와 똑같다. 사태가 심각한데 너희만 모르고 있다”고 말하는 대사도 있었다.

‘박통’이 죽고 난 뒤 ‘전두혁’(서현우)의 행동은 어떤가. 극 중에서는 당초부터 권좌에 관심 있는 인물은 아닌 것처럼 묘사됐다. 그저 금고에 들어있던 금괴와 스위스 비밀 계좌를 들고 달아나려다가, 문득 비어 있는 ‘박통’의 빈 의자를 응시하며 묘한 표정을 짓지 않나.
그 장면은 영화적 설정이었는데 많은 분이 ‘킬링 포인트’로 꼽더라.(웃음). 서현우 배우가 그 장면에서 연기를 아주 잘했다. 배우가 연기를 잘하면 작가의 쾌감은 엄청나다. 특히 명배우가 내가 쓴 대사를 입으로 뱉을 때, 이미 알고 있는 대사임에도 ‘심쿵’한다. <밀정>에서 이병헌이 “그 미끼 우리가 뭅시다”라고 말할 때 나는 소리를 질렀다.(웃음) <남산의 부장들>에서는 옷장 안에서 ‘박통’을 도청하던 ‘김규평’의 배신당한 눈빛을 보여주는데, 내 생각 이상이었다. 아마 이런 게 시나리오 작가가 느낄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일 것이다.

카메라는 술자리에 앉아 회한과 고독에 찬 표정을 짓는 ‘박통’역의 이성민을 비출 뿐이지만, 실제로는 옷장 속에서 도청 중인 ‘김규평’이 그 공간에 함께 존재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장면이었다.
도청 장면은 실제 역사는 아니다. 실제 김재규라면 아마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을 거로 생각한다.(웃음) 하지만 중앙정보부 부장이 자기를 못 믿는 대통령을 도청하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는 게 정공법으로 재미있을 것 같았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컨버세이션>(1974)이라는 영화에 등장하는 도청 명장면을 떠올리며 썼다.

본인이 다루는 시절의 이야기에 관심이 크다는 게 느껴진다. 그걸 시나리오로 근력 있게 써낸다는 인상이다. 허진호 감독의 <천문: 하늘에 묻는다> 때는 세종이 노비에게 출산 휴가를 주었다는 ‘깨알 같은’ 역사적 사실까지 대사로 등장해 감탄했다.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은 왜곡 논란이 개봉까지 위협하는 경우가 있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 조감독은 아마 세종 학회에 가도 될 정도로 공부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 내용에는 과장이 없지 않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 재미가 너무 떨어진다. 다만 영화를 만든 허진호 감독도, 출연한 배우도 모두 순수하고 좋은 에너지로 일을 해줬기 때문에 작품이 잘 보호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흥행이 아주 잘 되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아저씨들 둘(‘세종’역의 한석규와 ‘영실’역의 최민식)이 껴안는 장면을 보고 세 번이나 울었다.(웃음)



<천문: 하늘에 묻는다>를 보면서는 조력자의 역할을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더라. 기회를 주고 길을 열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게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내 꿈을 알아봐 주는 사람을 찾기가 참 어렵지 않나. ‘영실’은 당신께서 꿈꾸지 않았으면 내가 어찌 이런 걸 만들 수 있었겠냐고 하고, ‘세종’은 네가 만들지 않았으면 그게 내 꿈인 줄 누가 알아줬겠냐고 한다.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시 보일 만한 장면이다. 다만 시나리오를 쓸 때는 세종과 영실 사이가 그 정도 멜로는 아니었다.(웃음) ‘멜로 감독’ 허진호 감독님의 감정이 워낙 섬세하기 때문에 잘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혹, 작가로서 ‘세종’ 혹은 ‘영실’같은 조력자가 있었나.
좋은 감독을 만나고 캐스팅이 잘 됐다는 점에서 시나리오 작가로서는 운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내 성에 찰 만한 조력자가 있었던 건 아니다. 작가는 누구에게 기대지 않고 독립적으로 일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다음 작품이 예정돼 있나.
강이관 감독이 연출하고 배두나, 김윤석 배우가 출연하는 <바이러스>가 촬영을 마쳤다고 들었다. 내가 쓴 소설 <청춘극한기>(2011)를 원작으로 한다. 아마 원작 주인공의 이름만 남고 모든 게 바뀐 수준인 것 같긴 하지만(웃음) 작가인 내게 합당하게 저작권을 지불했으니 그 정도 변화는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야 한다. 최근에는 10년 전 쓴 <나와 마릴린>(2009)이 미국에서 발행됐다. 소위 ‘K-노블’을 찾는 흐름 속에서 여성 서사가 다시 주목받는 것 같다.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두 아이를 볼 때. 여자와 남자는 필연적으로 싸우는 존재라는 걸 알게 한다.(웃음)

사진_이종훈 실장(스튜디오 레일라)




2020년 2월 17일 월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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